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굴림 Jun 28. 2023

[나의 응급실 이야기] 미운 환자.

아무튼 술이 문제다.

 몇 년 전, 방송사 tvN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시즌 1이 나온 게 3년 전인 2020년이었고, 시즌 2가 2년 전이다. 여느 의학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의사가 하는 일을 너무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면은 있었지만, 의사들의 고충이나 병원 밖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에도 주목하여 나름 현실감 있게 풀어낸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의학 드라마가 그려내던 ‘늘 헌신적인 의사’라는 가면을 어느 정도 벗겨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는다면, 시즌 2의 둘째 화에 나온 이식 전문의 이익준(조정석 분)의 외래 진료 장면이었다. 이익준 교수가 외래에서 간 이식을 받은 남자 환자를 면담하는데, 그 사람은 알코올성 간경변으로 이미 두 딸에게 각각 한 번씩 간 기증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음주를 계속한 나머지 두 번째로 이식받은 간마저 망가뜨리고 말았다. 이익준은 그런 환자에게 간 이식을 하느라 귀중한 뇌사자 장기를 허비할 수 없다며 향후 진료를 거부했다.


 내가 학생 시절에 그 드라마를 봤더라면, 드라마인 탓에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몰상식하고 반인륜적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안다. 가상의 의사 이익준이 겪은 이 이야기는 결코 판타지가 아니었다.




 정맥류 출혈로 피를 토하는 환자는, 응급실에서 만나는 ‘진짜 응급환자’ 중 꽤 큰 분율을 차지한다. 정맥류라는 것은 쉽게 말해 '비정상 혈관'이다. 정맥류는 보통 간 기능 이상으로 발생한다. 심장에서 출발하여 장기 곳곳에 산소 공급을 마친 혈액은, 심장으로 돌아오기 전에 간을 거치면서 독성 물질을 제거하고 필요한 성분을 채우게 된다. 그러나 간 기능이 나빠지면 간을 지나는 혈관의 압력이 높아지고, 그러면 혈액은 간을 지나는 대신 간 주변으로 우회하는 다른 혈관을 만들어 그 길을 따라 심장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정맥류이다. 주로 만들어지는 위치가 식도나 위 주변이다.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혈관은 매우 얇고 가늘어서 터지기 쉽고, 터지면 위나 식도 내부로 출혈을 일으킨다.


 간경변, 즉 간이 나빠지는 질병의 원인은 바이러스 간염, 알코올, 기생충, 비만 등 다양하다. 간경변의 가장 흔한 원인은 B형 간염 바이러스이다. B형 간염은 부모에게 물려받거나 성교 등으로 타인으로부터 옮기 때문에 꼭 본인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B형 간염 환자의 대부분은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 생활습관을 조절하고 약물을 복용하는 등 협조가 잘 되는 편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흔한 원인 즉, 알코올로 간을 망친 사람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간경변에 이를 만큼 많이, 그리고 오래 술을 마신 사람은 대개 골칫덩이이다. 알코올성 간경변에는 이렇게 할 약도 없을뿐더러, 환자들에게 의학 외적인 문제도 많다. 일반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간경변을 앓으면서도 술을 끊지 못한다. 그들은 중독자들이 으레 그렇듯 치료에 비협조적이고, 음주와 관련하여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으며,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많다.    




 밤이었다. 중년 남성이 피를 토한다며 응급실을 찾았다. 내원 시점에는 출혈이 멎은 상태였고, 혈압과 호흡이 안정적이었으며 의식도 멀쩡했다. 그는 구급차가 아닌 택시를 타고 아내와 함께 방문했는데, 침상을 배정받자마자 능숙한 솜씨로 직접 침대 머리 각도를 조절하고, 간호사가 오기도 전에 주사를 맞을 소매를 걷어 두는 등, 응급실에 한두 번 와 본 솜씨가 아니었다. 보호자 역시 자리를 잡더니 별 일 아니라는 듯 짐부터 풀기 시작했다. 가방에서는 휴대용 물병부터 미니 선풍기에 이르기까지, ‘응급실 살이’를 위한 도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차트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병원 고수’였다. 그 환자는 적어도 몇 달에 한 번씩은 정맥류 출혈로 응급실을 방문하고, 그때마다 내시경 지혈술 및 정맥류 결찰술(정맥류 혈관을 막거나 잘라내는 시술)을 받았으며, 내과로 입원한 뒤 일주일 만에 퇴원하기를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 방문한 외래에 그가 가진 기저 질환들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열 개가 넘는 병력 사항 중 첫 줄은 Chronic alcoholic(만성 음주자), 두 번째 줄은 Alcoholic LC(알코올성 간경변)였다. 


 면담을 위해 환자에게 갔다. 환자는 병력 청취나 신체 검진 따위에는 통 관심이 없는 듯했다. 질문에는 건성으로 답했으며, 검진을 위해 요청한 자세를 잘 취해 주지도 않았다. 그는 양손을 분주히 움직이며 곳곳에 묻은 피를 닦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셔츠와 바지는 온통 피로 흥건했지만, 피 냄새보다 술 냄새가 더 짙었다. 술 드셨냐고 묻자, 그는 딱 한 잔 마셨노라 답했다. 그러자 보호자가 한 잔이 아니라 시간당 한 병씩이라며 환자의 말을 정정하고 나섰다. 간경변이 최종 단계까지 진행하여 허구한 날 피를 토하고 실려오는 지경이 되어서도, 그놈의 소주를 끊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환자는 하루에 다섯 병 이상 마신 적은 없다며 오히려 아내에게 화를 냈다. 그러면 그렇지. 딱 한 잔 마신 것은 아님을 인정한 꼴이었다.


 나는 그러다 진짜 골로 가신다고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그간 술을 끊어야 한다는 말을 한 두 번 들은 게 아닐 텐데, 오늘 처음 만난 신출내기 의사에게 한 번 더 듣는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었다. 게다가 괜히 흥분시켰다가 멎은 피가 다시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정맥류 출혈이 의심되는 환자에게 필요한 검사와 처치 지시를 발행한 뒤 그의 차트를 덮었다. 병원 직원들도 대부분 퇴근한 시간이었기에, 아주 응급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지혈술이나 정맥류 결찰술을 당장 할 수는 없었다. 당장 피는 멎은 상태이니, 혈관이 다시 터지는 것만 아니라면 낮 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밤 사이 별다른 일이 없기만 바라며 다음 환자의 차트로 시선을 옮겼다.




 자정이 지나고 응급실이 한산해질 즈음, 누군가의 성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예의 토혈 환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입원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 중 하나를 아내가 챙겨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환자는 그것 하나 준비를 제대로 못 하냐며 아내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라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보다 못한 담당 간호사가 나섰다. 간호사가 환자에게, 다른 환자들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조용히 해 달라고 하자, 이번엔 거기다 대고 자신은 환자도 아니냐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일이 커지는 듯하여 근처에 있던 보안요원과 나도 그의 침상 근처에 서서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나무라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연신 의료진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그때, 고함을 치던 환자의 눈이 뒤집히더니, 입에서 목소리 대신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서둘러 수혈을 비롯한 응급처치를 진행했다. 교수님께서 소화기내과 당직의에게 연락하여 응급 내시경을 의뢰하는 사이, 나는 환자의 식도로 S-B tube(임시 지혈용 풍선)를 삽입했다. 낮아진 혈압을 높이기 위해 수액을 들이붓고 승압제도 걸었다. 대량 수혈을 위해 MAC catheter(대구경 중심정맥관)도 확보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 혈압은 점차로 낮아져만 갔고, 뒤이어 심박수가 느려지더니 이내 심장이 멎었다.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저혈량성 쇼크 혹은 출혈성 쇼크, 즉 피가 부족해서 발생한 심정지였다. 다시 말해 피가 필요했다. 곧이어 혈액은행에서 급히 내려보낸 혈액이 도착했다. MAC catheter를 통해 피와 수액이 들어가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했다. 다시 심정지가 발생했다. S-B tube가 닿지 않는 부위에서 출혈이 계속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사이 소화기내과 당직의도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심폐소생술이 한창인 상황에서는 지혈을 위한 내시경을 원활히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30여 분 간 이어진 심폐소생술 끝에 교수님께서 소생술 중단을 선언했다. 그는 그렇게 생의 끝을 맞이했다. 그가 생전 내뱉은 마지막 말은, “XX새끼들아, 니들이 그러고도”였다. 아내는 무덤덤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이미 외래에서 여러 번 들었다면서.




 응급실에서 일하면 심심찮게 그런 환자들을 만난다. 참 밉다. 그게 결론이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기 몸을 스스로 망가뜨린 대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한 대가, 우리 의료진을 모욕한 대가를 치렀으면 싶을 때가 많았다. 그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활력을 되찾아 떠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다시 얻은 활력을 무기 삼아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밉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진료했노라 자부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나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의사가 갖춰야 할 직업윤리를 정리해 놓은 제네바 선언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 의사는 환자를 위한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인종, 국적, 종교, 정당, 사회적 지위를 비롯한 어떤 조건에도 불구 차별하여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들이 그렇게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행실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만큼, 그들 또한 우리의 노력에 감화되어, 자신의 남은 삶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고 개심하였으면 하는 욕심을 품어 본다. 죽을 위기로부터 벗어나 활력을 되찾는 흡사 부활에 가까운 경험으로부터,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부활하여 감사와 사랑을 깨닫는 기적이 있었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응급실 이야기] 비와 죽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