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16. 화자의 시점을 일인칭과 삼인칭으로 설정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16. 화자의 시점을 일인칭과 삼인칭으로 설정할 경우, 장단점은 각각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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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의 이야기로 읽히는 글을 어떻게 쓸까요? 방법은 주어를 반복적으로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글쓰기의 최전선> 서문에 <나는 왜 쓰는가> 라는 글을 썼어요. 조지 오웰의 산문 제목에서 제목을 차용했고, 왜 글을 쓰게 됐는지를 짚은 산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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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나의 독립은 3년 전 즈음부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 중에서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 그것 하나 뿐이었다. 장소의 변화로 인해 달라진 스스로를 경험한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전망 좋은 뷰를 가진 공간에 가면 쉬이 차분해졌던 것을 떠올렸었다. 그것 뿐이었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타인을 미워하지 않고 싶었다. 어떤 것에 걸려 넘어지고 싶지 않았다.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정 그릇'이라는 건 너무 작기 때문에 많은 음식(감정)을 담을 수 없다. 다양한 음식(감정)을 맛보고 싶을 때 몇 번이고 일어나 새 그릇에 음식을 떠와야 했다. '새 그릇' 을 가지러 가는 것, 그건 타인과 떨어져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들아가는 것과 닮아 있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은 그 그릇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에서 온다. 꾸준히 설거지를 하는 것, 개수대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 개수대 주변에 널부러진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쓰레기 봉투에 넣어두는 것,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다 차면 버리는 것. 이것들이 반복되어야 설거지된 그릇이 끊임없이 나올 수 있다. 물리적인 식기세척기는 있지만, 마음속 식기세척기를 갖추는 건 정말 어렵다. 만약 그 '식기세척기' 같은 마음 상태가 있다면? 아마 혼자 살 수 있는 힘은 더 커질 것이다. 자동적으로 그릇이 깨끗해질 수 있는 것 만큼 편리한게 어디있을까.
게다가 그 그릇들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는 개인의 능력도 '혼자 있는 힘' 을 더욱 굳건하게 해줄 것이다. 유리 그릇은 같은 모양대로 포개지만 그 중 큰 그릇을 아래, 작은 그릇을 위에 올려둔다. 플라스틱 저장 용기들은 뚜껑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리해 보관할 수 있다. 뚜껑 찾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 하나의 세트로 맞추어 정리할 수도 있다. 개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뚜껑과 플라스틱 용기를 포개어 두는 편이다. 작은 공간에 넣기 좋다. 주변 누군가는 짝 맞춰 둔다고 했다. 막 설거지된 그릇들을 올려놓는 방식도 다르다. 왼쪽으로 길게 기울어지게 얇은 뚜껑과 반찬그릇들을 두고, 같은 사이즈의 밥과 국 그릇들을 쌓아두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틈을 일부러 만들기 위해 컵 묘기 하듯 얼기설기 쌓아두는 사람도 있다.
정리하던 중, 이전에 설거지가 잘 안되어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것, 마치 묵은 감정처럼 그 찌꺼기 조금이 남아있는 걸 본 사람 중 누군가는 '비위가 상할 수' 있다. 케케묵은 스스로의 감정의 덩어리를 오랜만에 다시 발견할 때, 그게 깨끗하게 닦아 없어진 줄 알았을 때 아닐 때, 그런 상태로 오랜시간 보관되어있던 마음을 다시 발견할 때 스스로를 향해 비위가 상할 지 모른다. 가까운 사람을 향한 질투라던가, 자격지심, 분노같은 감정들 말이다. 분명히 해소한 줄 알았는데 남아있다면 '나의 설거지 실력' 도 의심하게 될 지 모른다. 설거지 실력이 무너지면, 혼자 살 수 있는 힘을 점점 잃어간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아있을 시간도, 필요도 없다. 설거지가 되지 않은 그릇들은 정말 다시 닦아내면 될 일이다. 내가 가진 설거지 습관이 문제일 것이다. 무거운 프라이팬을 장시간 들고 있으면 팔이 아파져, 디테일한 곳을 닦지 못한채로 설거지를 끝내버린다던가 하는 것들. 그럼 다른 방식을 찾으면 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설거지를 하면된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팔이 아프기도, 물이 마구 튀는 불상사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도 뭐, 설거지를 끝내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혼자서 살아가는 힘을 만들면 되니까 문제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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