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화)
국방일보에 실을 기고문을 작성했다.
일단 시작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손에 잡히는 책 아무거나 잡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로 배우는 영어공부!” 라는 제목이었다. 가장 첫 장을 펼치니 ‘오바마 대통령을 스타로 등극하게 한 2004년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 연설문’ 이라는 소주제가 나왔다.
그래 이거다. 내가 이 기고문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 스타가 되는 것.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문을 읽어 넘겨갔다. 오바마 대통령은 본인의 가정사로 연설을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친 할아버지는 영국인 가정에서 하인으로 일했으며 아버지는 케냐에서 염소를 키우며 자랐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당시에는 정치 신인이었으니 청중들에게 자신을 알릴 시간과 내용이 필요했겠지.
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 그리고 자신의 유년시절까지 내려오며 개인적인 가정사를 증폭시키고 또 확장시켰다. 작은 이야기들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큰 주제로, 말하고 싶은 바로 매끄럽게 끌어냈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할아버지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소개를 끌어내고, 참전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한 미국의 반전 정신. 산업화 시대에 역꾼으로 활약한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해서 청중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개인의 가정사를, 개인의 시점에서 소개하고 청중으로 하여금 우리가 교과서로 배우는 역사가 실은 자신의, 우리의 삶이었음을 말했다.
아주 그냥 마음에 쏙 들었다. 신이 나서 그 레파토리를 한번 활용해 보았다. 일단 우리집 가정사를 드러내야 했다. 또 특유의 삐딱함이 쓸데없이 발현되었고, 선발되어서 영광이며 최선을 다해 임무수행하겠다는 특징 없는 모범 답안 같은 기고문을 실고 싶지는 않았다.
또 우리 집 가정사를 보니, 우리집도 만만치 않았다. 하나의 근현대사였다. 할아버지는 외화를 벌기 위해 어린 외동딸 하나, 그러니까 우리 엄마를 한국에 남기고 요르단으로 갔다. 말도 안 통하고, 에어컨이 있을리 만무한 당시의 그 중동의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며 고향에 생활비를 부쳤다. 홀로 남은 딸은 가장의 부재와 가난을 숨기려 애를 부단히 썼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딸은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이화여대에 합격한 뒤 졸업 후 리츠 칼튼 호텔에서 외국 사업가들의 통역을 담당했다. 언젠가 통역의 재능을 살려 국제기구에서 봉사하는 꿈을 꾸며 말이다. 그리고 나를 임신한 뒤 퇴사하고 꿈은 자연스레 포기 되어졌다.
장성한 두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은 항상 나에게 빚이었다. 엄마의 희생을 의미 없게 만들 순 없었다. 그럼 내가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어떤 삶이 의미 있을까. 그렇게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육사에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었던 말은 ‘너희가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것이었다.
전투복 오른쪽 어깨에 태극기를 붙이는 것을 허락받았으니 너희야말로 진정한 국가대표라는 의미였다.
누가 허락해주었나 라는 질문은 둘째 치고,(일단 우리 외할아버지는 찬성하셨다.) 어깨에 태극기 붙인다고 다 국가대표면, 국가 대표가 너무 많지 않나. 국민 5천만 중에 예비역은 빼고 태극기 붙인 현역 군인만 60만명이다. 양 항에 만 명은 소거하고, 5천을 60으로 나누면 된다. 그러면 인당 한 83명 정도를 대표한다.
단순히 절대적인 수치로 대표성을 운운할 수 없다라고 하면 할 만 없지만, 그래도 그럼 진짜 국가대표 선수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결국 발화자의 의도를 이해하면서도 그 워딩만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삐뚤어진 태도는 고치지 못하고 육사를 졸업했다.
그렇게 임관하여 지내다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 뉴스를 봤다. 도움이 필요해보였고, 레바논으로 파병 간 우리 한국군이 현지인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YTN으로 봤다. 그 순간 나 때문에 포기된 엄마의 꿈이 생각났다. 해외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꿈.
그렇게 나는 레바논 평화유지단의 통역장교가 되었다. 소집되어 입소식을 할때 다시 한번 국가대표 발언이 나왔다.
“귀관들은 국가대표의 자격으로 레바논에 파병된다. 자부심을 가지라.”
오호라. 똑같은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너 파병가는 그곳 근처에 도로 내가 깔았으니 기회 되면 구경 가보라던 할아버지, 못다 한 꿈을 이뤄줘 고맙다는 엄마, 그 과정 속 도움 받는 나라에서 도움 주는 나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들을 대표해 간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잠깐 5천만 나누기 파병 장병 대략 200명. 계산 생략. 그래 이정도 비율이면 나쁘지도 않지.
다 적어내려가자 뭔가 내 민낯을 보여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민낯보다는 굳이 자신의 가정사까지 드러내면 파병의 결의를 다지는 잔뜩 상기된 초급장교로 비쳐질까 살짝 고민스러웠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 얼마나 더 솔직해질지에 대해 고민스러웠고, 얼마나 나의 모습을, 사생활을 공개할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를 느꼈다. 과연 나는 국방일보 기고문으로 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스타가 안되면 뭐 또 어떤가.
3월 18일(목)
파병 전 아스트라 제네카 백신을 맞았다. 아직 군에서 백신을 맞은 사례가 거의 없지만, 파병부대의 특성을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백신을 맞기로 했다. 하긴, 우리는 곧 레바논에 가야하니까. 맞고 가는 편이 낫지. 레바논의 확진자 수가 한국을 훨씬 웃돌고 있는 상황이고, 만에 하나 우리 중 한명이라도 코로나에 감염이 된다고 하면, 폐쇄된 생활을 하는 파병 부대의 특성상 집단감염의 위험도 높다.
일단 주사를 맞는다고 하니까 새벽 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아침 7시에 출발했다. 백신은 분당 국군수도병원에서 맞았다. 늘 외박 때마다 운전해서 가는 길이었지만, 이 시간대는 처음이었다. 차가 너무 많이 막혔다. 브레이크만 밟았다 떼었다가를 반복하고 가까스로 수도병원에 도착해서 주차했다.
수도병원에 도착하자, 미리 출발한 의무대가 백신 접종 준비를 마쳐두었다. 예진부터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서 바로바로 주사를 맞고 대기실로 이동해서 15분간 이상 증상을 관찰했다. 모두 이상 증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인천에 복귀했다.
부대로 도착하자 안도감 때문인지 장거리 운전 탓인지 백신이 이유인지를 모르겠지만 조금 피곤했다. 점심을 안 먹고 한숨 잤다. 눈을 뜨자 저녁 6시였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깼다. 확실히 열이 있었다. 얼굴은 빨개지도록 열이 오르고 눈은 너무 뜨거웠다. 혹시나 눈알이 익을수도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구운 생선들 보면, 눈이 익어있는 것처럼. 또 생각해보니 고열로 인한 시력상실도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눈이 실명할까봐 억지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가서 냉수로 눈을 씻었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자 이번에는 몸에 오한이 싹 돌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긴팔 긴바지를 입고 두꺼운 군용 침낭 안에 들어갔다. 침낭 안에 들어가니 이번에는 또 관절이 시려웠다. 무릎이 시렵고 발목이 시큰시큰했다. 신기했다. 아 이런 느낌을 시렵다고 표현하는구나. 하긴 경험 없는 26살 청년이 무릎이 시렵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게 쉽지는 않다.
체온을 재보니 38도였다. 등 뒤와 다리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추웠다.
관물함에서 병원에서 나눠준 주의사항을 읽어봤다. 1.미열 2.오한 3.두통 4. 관절이 아픔. 5.온몸의 근육에 힘이 빠짐. 6. 두통과 고열.
순서대로 다 나왔네. 헛웃음이 나왔다.
하필 200여명의 파병 장병 중에 거의 나만 아팠다. 뉴스에서 젊고 면역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백신 접종 후 증상이 빠르고 강하게 나타난다고 하던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막내 중위가 백신 맞고 정신을 못하린다는 소문은 금세 단 전체에 다 퍼졌다. 아마 호기심도 크게 한몫 했으리라. 만나는 사람마다 괜찮냐고, 증상이 어떠하냐고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고, 뉴스에서 알려준 정보가 맞다고 좋아했다.
다시 밤이 되자 땀에 흠뻑 젖은 팬티와 티셔츠. 바지와 후리스를 갈아입고 타이레놀을 2알 더 먹었다. 오늘만 6알을 먹었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만, 머리가 아파서 새벽 1시에 다시 깼다. 밤새 뒤척였다.
3월 19일(금)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밤새 땀에 젖은 속옷을 갈아 입었다. 여전히 약한 두통은 있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점호 때 보니 밤 사이 백신 접종 후 증상이 나와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초췌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밤을 샌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니었다. 다들 아파하는 모습들을 보니까 안타깝기는 했지만 나에게 집중되던 관심이 좀 분산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피곤하면 좀 더 쉬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직 몸도 완벽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오전에 예정되어 있는 상황조치 훈련에 참석했다.
오늘의 훈련은 RPG로 예상되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의심스러운 사람이 우리 주둔지 근처 농장에 있는 것으로 상황을 가정했다. 대회의실에 둘러 앉아서 각 부서별로 상황이 흘러감에 따라 국면에 대한 조치 사항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인사과와 의무대는 유사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현지 병원과의 연락 등을 준비하여 보고하였고 정보과는 가지고 있는 자산을 통하여 거수자의 의도와 배경, 소지한 무기와 그 무기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분석했다. 민군작전과는 평상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마을 시장단이나 지역 당국과의 연락을 통해 상황을 전파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통역장교인 나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상급부대인 레바논 중재 유엔군 본부(UNIFIL) 보고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영어를 잘하는 것을 넘어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영어 군사 용어와 약어를 바로바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들이었다.
각 부서별로 조치하는 내용들을 이어서 보고했고, 우리가 구성한 시나리오에 따라 상황은 점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플롯을 충실히 따라 가고 있었다.
절정의 상황으로 가자 이젠 주둔지에 있는 우리의 인원이 밖에 있는 적에게 총까지 맞는 시나리오가 나왔다. 우리 부대의 의료 기술로 치료가 가능한가? 제한되는 경우에는 인접 병원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인접 병원으로 가야하는 상황일지라도 바로 앰뷸런스를 타고 나갈 수 없다. 아직 밖의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에 있는 적의 추가적인 공격이 있을 수 있다. 공격의 고의성은 어떻게 판단하나?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고 단순 사고라고 볼 수 있는 단서가 있을까? 부상자의 총상 부위를 봐야한다. 총상 부위를 보고 사용된 탄이 산탄총인지 자동 소총인지 확인해야 한다. 산탄총일 경우 사냥꾼들이 많이 쓰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무장 사냥꾼의 적대적인 의도가 없는 오발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탄흔만 보고 공격의 의도성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 신빙성이 낮다. 최근에 인근 지역에서 무력 시위가 있었는지, 인근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어떠한지 등을 당국의 정보기관들과의 협조를 통해서 끊임없이 파악해야 한다.
이어서는 언론 조치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실상황 진행시에 우리의 언론 조치는 어떠해야 하나. 상황이 실시간 진행되고 있을 때 유가족 또는 지인에게 알려야하나? 우리 부대에서 직접 해야하나 아니면 국방부를 통해서 해야하나?
열띈 토의가 오가고 있을 때 뒤에서 지쳐가는 막내 중위는 혼자 또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 테러 교육 때 보았던 중동의 극단적 정치 세력의 처형 영상이 떠올랐다. 최근 중동의 극단적 정치세력의 모습을 보면, 처형하는 영상을 촬영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나의 모습이 올려진다면? 늙은 코끼리도 무리를 이탈해서 혼자 죽는다고 하던데. 생각도 못해봤는데 조용히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권리도 정말 크구나. 차라리 어디 조용히 끌려가서 죽으면 부끄럽지라도 않지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동영상 찍혀서 유튜브에 올라가면 정말 죽어도 죽지도 못하겠다. 한국의 매체들에서 모자이크 처리된 상태로 계속 뉴스에 나오고 조회수는 폭발적으로 나오겠지. 자극적인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글에서 원본을 찾아낼 것이고.
내 처형 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까. 부모님은? 친구들은?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표정이 될까.영상에 어떻게 기록될까.
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때,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서서히 시나리오는 안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상황 종료. 마무리였다.
우리는 지난 15년간 레바논에 24개의 부대를 보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 각자 대응할 수 있는 정리된 메뉴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메뉴얼을 보는 것보다는 치열하게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충분한 고민 후 답안을 모두에게 공유하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 미리 준비하고 예행 연습이 필요하다. 최초로 상황을 맞이하는 것과 익숙한 뒤에 상황을 조치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이, 연습이 실전에서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일단 점심을 먹어야한다.
밥을 먹고 점심 시간 후에는 육군 본부, 공군본부, 군수 사령부, 합동 참모부,국방부의 실무자 등이 모여 화상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레바논으로의 이동 계획에 대한 협조 토의였다. 물론 옆에서 구경만 하였지만, 아직 군생활 3년차인 중위가 참석하기에는 큰 회의였다. 큰 조직간의 협업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부대 이동에는 많은 부서의 협업이 필요하였고, 또 생각보다 고려할 부분이 많았다.
가장 크게 고려해야할 부분은 유엔군에서 요구하는 교대 간 최소 병력 유지의 문제, 항공기로 운반할 수 있는 짐의 문제 등이 있었다. 인천에서 레바논의 베이루트까지의 거리가 상당하기 때문에 항공기가 직항으로 갈 수 없고, 급유를 하기 위해 경유지를 들러야 했다. 또한 편서풍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가 바람을 역행하는 조건에 놓여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지구과학 시간에 다들 배웠으리라! 어쨌든 교과서로만 배운 편서풍의 영향으로 인해 항공기는 연료를 더 많이 소비할 것이고 그러다면 최초 우리가 계획한 것보다 비행기로 나를 수 있는 짐을 줄여야 한다. 짐을 항공기가 아닌 해상으로 오는 배 편에 더 실어야 한다. 그리고 배 편으로 물자를 나른다면 지금 출발해도 2달 뒤에나 레바논에서 받을 수 있다. 정말 급하게 필요한데, 공간이 부족하면 항공택배를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하지만 이 방안의 경우에는 국민의 세금이 너무나도 많이 들어간다. 여러 기관의 실무자가 각자의 의견을 내놓으며 고심했다.
잠깐 탄약을 운반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배에는 탄약을 실을 수 없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송 시에도 군용기로만 운반이 가능해서 항공택배도 방안이 될 수 없다. 잠깐그러면 비행기로 나를 짐을 또 줄여야 한다. 도대체 짐을 얼마나 줄여야 하나!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어쩌면 백신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고 파병 한번 가기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