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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준 Dec 09. 2021

마켓웍스 작전

11월 21일(일)


지난 이틀간 내내 내렸던 비가 그쳤다. 7개월만에 처음으로 맞는 제법 비다운 비였다. 무더운 날씨만 계속해서 겪다보니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 가슴이 설레었다. 너무도 반가웠던 비의 비린내는 달콤하기까지 해서 단비라는 표현이 이해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틀 내내 쉬지 않고 단비가 폭풍 같이 강하게 내리자 젖은 빨래가 마르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방 전체가 습하였다.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생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인지라 양철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고, 냉기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비는 반갑지만, 잠깐이라도 쉬는 타이밍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찰나, 흐리긴 하지만, 비가 그쳤다.

잠깐 쉬어주는 비에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로 가니, 추수 감사주일이었다. 추수 감사절이란 교회에서는 추석과도 같은 중요한 절기로서 지난 한 해동안 거둔, 추수한 것들을 뒤돌아보고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날이다. 덕분에 이제 두달도 채 남지 않은 한 해를 뒤돌아봤다.


돌이켜보니,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파병을, 내가 딱 원하는 시기에, 내가 희망하는 자리로 왔다. 중위라는 계급, 그러니까 파병을 올 수 있는 가장 낮은 계급에 빠르게 와서, 대외 활동을 많이하는, 상대적으로 보고 배우는 것이 많은 통역장교라는 보직으로 오다니 새삼 감사했다.


물론 그간 내가 상상해왔던 파병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아름다운 현지 여성과의 연애는 보아하니 실패할 것 같고,(파병 전 부모님의 승인을 득했고, 기꺼이 나의 판단을 지지해 주셨다.) 코로나로 인하여 현지 휴가 또한 불가능했다.  

하긴, 고민에 수정을 더해 완벽하게 계획을 세워도 막상 실전에 부딪히면 또 그때 그때 해결해 나가는게 군생활의 묘미 아니겠나. 일단 당면한 일들에 정신 없이 달리다보면, 후에 돌이켜 보았을 때 많이도 뛰어왔구나 느끼겠지.


그럼 일단 지금 마주한 일은 뭐가 있지? 예배시간에 점점 설교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해야할 일이 무엇이고, 어떤 것에 최선을 다할 수 있나 생각해보니 오늘은 마켓 웍스(Market walks) 작전이 있는 날이었다.


마켓웍스 작전이란 말 그래로 현지 시장을 걸어서 돌아다니며 작전지역의 주민들과의 우호도를 향상시키는 작전이다.

주민들과의 대화와 물품 구매 등을 통해 우리 부대에 대한 주민들의 친밀감을 쌓고 현행 작전에 제한 사항이 없도록 하는 중요한 작전 중에 하나이며 동시에 UN군의 홍보의 임무도 수행한다. UN군의 일원으로 시민들과 대화하면서 우리의 정책의 자연스러운 홍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켓웍스 작전하는 실시할 때는 여군도 편성하여서 시민들에게 여성도 작전을 잘 수행 할 수 있음을 보였다. 여군의 작전 모습을 보임으로서 존재로 여성의 역할을 국한되지 않음을 보였다.


작전 지역내 5개 마을 디바, 부르즈라할, 부르글리아, 샤브리하, 압바시아 중 오늘 우리가 방문할 곳은 부르글리아였다.

지난 작전팀의 평가를 들어보니 5개의 마을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마을이었다.

상점이 얼마 있지 않고, 민가가 많으며 무엇보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가득한 곳이어서 작전을 수행하기에 어렵다면 어려운 지역이었다.


항상 외부로 나갈 때는 지휘관을 모시고 통역의 임무를 띈 채 긴장한 상태로 밖으로 나갔다. 어찌보면 처음으로 통역의 임무를 띄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것 아닌가.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목사님의 설교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안 듣기는 이미 오래 전이었다. 마음이 들뜨고 머릿속에는 오늘의 작전 지역인 부르글리아의 시내가 벌써 그려졌다.


예배 후 거의 바로 작전을 나가니 계획은 지금 구상을 해야한다. 미리 작전을 나갔다 온 인원들의 경험을 설교 대신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일단 달러는 무조건 1달러로 가져가야 한다. 물건이 2달러를 넘는 것들이 거의 없고, 거스름 돈을 받는 과정이 녹록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바논의 경제난으로 인해 더 이상 달러와 리라의 고정환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달러와 리라의 환율이 바뀌고 변화하는 환율을 노점상에서 적용하여 잔돈을 받기란 기대하기 어렵다.


일단 달러는 1달러를 챙기고, 마침 초콜렛이 방에 좀 있는데 초콜렛을 좀 싸갈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호기심에 수줍게 다가오는 아이들의 입에 달콤한 기억 한 조각이라도 넣어주고 싶었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후에 마찬가지로 어려운 시절을 겪었고, 기브 미 초콜렛을 얼마나 목이 터져라 외쳤는가. 물론 우리의 전후보다는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동네 아이들이 파병 후 귀국 선물용으로 미리 구입한 고급 초콜릿을 먹는 경험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들에게 좀 더 오래가는 것, 아니 오래 보았을 때 더 남을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뭐 어렸을 때 동네에서 뛰어다니다가 마주친 한국인이 주었던 초콜릿의 맛을 평생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입안에서 녹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도움이 될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마땅히 해야하는 것. 그건 꿈꾸는 것이었다. 그간 차를 타고 오고 가며 수도 없이 봐왔던 창문 밖 물건 파는 꼬마 아이들에게 펜을 선물 해야겠다. 그걸로 각자의 꿈을 그리게 해야겠다. 그리고 비싼 걸로 줘야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눈에도 좋아보여서 소중하게 아끼고 잘 때도 쥐고 자서 감히 잃어버리지 못하는 것을 줘야겠다. 기왕이면 삼색 펜으로 줘서 검은색이 떨어지면 파란색 빨간색이라도 쓰게 해야겠다.

가지고 있는 아끼는 펜들을 모두 모아서 주머니에 한가득 가져가리라 다짐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는 대회의실에 모두 모여 작전의 목적과 주의사항, 작전지역에 대한 설명을 작전장교에게 들었다.

모두들 거의 처음으로 가장 현지의 문화와 가깝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어했다. 모두들 방탄복과 헬멧을 입고 선글라스를 챙겼다.


"오늘 선글라스랑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버프는 착용이 제한됩니다."

작전장교가 말했다.


"마켓웍스 작전의 목적은 작전지역의 주민들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인데, 얼굴을 너무 가리고,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면, 작전 목적 달성이 제한될 수 있다는 여단의 판단입니다."


주의 사항도 많았다. 건물(특히 모스크) 및 인원을 상대로 사진 촬영은 협조가 되지 않았다면 금지다. 동의 없이 사진을 촬영하는 것은 공격목표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동 간에도 대열을 갖추지 않아서 자유로운 느낌을 주되, 선두와 후미에는 레바논 군이 경호를 한다. 대열은 없지만, 단체로 움직이여야 하고, 개별 행동은 절대 금지이다. 현지인과 정치적, 역사적인 대화도 하지 않는다. 만일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즉시 레바논 군에게 알린다. 또한 돈 또는 음식물을 요구하는 아이들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는다. 요구를 한번 들어주게 되면 다음에 또 요구를 하고 다른 인원이 안 사주면 손가락 욕 또는 욕설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깐 나의 볼펜 dream 프로젝트가 마음에 걸렸으나 음식물과 돈이 아니라는 것에 변명 삼았다.


모든 설명을 듣고 함께 내려가 권총과 권총탄을 수령했다. 이후 수송부로 걸어내려가니 우리를 경호하는 한국군 인원들이 타고 있는 흰색 싼타페 한 대와 스타렉스 한대가 있었다.


비좁았지만, 스타렉스 맨 뒷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차에 타자 옆자리에는 민사장교가 있었다. 각각 한국어 수업 초급반과 고급반을 맡기에 서로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부르글리아 시청 위치 어딘지 알고 있죠?"

수송중대장님이 운전 부사관에게 말을 건넸다.


잠깐만 부르글리아 시청? 생각해보니 내가 선생으로 진행하고 있는 한국어 수업 고급반의 학생 와파가 이전에 자기 소개를 할 때 부르글리아 시청의 바로 옆 건물에 산다고 한 기억이 났다. 와파네 집 베란다에서 시청이 보일 정도로 가깝다고 했는데, 와파 나오라고 해야겠다.


나와 민사장교의 셀카를 찍어 와파에게 핸드폰 메세지를 보냈다.

“와파! 나랑 캡틴 킴 지금 부르글리아로 마켓웍스 작전을 가고 있어요! 기회가 되면 만나도 재미있겠다.”


모든 준비와 보고를 마치고 위병소 밖을 나갔다. 지휘관 없이, 과장님들 없이 초급 장교 및 부사관들로만 구성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차 안에서부터 음악을 틀고 목청껏 떠들어댔다. 여기저기서 ‘와 저기봐, 중고차를 저렇게 두는구나.” . “방금 지나가는 저 사람 봤어?” 등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한 10분쯤 실컷 떠들다 보니 차가 잠시 멈췄다.


“중대장님 계속해서 올라갑니까?”

가파른 언덕을 마주한 운전 부사관이 수송 중대장님께 물었다.


“이 길 맞으니까 계속해서 올라갑시다. 가다보면 시청 나올건데 시청 안 주차장에 주차하시죠.”

수송 중대장님이 답변했다.


창밖으로 내다본 언덕은 상당히 가팔랐다. 마치 이태원 일대의 동네 같았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그 언덕에도 다닥다닥 집이 붙어있었다. UN 마크를 붙인 흰색 차량 두 대가 들어오자 마을 주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대문을 열어 놓고 생활하는 할머니들이 먼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2층 베란다로 나와서 아이들이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500 미터쯤 가자 고지에 바로 시청이 나타났다. 규모가 작았다. 한국의 동사무소의 규모였다.


시청안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아직 우리의 경호를 맡기로 한 레바논 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저기 시청에 정자가 보이는데 혹시 저기서 내려서 기다려도 되나요?"

비좁은 스타렉스에서 다리를 들어올리고 있는 보급장교가 수송중대장님께 말을 건넸다.


"우리도 한국군 경호 병력이 있으니까 그럼 레바논 군 도착하기 전까지 저기 정자에서 잠깐 내려서 쉽시다."

수송 중대장님이 말에 모두 신음소리를 내며 나와 기지게를 켰다.


“어 와파다!”

내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2층 집 베란다에 와파가 나와있었다. 과연 와파의 베란다에 마음먹고 뛰어내린다면 시청에 부딪힐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매주 토요일 16시 화상통화로 40분씩 수업만 6번하다가 직접 만나니 반가웠다.

코로나 상황을 고려하여 실내에는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집에 와서 차 한잔 하라는 와파의 제안을 듣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2층 베란다에 서 있는 와파, 그리고 밑에서 나와 민사장교가 한번에 나오게끔 셀카를 찍었다.


시청의 정자로 가니 한국의 냄새가 물씬 났다. 혹시 이것도 우리가 기증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때

시청의 흰 벽면에 한국의 민화,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그려져 있었다.


"저거 벽화 우리가 그린 겁니까?"

내가 물었다.


"저거  그냥 벽이 아니라 이전에 우리가 공여한 물탱크인데 지금은 고장이 났다고 하더라고."

민사장교가 답했다.


그때 우리의 입장에서부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호시탐탐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동네 남자 아이들 세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직 영구치가 다 나지 않았고, 키도 작은 것이 각각 10살 7살 5살 정도 되어보였다. 그 또래에는 나이가 가장 중요한 서열의 요소이기에 10살이 대장 노릇, 7살이 행동대장, 5살은 아무말도 못하고 웃으며 뒤에서 쭈뼛거렸다.


가장 먼저 10살이 뭐라고 이야기하다가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보아하니 예전에 마을에서 태권도 교육을 했을 떄(코로나로 인하여 1~2년 전에 마을에서 태권도 교육을 진행 했었다.) 형 누나를 따라 곁눈질로 배운 모양인데 갑작스럽게 몇 년만에 보이는 시범치고는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잘하는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준 뒤 왼쪽 주머니에 챙겨온 제트 스트림 3색 펜을 주었다. 순간 10살 어린 아이의 눈에 반짝 하고 빛이 돌았다. 이어서 행동대장에게도 펜을 하나 주었다. 막내 5살도 이제 본인의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수줍어서 나오지 못했다.


나오라고 손짓하자 대장이 나갈 것을 막둥이에게 지시했고, 그래도 수줍게 나오려하자 행동대장이 등을 떠밀었다.


“애들아. 너네 공부해야 해. 공부는 중요해,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생각해 온 바는 꿈을 그리는 것이었으나, 의사소통이라는 벽에 부딪히고, 시간 관계상 그냥 공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나마 적극적인 대장이 나의 입술을 뻔히 바라보며 내 영어를 이해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공부하라고, 공부.” 펜을 들어서 허공에 공부하는 시늉을 보였다. 셋 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의미였다. 이제 그만 가도 좋다는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자 셋 다 한 손에는 펜을 한자루씩 들고 쏜살 같이 시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켜보던 다른 부대원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펜을 있는 것을 다가지고 한 13자루 가져왔기에 다른 부대원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달러와 초콜릿이 아니고 교육 목적상이니 허용가능할 것이라는 나의 설명과 프로젝트의 취지를 알리자

이내 레바논군이 도착했다. 장교 한 명과 병사 두 명이 지프차를 타고 왔다.


장교는 젊은 반달곰 같은 사내였다. 큰 키에 덩치가 매우 컸다. 배도 나온 것이 근육질의 몸이 아닌, 풍채가 좋은 상이었다. 파란색 덴탈 마스크 아래에는 복실복실 기른 수염이 삐져나왔고, 속눈썹이 많고 길었다. 팔에도 털이 많아 필히 가슴털도 많겠다는 게 눈에 보였다. 인상 좋은 대위급이었다.


뒤따르는 병사는 그에 반해 나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흡연을 어려서부터 많이 해왔는지, 치아가 거의 없고, 말할 때 마다 잇몸이 보였다. 목소리도 갈라져 쉰소리가 났고, 말하는 게 불편해보였다. 키도 165정도에 매우 말랐다..

 

모두들 오늘 우리를 호위할 두명의 레바논군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이전에 교육 받은대로 자연스럽게 레바논 군 장교가 선두에 우리의 팀 리더인 수송중대장님과 서고, 우리의 뒤에는 레바논 병사 한 명이 M16을 들고 따라왔다.


가장 먼저 시청을 나와 왼쪽으로 도니 흙길이 나왔다. 마른 흙으로 먼지가 올라왔고, 왼쪽 시청 담벼락의 흰색벽이 끝나는 지점에는 민가가 나왔다. 회색 벽돌에 투박하게 시멘트를 발라져있었고, 오른쪽은 밭에서 이름 모를 무언가들이 자라고 있었다. 민가의 대문은 철문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것으로 대부분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그 틈새로 남의 집 마당을 실컷 구경하였다. 마당도 미장된 시멘트가 오래되었는지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고, 큰 고무 다라에는 수돗꼭지에서 줄줄 새는 물을 받고 있었다. 매 명절마다 내려가는 한국 시골의 모습도 똑같았다. 마루 같은 곳에 앉아서 치아가 다 빠진 할머니들이 검은색 히잡을 쓰고 담배를 피고 있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마르하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예상치 못한 아랍어 공격에 할머니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계속 이 길로 갈래? 근데 이젠 밭 밖에 없어서 더 이상 볼 건 없을거야.”

앞서 걷던 반달곰 장교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근데 우리 오늘 나온 목적이 주민들과 만나면서 인사를 나누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주면 좋을.것 같아. 우리는 네 안내대로 따라갈게.”

내가 대답했다.


모두 반달곰 장교의 안내에 따라 다시 뒤로 돌아 시청 5갈래 길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우리가 올라왔던 가팔랐던 언덕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며 양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민가들을 보았다.


그때 반달곰 장교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보니 쓰레기 통이었다. 태극문양과 함께 한국대대라고 영어로 쓰여있었다. 주위의 쓰레기 통 대부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어서 가로등도 가르쳤다. 그래. 이 지역의 다른 시설에 비해서 유달리 가로등이 좋아보이긴 했다. 위를 보니 태양열 집열판이 있었다. 태양열 가로등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높이 쯤에 철제 명패가 나사에 박혀있었다. 태양열 가로등 대한민국 부대 기증.


최근들어 유독 전기난으로 고생하는 레바논의 상황. 몇 년전에 건설하였던 태양열 가로등이 마을을 어둠으로부터 비춰주었던 것이다. 이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호의적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다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여자 아이들도 있고, 그냥 호기심에 우리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펜을 주자 선두에 있던 반달곰 장교가 안된다고 주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이어서 다소 엄하게 목소리를 높여 아이들을 물리쳤다.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에 멀리 가지는 않고 옆으로 비켜 우리를 구경했다.


뒤에 레바논 군 병사가 한 명 있기는 했지만, 몰래 또 펜을 주었다. 급한 마음에 빨리빨리 한 명씩 착착와서 받아가고, 감사합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주고 싶었으나, 이 의사소통이 힘든 어린 무리들은 수줍어하면서 다가왔다. 답답했다. 두 명 주고 한 세 명째 될려던 찰나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STOP.”

결국 반달곰 장교가 봤다. 앞에 서 있다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속눈썹이 길어서 인상이 순하고 좋았는데 그 덩치로 빠르게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보자 긴장되었다.


“I told you. This is last time. Stop.”

다시 한번 눈앞에서 보자 덩치가 진짜 컸다. 몰랐는데 주먹도 컸다. 이미 한번 하지 말라고 했는데 가져온 펜도 있고, 어찌보면 우리가 통제에 따르는 입장인데 이건 나의 잘못이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유감을 표한 뒤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내 덕분에 순식간에 하하호호 하던 분위기가 싸해졌다. 뭔가 화해의 제스처가 필요했다. 내가 선두로 가서 반달곰 장교의 바로 옆에 섰다. 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함으로서 나의 행동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어서는 다시 한번 조용히 사과했다. 괜찮다는 답변이 오자 나는 중위이고 96년생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놀라며 본인도 중위이고 96년 생이라고 했다. 반달곰 장교는 알리 중위였다.


“한국의 집은 어때? 여기랑 비슷해?”

알리 중위가 먼저 물었다.


“그냥 명예로 하는거지 뭐. 내 월급으로는 한국에서 집 사기 힘들어.”

내가 답했다.


“나도 얼른 결혼하고 집 사야하는데 내 월급으로도 레바논에서 집 사기 힘들다.”

알리 중위도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집 마련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문화권은 다르지만, 같이 고민하는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마을이 좁아 금방 돌았고, 비까지 내려 급하게 마무리하고 차로 돌아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운전 부사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순찰 가실 때 차에 동네 애들이 모여서 막 무서울 정도로 창문 두들기면서 초콜릿 달라, 간식 달라고 에워쌌습니다.”


뜨끔했다. 아마도 믿었던 대장 등 3명이 다른 무리들에게 전파하였거나, 다시 요구하기 위해 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한다. 다른 부대원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모두들 웃으며 나에게 빌려갔던 볼펜들을 돌려주었다. 회수율을 보니 그래도 7명 정도에게는 한 자루씩 돌아갔다.


부대로 돌아와서 권총과 탄을 반납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쉬었다. 마침 민사장교가 레바논 현지 음식을 배달시켰다. 민사장교와 항공계획장교 둘 다 항공병과이고 또 셋이서 친해서 비가 오는 저녁 걷기도 많이 걸었겠다 허기는 충만했다. 다진 소고기를 꼬치에 뭉쳐서 숯불에 구운 것을 빵에 싸서 한 입 가득 먹었다.


항공계획장교에게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돌아간 나의 볼펜 dream 프로젝트를 설명했고, 알리 중위의 주먹이 나의 발바닥만하다는 것과 결국 내집 마련 대화를 통해 서로 동갑내기의 친구라는 것까지 알아내 화해를 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한참 웃다가 밤이 깊고 추워져 방으로 돌아왔다.


술도 안마셨는데 하루종일 흐린 날씨가 쌀쌀하여 추위에 오래 떨었는지 비틀비틀 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멀리 연병장에 큰 구호가 장벽에 그려진 것이 보였다.

“Peace to Lebanon! Glory to Korea! Hope to the world!”

“레바논에 평화를, 조국에 영광을, 세계에 희망을”


또 특유의 냉소적인 생각이 들었다. 말이 좀 거창한데. 좀은 아니고 여간 거창하지 않은게 아니다.

저 구호 만들려고 또 공모전 같은 거 열었겠지? 당선된 사람 휴가 1박 2일 아니면 격려금 한 10달러 받고 표창장 하나 받았겠다.


아 생각해보니 내일 출근이다. 그말인즉슨 오늘은 주일. 맞다 아까 추수 감사주일 예배도 드렸구나.

다시 마음가짐을 바꿨다. 오늘 하루도 많은 것을 경험했음에 감사하고 내친 김에 감사기도와 레바논을 위한 중보 기도까지 드렸다.


우리의 주둔으로 인해 어두운 골목길 한 골목이라도 더 밝아졌기를.

한 아이의 등굣길과 한 가장의 퇴근길이 안전해졌기를.

우리의 존재로 인해 마을이 좀 더 깨끗해졌기를.

우리의 활동을 보고 한 명의 여성이 더 큰 꿈을 꾸기를.

레바논에 평화를, 조국에 영광을, 세계에 희망을 주는 시간이 되기를.

그거 비싼 펜이니까 제발 아껴 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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