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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준 Jan 26. 2022

2월 1일~2월 21일

2월 1일~ 2월 21일


2월 1일 (월)

철원에서의 혹한기 훈련이 끝나고 난 뒤 받은 휴일이었다. 강원도 철원의 날씨는 단순히 춥다 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어휘가 그 사람의 세상이라고 하던데, 동감하는 바이다. 하루는 내복에 기모가 들어간 트레이닝 복을 입고 그위에 바람박이 그 위에 두꺼운 오리털 잠바로 중무장하고 출근했다. 얼굴에 부딪히는 공기와 콧구멍에 들어오는 바람 냄새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핸드폰을 보니 영하 13도였다. 깜짝 놀랐다. 하긴 평소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니 그렇게 느낄 법도 하지. 철원은 그렇게 춥다.


밖은 어이없게 춥고, 엄마가 챙겨준 전기 장판으로 이불 안은 따뜻하였다. 훈련도 고생했고, 좀 더 누워서 유튜브나 볼까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월요일에 쉬는 이 귀한 날에 하루를 헛되이 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9시에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대충 어제 부대 매점에서 산 CJ의 냉동 부리또를 전자렌지에 돌려 하나 까먹었다. 대충 아침을 때우고는 최근 같은 아파트에서 살다가 좋은 곳으로 이사 간 친한 선배의 숙소로 놀러갔다.


선배의 숙소는지은 지 얼마 안되서 쾌적하였으며 무엇보다도 1인 1실이었다. 노후화 된 곳에서 2인실을 쓰며  독립된 공간을 맛본 선배는 신나서 쿠팡으로 이것 저것 방을 꾸몄다.


파병 선발이 된 뒤 에세이를 한권 써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할 일을 단순히 기억하려니 머리를 쓰기 귀찮고, 휴대폰은 뭔가 남겨지는 느낌이 없다. 휘발성이다. 그때부터 손바닥 한뼘 만한 노트를 항상 들고 다니며 단순히 할 일을 적었다.

한참을 목록만 적다가 그때의 감정, 배운 점들을 추가했고, 또 시간이 한참이 지나서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육사 1학년부터 중위 2년차까지 약 7년 정도의 습관이 들었다.


어차피 지난 7년간 써왔으니 일기는 파병 가서도 쓸것 같으니 부담이 없고, 파병 생활이라는 것이 마냥 흔한 경험은 아니니 매일 기록을 남긴 것을 정리하여 공유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하니 혼자 방을 쓰라는 선배의 배려로 남의 방에서 내 노트북에 글을 썼다. 미리 어떤 방향으로 쓸지 고민을 하여야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기록하는 방법이나 집중해서 관찰하는 것들이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바논에 대한 소개나 레바논에 대한 역사를 다뤄볼까. 글쎄 일단 그러면 추가적인 공부가 필요하고 일기를 바탕으로 한다는 나의 전제가 깨진다. 해외 파병이란? 너무 군대 이야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만난 세계의 장교들. 레바논 현지 음식은? 시중에 나와 있는 레바논 관련 책자 혹은 논문은? 성경은 약속의 땅. 아니면 파병지 구석에서 묵묵히 임무수행하는 인원들. 레바논에서 한국군이 하고 있는 사업?


파병 복귀 후에는 뉴욕이나 제주도 같은 곳에서 방을 얻으며 글쓰기에 몰두하기 좋은, 그런 곳에서 글을 써보는 스스로를 그리며 혼자 웃었다.

정신 차려보니 강원도 철원이었다.

 

2월 9일(화)


파병에 선발되고 나면, 선발된 인원들은 자신들이 근무하는 곳에서 대략 한 달정도 더 근무한다. 그리고 약 한달 뒤에는 인천의 국제평화지원단이라는 파병만을 전담하여 지원하는 부대에 모두 모인다.


그러면 그 소집까지의 한달은 이제 좀 편하냐. 결코 그렇지 않다.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과의 신변정리는 둘째 치고, 그 한달 동안 개인이 미리미리 준비해야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일단 지금 살고 있는 부대 관사도 빼야하고, 미리 은행 업무도 봐야하고, 뭘 살지도 알아봐야한다. 관용여권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나서 동네 동사무소에 전화도 했다.(알고보니, 개인이 신청할 수 없고, 소집 후 인사과에서 일괄 신청하여 받았다.) 내가 아는 아무개가 파병을 다녀왔다 라고 하는 사람에게  연락처를 물어봐서 준비할 것을 물어보기도 하고, 현지 분위기를 개인이 알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중 하나로 신체검사도 있다. 각자 입소 전에 공가를 써서 군 병원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공문이 왔다. 하긴 파병지에서 갑자기 아프면 안되니까 미리 검사 하는 것이 맞다. 코로나 시국에 눈치가 보여 휴가를 가지도 못하는데 신체검사라는 합법적인 이유로 공가를 간다니 신이 났다.


마침 또 해당 날짜에 가까운 병원의 예약이 모두 찼다. 쾌재를 불렀다. 서울로 드라이브도 갈 계산으로 어쩔 수 없이 서울의 군 병원을 신청하고 해당 날짜에 공가를 승인 받았다.


운전하며 라디오를 트니 미군 라디오 방송이 나왔다. 이제 통역장교로 투입되려면 귀를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들어오는 것도 있고 막히는 것도 있었다. 약간의 위기의식을 느끼며 라디오 진행자의 말에 귀기울이며 운전하다보니 어느새 철원에서 꽉 막힌 북부간선 도로까지 왔다.


간선도로에서 엑셀을 밟지도 못하고 브레이크에 발만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지금쯤 부대에서는 다들 일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에 하늘은 유달리 맑았다. 보이는 하늘을 보니 멀리 보이는 육사의 지인용 탑이 보였다.


육사에서는 1학년 생도들의 외출 및 외박을 1학기동안 제한시킨다. 동기들과의 시간을 더 보내고, 내무생활에 적응하며, 자기계발을 하고 마지막으로 휴가를 나가지 못하는 용사들의 심리를 이해해보라는 갖가지 이유들로 영내 생활이 설명되었다.


나이 스물에 얼마나 밖에 나가보고 싶었나. 친구들이 술먹고 미팅하고 대학교 축제 다니는 것은 제외하더라도 집에 있는 개가 보고 싶었다. 갑갑한 마음 달랠 길 없어서 지인용 탑에 올라가서 울타리 밖 세상을 구경하곤 했다. 학교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1학년이 많이 컸다. 레바논까지 가고. 항상 어떻게 왔는지는 다 기억 못해도, 돌아보면 멀리 왔음을 알 수 있다.


대사관로를 지나, 청와대를 지나 좁은 골목을 헤치며 네비를 따라 가니 서울 병원에 도착했다. 확실히 땅 값이 비싸서 그런지 주차장이 좁았다. 가뜩이나 운전도 잘 못하는데 차 뒤에 다른 차들이 기다리니 한대 한대 부담스러웠다.


나의 주차 실력을 보고 답답했는지 운전자는 차에 있고 뒷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내렸다. 공군 원스타였다. 못 본척하고 가까스로 주차장 라인 안에 차를 우겨넣었다.  


병원 안에는 경쾌하고 가벼운 째즈 음악이 흘러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간 뒤 복도 끝으로 걸어가서 건강검진 대기실에 앉았다. 시력 검사, 청각 검사, 맥박, 채혈 등 여러가지 검사를 진행했다. 그때마다 간호사 한분이 피검자 한명씩 각각 담당하여 각 전문의 방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계급장을 보니 중령이었다. 어쩌면 우리 대대장님보다 선배일 수도 있다. 갑자기 꼬았던 다리가 풀어지고 허리가 펴졌다.


이윽고 2층에서의 모든 검사가 끝나고 밑으로 내려가서 소변 샘플을 제출하기 위해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서 안내 순서를 기다리니 양복을 입은 한 사람이 맞은 편 의자에 앉아서 짜증섞인 목소리로 전화 통화중이었다.


 “내가 국정원 자료 쓰지 말고, 통일부 자료 쓰라고 했잖아.”

전화통화에 방해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소변통에 오줌을 받아와 제출했다.


다시 운전해서 철원으로 복귀했다. 방에 돌아오자 마음이 편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건만, 어느새 철원이 내 집이 되어있었다. 그냥 앞으로는 뭐가 되었든 집 가까운데로 가야겠다.



2월 19일(금)


아침 7시 50분에 여단장님께 전출 신고가 계획되었다는 것을 여단 인사과에게 전파 받고 여단으로 출근했다.

내가 생각해도 전입 신고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출신고라니. 입장을 바꿔 생각해봤다. 임관한지 2년 조금 넘겨서 오자마자 파병으로 갑자기 부대를 떠난다? 괘씸했다. 혼날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난밤부터 긴장됐다.

 

혼내시면 뭐라고 말씀드려야하나. 중언부언 설명하다가는 자칫 변명처럼 들려서 오히려 여단장님의 화를 돋을 수 있다. 그렇다고 조용히 있으면 그건 또 그대로 오해가 되어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아침회의가 계속해서 미뤄졌고, 여단 인사과에 혼자 앉아 머릿속으로 면담 시뮬레이션을 했다. 일단 경례의 구호와 동작을 살짝 과장되게 하여 내가 긴장하였음을 나타내고, 본의 아니지만 부대에 공석을 만들어 부대 운영에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어야겠다고 나름의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여단장님실로 들어오라는 사인이 떨어졌다.

여단 인사과장님이 옆에서 말씀해주셨다.

“영준아, 경례 구호는 없다. 코로나 때문에.”

 이런.


승부 볼것은 이제 표정밖에 없다. 웃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스스로의 잘못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늦었지만, 선발 축하한다.”

 여단장님의 미소에 순간 긴장이 풀렸다. 여러 부대를 경험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며 견문을 넓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짧은 기간 철원에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무엇을 가지고 가는지 잘 고민해보라고 하셨다.


역시 어니 젤린스키의 말대로 우리의 걱정의 40%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22%는 정말 사소한 것이며 4%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전출신고까지 끝냈지만, 여단장님을 향해 더욱 높아진 충성심을 가지고 대대로 복귀하여 마지막으로 대대장님과 부대원들과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2012년식 흰색 YF 쏘나타에 살림살이가 다 들어갔다.


47번 국도를 통해 문혜리, 포천을 통해 집으로 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길이 너무 예쁘고, 모든 것이 아쉽기만 했다. 철원에서의 여정이 마무리했다.

 

 

2월 21일 (일)


드디어 인천의 국제평화지원단으로 소집되는 날이다. 파병 전 소집을 하여 임무수행을 위한 준비를 함께하고 주말에는 각자 외박을 나와서 가족, 친구들과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하여 대부분의 부대가 외박, 휴가를 통제하는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하여보았을때, 오늘 소집이 되면 앞으로 외박도 못나오고 바로 파병을 갈 수 도 있다는 생각에 사뭇 비장해졌다.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지역 교구 목사님께 파송 전 기도를 받았다. 이렇게까지 설레발을 쳤는데 혹시나 외박이 허용되어 나와서 목사님과 다시 마주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무안하겠다.


이어서 최후의 한끼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한식을 먹지 못할까봐 정자동의 가게 앞에서 황태구이와 불고기 정식을 먹었다.(하지만 부대 파병의 경우 김치 포함 해상물자를 통해 한국의 식자재를 컨테이너로 받고, 선발된 취사병들과 급양관이 임무 수행하기에 매 끼니 한식이 제공된다. 오히려 다른 스타일을 도전하기를 추천한다.)


또 다시 나의 YF 소나타에 짐을 두 보따리 정도 챙겨서 인천으로 향했다. 아직 파병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고, 파병지에서 필요한 것들은 국제평화단으로 택배로 시켜서 받을 요령이었다.


 인천에 위치한 국제평화지원단을 가자 특전사들의 기세가 물씬 느껴졌다. 일단 검은색과 노란색의 배색을 통하여 위압감을 조성하였으며, 녹색의 그나마 부드러운 육군복에 비하여 특전복의 쨍한 초록색과 검은색은 위협적이었다.


안되면 되게해라. 위병소 팻말에 잠시 차를 대자 특전병이 나왔다.


 “단결! 파병 전 소집으로 오셨습니까.”


기분 탓이겠지만, 목소리도 컸다. 기가 살짝 죽은 채로 국평단에 도착해서는 미리 공지된 방 배치도 대로 짐을 옮겼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이어서 한 방당 5명 정도씩 들어왔고 어색한 분위기만 계속 되었다.

하긴 새로운 부대로 가면 첫날은 다들 긴장하니까 당연한 거다. 굳이 내가 나서서 인사를 하고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필요가 없다.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주겠지. 나의 좋은 의도가 특히나 초기에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르기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짐을 풀자 공지 방송이 나왔다. 첫날 집합하여 다들 인사를 나눌터이니 1층 대강당으로 집합하라는 내용이었다. 모두 강당에 모여 첫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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