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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림 May 25. 2023

[나의 응급실 이야기] 최악의 의사를 꿈꾸며.

죽을 병이면 어쩌시려고?

 며칠 전, 제가 일하는 보건지소에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방문했습니다. 조금 전부터 명치 부위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을 호소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진료를 대기하며 보건지소 의자에 앉아 쉬는 동안 증상이 다소 완화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 의료인이 계시다면 벌써 정신이 아찔해지셨을 것입니다. 바로 병 중의 병, 응급 중의 응급, 심근경색을 시사하는 증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보건지소에는 심전도나 초음파 등 심근경색의 초기 평가를 위한 전문 검사 장비를 구비해 놓을 수 없습니다. 일차의료기관 중에서도 가장 하급의 기관인 보건지소마다 그런 고가의 장비를 마련했다간 세금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환자는 즉시 거의 모든 검사가 가능한 응급의료센터로 가셔서 심장을 비롯한 주요 장기에 문제가 없는지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저는 그 환자에게도 제가 즉시 119를 호출할 테니 서둘러 응급실이 있는 병원으로 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환자는 단순 소화불량인 듯 하니 소화제만 처방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죽을 병일지도 모른다.”, “내가 큰 병원 응급실에서 오래 일해 봐서 아니까 일단 가 보시라.”는 등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그분을 억지로 구급차에 실려 보냈습니다.


 응급실 진료를 잘 받으셨나 하여 나중에 전화를 드려 보니, 다행히 별일 없으신 모양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분이 진료를 받은 응급실의 의무기록을 열람할 권한은 없으니, 정확히 어떤 검사를 받으셨고 검사 결과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나 폐 등의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들으셨다 합니다. 아마 환자가 짐작한 대로 단순 소화불량 내지는 위산 역류 증상 정도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황당하셨을까요? 소화제를 받으려고 방문한 보건지소에서 새파랗게 어린 의사에게 등을 떠밀려 응급실까지 가야 했고, 결국은 자기 생각대로 소화불량이 맞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말입니다. 보건지소에 새로 온 의사는 호들갑이 심하다며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잖아도 바쁜 응급실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있던 의료진과 구급대원들도 저를 욕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뭘 그렇게 잘 알길래 별 문제도 아닌 환자로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결과를 알고 보니 오버액션, 과잉진료였습니다. 제 판단이 틀렸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전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려 합니다. 제가 응급의학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처음 근무를 시작한 응급실은 인턴을 제외하면 상시 적게는 세 명에서, 많게는 여섯 명의 응급의학과 의사가 함께 일하는 시립병원이었습니다. 환자의 진료를 주로 담당하는 전공의는 그중 두 명에서 세 명 정도인데, 경력에 따라 고년차 전공의는 중하고 까다로운 환자를, 저년차 전공의는 경하고 쉬운 환자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경증 환자 진료라고 해서 결코 편한 일은 아닙니다. 편한 일이 아닌 한 가지 이유는, 경증으로 분류되는 환자가 중증 환자보다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 많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경증으로 분류되는 환자 중에는 간혹, 경증이 아닌 환자도 섞여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제가 응급의학과 전공의로 일하기 시작한 지 이틀인가 사흘인가 되었던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바빴습니다. 그 시립병원 응급실은 5~10분에 한 명 꼴로 새로운 환자가 접수하는 곳입니다. 이제 갓 인턴을 마친 저는 당연히 경증 환자를 진료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새로운 환자의 대부분은 제가 진료해야 하는 경증 환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왕초보 의사인 저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신체검진과 병력청취는커녕 환자의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하고 선배들이 일러 주는 대로 처방을 내거나 기록지를 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접수했습니다. 몇 시간 전부터 갑자기 어지럼증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지럼증이 꽤 심한 탓에 멀미가 나서 구토를 몇 번 했다고 했고, 그 때문인지 식은땀도 조금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증상은 없었습니다. 경증 환자로 분류된 만큼, 혈압이나 호흡 등 활력징후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중추 신경계의 이상인가 하여 신경학적 검사를 했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습니다. 이석증, 메니에르병과 같은 말초성 어지럼증인가 하여 추가로 몇 가지 신체검사를 했지만 여전히 별다른 소견은 찾지 못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해 혈액 검사와 두부 CT 검사, 기립 혈압 측정 검사 처방을 냈습니다. 혈액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두부 CT 결과가 나왔는데, CT에서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몇 분 뒤 담당 간호사님이 환자를 침상으로 안내했고, 기립 혈압 측정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검사는 누워 있는 상태에서 잰 혈압과, 일어선 직후의 혈압, 그로부터 몇 분 후의 혈압을 비교하여 혹 일어서면서 지나치게 혈압이 많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검사입니다. 저는 진료 책상에 앉아 다른 일을 하면서, 환자가 검사를 받는 모습을 모니터 너머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돌아가는 꼴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환자는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 눕는 것까지는 잘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혈압을 재기 위해 일어서면서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난데없이 소변이 마렵다면서 바지를 벗더니, 침대 옆에서 그대로 소변을 보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간호사님과 제가 나서서 환자를 만류하려는데, 바로 그 순간 환자가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습니다.


 머릿속에 새하얗게 변했습니다. 학생 시절 수도 없이 배웠던 의식 불명 환자의 응급 처치 순서 같은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간호사님은 저의 판단을 기다리기보다는 서둘러 고년차 전공의를 호출하러 갔습니다.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온 고년차 전공의 선배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프로토콜대로 환자를 평가했습니다. 선배는 환자의 의식이 없으며, 호흡과 맥박도 사라진 상황임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들것이 도착했고 저와 다른 의료진들은 환자를 들것에 실어 소생실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10여 분 간의 소생술 후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선배 전공의는 지금부터 그 환자는 자신이 볼 것이라며, 저는 다른 경증 환자들을 진료하러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제 자리로 돌아왔지만, 손발이 떨리고 정신이 몽롱하여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진료용 컴퓨터가 놓인 자리는 소생실과 가까운 곳에 있어, 그 안에서 나는 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가슴을 압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분명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줄로 알았는데, 몇 분만에 다시 멈추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 뒤 선배 전공의와 교수님의 주도로 약 30여 분 간 추가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그의 심장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제가 진료한 환자 중 세상을 떠난 첫 번째 환자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대기실과 침대를 가득 채우고 있던 환자들이 입원하거나 퇴원하여 떠나고 어느 정도 응급실이 한산해졌을 즈음, 낮에 저를 도왔던 선배 전공의가 제게 할 말이 있다며 저를 불러냈습니다. 선배는 제게 심전도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V1, V2 Lead에서 뚜렷한 ST 분절의 상승을 보이는, 전형적인 Anterior MI 곧, 심근경색의 심전도 소견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죽은 환자의 심박동이 잠깐 돌아왔을 때 찍은 심전도라고, 네가 봤던 환자가 심근경색 환자였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선배는 이미 내가 남겨 놓은 기록을 검토한 뒤였습니다. 그는 그 기록만 봐서는 자기라도 심근경색을 의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하면서, 제가 그날 하루종일 품어야 했던 죄책감의 무게를 조금 덜어 주었습니다. 다만, 실제로는 환자가 심근경색과 관련성이 높은 증상이나 징후를 보였는데도 네가 경험이 부족해 간과했을 수도 있다며, 그 일을 계기삼아 더욱 철저하게 환자를 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그 환자를 진료하는 내내 그가 심근경색에 걸렸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라면,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 어지럼증은 있는데 신체검진 소견이 하나도 잡히지 않은 점 등에서 ‘뭔가 싸한’ 기척을 탐지해 냈을 것입니다. 물론 싸한 기척을 느꼈다고 해서 곧바로 심근경색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중대한 질환에서 나타날 수 있는 소견을 찾아내기 위해 좀 더 면밀하게 병력청취와 신체검진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일을 겪은 뒤, 저는 남은 전공의 생활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티끌만위험이라도 있다면 확인은 해보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갖고 살았습니다. 의사들 사이에서 방어진료라고 부르는 개념입니다. 환자에게 해를 입히거나, 나아가서는 그로 인해 의사 자신의 직업과 면허까지 잃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진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각에서는 의사들의 지나친 방어진료가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높이고 있다며 비판하지만, 멀미가 난다며 제 발로 걸어와 접수한 환자가 갑자기 쓰러져서는 그날로 불귀의 객이 되는 일을 겪으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봅니다.


 저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의사 일을 할 생각입니다. 전수받은 소중한 지식과 기술을 썩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중 대부분의 시간은 응급실에서 보내겠죠. 그리고 저는 제가 만나는 환자들에게 자꾸만 검사와 치료를 권하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캐물어 가며 환자를 귀찮게 하는 최악의 의사가 될 생각입니다. 아마 제가 일하는 곳을 찾게 되실 분들은, 의사가 쫄보 새가슴인 데다가 돈에 눈이 멀어 검사만 많이 한다고 욕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100번의 진료 중 99번이 틀리더라도, 저는 계속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아흔아홉 명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곧 죽을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제가 응급실에 앉아 있을 이유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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