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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Jan 27. 2024

올리브나무를 두려다 그만...

주말 맞이 집청소 기록

올리브 나무를 둘 데가 없었다. 창가에 올려놓기엔 너무 추운 것 같아, 화장실 문 옆에 두었는데 자꾸만 이파리가 떨어져 나왔다. 내가 지나다니면서 한 번, 빨래를 널어놓을 때마다 또 한 번씩 툭툭 치게 됐다. 그 때문에 결국 올리브 나무가 충격을 받긴 받았나 보다.


아쉬운 대로 낮은 책상 위에 두었다. 그런데 내가 팔을 하나 뻗자마자 우수수하고 흙위 모래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래선 안될 것 같아 흙을 치우고 올리브를 제대로 된 곳에 두기 위해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방을 치운다 한들 한가운데에 올리브를 두면 계속해서 이파리는 떨어질 게 뻔했다. 결국 어떻게 몰아서 코너에 올리브를 두어야 했다. 갑자기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를 이쪽으로, 옷을 저쪽으로 옮기면 어떨까. 옮기고나니 쌓아두고 읽지 못한 책들이 잔뜩 눈에 들어왔다. 다 읽지 못하고 앞부분만 건드린 책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다신 안 읽을 것 같은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이 눈에 확연히 구분되었다. 가져왔지만 읽지 않았던 이야기들, 저것들을 읽어야 버릴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숙제 같은 것들이었다. 누가 나를 본다면 ‘쌓아두기 천재’라고 말을 할 정도의 책들이었다. 내 폴더나 내 todolist 나 책이나 다 비슷했다. 많고 다양하지만 너무나 꽉 차있는 상태, 그래서 여유가 없는 그런 상태 말이다. 정리라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앞으로 볼 책을 앞으로 가져왔다. 대부분이 통계와 분석에 대한 책이었다. 면접 준비한다고 잠깐 읽었던 A/B 테스트책도 있었다. 자격증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책은 잠깐 뒤로 미뤄두었다. 실무와 관련된 책을 앞으로 꺼냈다.


무언가 빈 느낌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직업의 일이 참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건 맞지만, 만약 이 일로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한다면 나는 이 것을 계속할 수 있을까? 다른 ‘돈이 되는 일’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까? 그럼 그때의 나의 정체성은 스스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헷갈리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그래서 책 속에서 통계와 관련이 없는 책도 몇 권 찾아내 꺼냈다. 글쓰기에 대한 책을 하나 꺼냈다. 미셸푸코가 글쓰기에 대해 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독립서점에 들렀다 얻게 된 무가지도 하나 꺼냈다. 크리에이티브와 AI가 융합한 그 결과물들이 담긴 책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특별한 모델을 만들겠다고’ 접근하던 내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두 개를 올려놓았더니 아까의 ‘빈 느낌’이 조금은 채워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는 친구가 준 레고 인형 2가지를 올렸다. 친구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개 중에 두 개를 골랐는데, 꽤나 내 아이덴티티와 맞아있었다. LP판을 돌리는 레고와, 아쿠아우먼. 음악을 잘하지도, 수영을 잘하지도 않지만 그게 왠지 나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게 느껴졌다. 그 위론 무지개색 조명을 떨어뜨려두었다. 빈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마음에 들었다.


남은 것들을 정리할 땐 조금 지쳐서 그런가, 더 쉽게 버릴 수 있었다. 수첩을 하나 버렸고, 행사 때 사용했던 이름표도 버렸고, 모아둔 참석 증명 티켓들도 버렸다. 그래도 내 꿈을 담아뒀던 종이들은 아직 버리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그걸 다시 벽에 붙여놓았다. 이루지 못한 꿈들은 계속해서 내 몸 한편에 남아있으니 꼭 ‘이루려고 해야’ 한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을 다 치우고 나니, 집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도 같이 사라졌다. 그대로 다시 눌러앉아 내가 한 정리들을 뿌듯하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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