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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림 May 25. 2023

[오늘의 생각] 피가 없어서 더 못 드려요.

헌혈의 집 문의는 1600-3705.

 수혈이 필요한 환자가 응급실에 오면 허구한 날 혈액은행과 싸웁니다. 혈액은행은 병원에서 혈액 제제를 관리하는 일을 하는 부서입니다. 피를 토하거나 항문으로 쏟아내는 환자, 큰 사고로 피를 흘리는 환자, 산후 출혈 환자 등 응급하게 수혈이 필요한 환자는 하루에도 수 명씩 응급실로 실려옵니다. 수혈은 피가 모자라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살려내는 가장 중요한 치료입니다. 저는 수혈을 위해 '응급 수혈 요청서'라는 서류를 작성하여 혈액은행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피가 충분한 날이 없습니다. 혈액은행에서는 늘 혈액이 부족하다며, 혈액 제제를 몇 개 이상은 제공해 줄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냅니다. 바로 다음날 수술장이나 외래에서 사용할 혈액이 예약되어 있으니, 그 분량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저는, 지금 이 환자는 당장 죽게 생겼으니 일단 살려놓고 보는 것이 맞지 않느냐며 다시 한번 혈액을 요청하고, 혈액은행은 다시 한번, 내일 수술장에서 피가 부족해서 환자가 잘못되면 내가 책임질 거냐면서 추가 혈액의 제공을 거부합니다.


 혈액 부족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다행히 수혈이 부족했거나 늦어진 탓에 제 앞에서 환자가 죽은 일은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해 수혈을 해도 소용이 없는 상황처럼 어차피 어쩔 수 없었던 경우를 빼면 말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고비는 수 번이나 넘겼습니다. 야밤에 단잠을 자던 내시경 전문의와 혈관조영술 전문의를 병원으로 불러내 피가 나는 혈관을 막게 하고, 온갖 약물과 수액을 동원해 '생쇼'를 해서 겨우 고비를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 어찌어찌 목숨은 지켰더라도, 피가 충분치 않아 때문에 이미 손상을 입은 장기들까지 되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입원 기간이 길어지고, 퇴원 시점의 건강 상태도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수혈이 빨리 이루어졌더라면 분명 예후가 더 좋았을 것입니다.



 

 혈액 부족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혈액 재고를 늘리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헌혈 참여를 늘려서 혈액 제제 공급을 원활하게 하면 됩니다.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습니다.


 헌혈은 좋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몇 시간 정도 어지러울 수 있다는 것 외에는 큰 부작용도 없으며,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헌혈의 집에서 간식과 선물도 줍니다. 매년 몇 번 정도는 뽑아간 피로 무료 혈액 검사도 해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가 모자라 생사의 고비에 있는 한 사람을 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저 역시 체력이 닿는 한 꼬박꼬박 헌혈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번 전혈로만 헌혈을 하는데, 오늘로 30번을 채워 유공자 패도 받았습니다. 다만 아직 성분헌혈이라는 미지의 세계는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성분헌혈은 혈액을 채집했다가 필요한 성분 이외의 것은 다시 혈관으로 돌려 넣어주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팔을 가만히 오래 펴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선뜻 못하겠습니다.




 사람들의 헌혈 참여를 독려할 좋은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다가 해 본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수혈을 받는 환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헌혈해 준 사람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마법의 사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세 형제가 세 가지 보물을 사용해서 공주의 목숨을 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마법의 망원경으로 공주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아챘고, 둘째는 마법의 양탄자를 이용해 형제들과 함께 궁전으로 이동했으며, 셋째는 어떤 병이든 낫게 하는 자신의 마법의 사과를 공주에게 주었는데, 나머지 두 형제는 그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자신의 보물을 계속 갖고 지낼 수 있었지만, 셋째는 자신의 보물을 완전히 내어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은 셋째를 공주의 사윗감으로 정했습니다.


 제가 응급실에서 만난 환자와 보호자들은, 환자를 운송하고 응급 처치를 하는 구급대원, 직접 치료 행위를 하는 주치의나 담당 간호사들의 노고에는 쉬이 감사해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실 의사나 간호사, 구급대원들은 모두 돈을 받고 일합니다. 의료 행위가 다른 직업에 비해 좀 더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 모두 일단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환자의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수액, 수액을 넣는 주머니나 주삿바늘을 만드는 회사가 돈을 벌기 위해 그걸 만들어 파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환자들이 수액을 맞으면서 수액주머니와 주삿바늘을 만드는 회사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듯, 의료인들에게도 꼭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혈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환자들에게 제공되는 혈액 제재는, 누군가의 헌혈을 통해서만 만들어집니다. 이때 헌혈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거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함에도 그 일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만으로 선뜻 자신의 팔뚝을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증한 혈액 제제에는 혈액형만 기입될 뿐 기증자의 이름을 비롯한 어떠한 신상 정보도 적히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피를 공급받은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종류의 보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마법의 사과 이야기에 나오는 셋째와 같습니다. 환자의 치료에 관여한 수많은 사람들 중 정말 감사를 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들이겠습니다.


 저는 소리 없이 봉사하고 있는 이들 헌혈자들이 지금보다 더 긍지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적인 보상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보상이나마 주었으면 합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은, 수혈을 받는 환자들이 추후 읽어볼 수 있도록 그들에게 팜플렛 같은 것을 배부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헌혈자에 대한 감사함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의 칼럼들이 수록됩니다. 물론 대부분은 팜플렛을 읽어 보지도 않을 것이고, 읽더라도 실제로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1%라도 더 감사하다 느끼는 이가 생기고, 헌혈을 고민하던 사람들이 그걸 알게 된다면, 그는 긍지를 느끼며 더욱 적극적으로 헌혈에 동참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혈을 받아 살아난 환자 본인과 그 가족들 역시,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언젠가 직접 헌혈에 참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봅니다.




 그냥 해 본 생각입니다. 이 글이 대한적십자사나 큰 대학병원을 관리하는 분들에게 닿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지구 어딘가에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실정에는 맞지 않아서 도입하지 않았을 뿐인가도 싶습니다. 그냥 사람들의 선한 본성을 믿고 싶어 하는 한 어리숙한 청년의 천진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재미도 감동도 없는 제 글을 여기까지 읽을 만큼 참을성이 강한 당신에게만큼은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혹 당신이 최근 헌혈을 하신 적이 없고 신체가 건강한 분이라면, 돌아오는 주말에는 사시는 곳 근처에 헌혈의 집이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2023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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