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GENTINA (인플레이션의 공포)
올해 6번째로 방문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물가는, 다른 어느 때보다 싸게 느껴졌다. 미국 달러나, 유로를 주 통화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아르헨티나의 물가는 더없이 싸게 느껴진다. 매해 방문할 때마다 그 전해보다 물가가 싸졌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올해는 물가가 거의 반값이 됐음이 체감됐다. 크라상과 비슷한 메디아 루나 2개, 라떼 2잔을 아침 카페에서 사 먹었는데 한화로 약 3천 원 정도를 지불했다. 1인당 1500 원을 지불한 꼴이다. 이렇게 가격이 싼 이유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지난 수십 년간 아르헨티나의 페소 가치가 꾸준하게 계속 하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민들이 달러를 구매할 수 있는 매달 200 달러로 제한 하고 있다. 사실상으로 달러를 소유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렇다고 정부가 하자는 대로 곱게 따라 줄 아르헨티나 인들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엔 두 가지의 환율이 존재한다. 하나는 '달러 오리지널', 다른 하나는 '달러 블루'. 이걸 모른 채 아르헨티나를 여행한다면, 내가 느꼈던 반값 물가를 체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공식적인 달러 가치가 USD 1달러에 100 페소를 교환해 준다면, 달러 블루는 USD 1달러에 약 200 페소의 가치로 당신에게 교환해 준다.
달러 오리지널은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통제하는 공식 환율이고, 달러 블루는 아르헨티나인들의 실물경제 시장에서 공공연히 존재하는 비공식 달러이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탓에, 페소를 소유하고 있으면 매일매일 돈의 가치를 잃어 가는 게 아르헨티나의 현실이다. 오늘은 1억 원의 가치였다면, 이 돈을 고이 은행 예금으로 모셔 놓는다면 내년엔 이 1억이 5천만 원으로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혹은 이보다 더 운이 나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르헨티나 인들은 월급으로 번 페소를 서둘러 블랙마켓에서 달러로 교환하거나, 혹은 여유가 있다면 부동산으로 구매해 상대적으로 변동 가치가 적은 자산으로 페소를 교환하고자 한다.
비공식 달러의 환율로 교환하는 것은 엄밀히 만하면 합법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법은 아닌 편법에 가까운 그 어느 경계에 있다. 아르헨티나의 주요 신문사의 온라인 사이트를 방문하면 그날의 주요 기사들과 함께 환율 공시가 기재되어 있다. 신문사에서 조차 두 가지의 주요 환율을 공시해 준다. 달러 오리지널, 달러 블루.
'달러를 자유롭게 교환하지 못한다면, 그럼 아르헨티나인들은 해외여행을 할 때 어떻게 하니?' 아르헨티나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그럴 땐 비자, 마스터 카드 신용카드를 이용한단다. 신용카드로 해외에서 구매를 하면 아까와는 정 반대로 공식 환율로 결제가 되니, 아르헨티나인들에게는 이득이다. 예를 들면 10달러의 제품을 구매하면, 공식 환율을 적용해 1000 페소만 신용카드사에 갚으면 되는 거다. 대신 이 달러 블루가 공공연하게 존재하니, 아르헨티나 정부는 해외 결제 건에 대해서 60 % 세금을 물린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40 % 는 이득이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건 아르헨티나인들은 은행을 매우 불신한다. 그들은 은행에 저금을 하지 않는다. 페소로 저금을 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만히 숨만 쉬어도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만 하니 그 누가 저금을 하랴. 그렇다고 달러 예금을 이용하여 달러를 저금할 수도 없다. 왜냐면 은행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과 정부에 대한 불신의 이유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경제위기를 맞은 아르헨티나 정부는 은행 고객들이 보유한 달러 자산을 인출하는 것을 약 1년 여간 막았다.
달러 자산 대신 페소로 환전하는 건 가능했지만, 정부가 지정한 공식 환율로 환전하는 순간, 내가 가졌던 돈의 가치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회사를 퇴사하며 받은 퇴직금, 평생 모은 저금의 가치가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되는 경험을 하고, 내가 가진 달러 자산을 생계를 위해 인출을 하고 싶어도 돈을 꺼내 쓰지 못하는 끔찍한 악몽을 겪은 것이다. 이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은행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낳았다. 그들은 이날 이후, 은행 대신 본인들이 생각하는 안전한 어딘가에 달러를 보관한다. '달러 블루'는 그들이 처한 안타까운 경제의 현실이자, 살아 남기 위한 그들의 생존 방식이다.
한 아르헨티나 친구의 말로는 본인이 어릴 때 인플레이션이 한 달에 200 프로 가까이 오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슈퍼마켓에서 점원이 매 시간 제품의 가격 택을 다시 찍어내며, 실시간으로 오르는 인플레이션에 맞추어 제품의 가격을 올리고, 그 점원의 뒤로는 조금이라도 오르기 전의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하려고 사람들이 뛰어다니며 제품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실제 경험담이다.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본인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나라가 처한 경제적 불안전성에 굉장히 안타까워한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누군가는 현재 상황에 불평을 늘어놓고, 누군가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아이고, 아르헨티나는 갈 곳이 못 되는 군, 살기 어려운 곳이네.'라고 연민을 할 필요는 없다. 어느 것이던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기 마련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남편의 친구는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고 있다. 2층 집에 멋진 정원이 딸려 있고, 그 정원엔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아사도 그릴과, 수영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고등교육만 착실하게 잘 마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이들도 이렇게 멋진 집에서 살 수 있다. 인구수는 한국과 큰 차이가 나질 않지만, 땅덩이는 28배나 크다. 실제로 내가 만난 중산층들은 인테리어 매거진에서 볼 수 있는 수영장이 있는 멋진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잠깐 딴 얘기를 하자면, 2020 년 전셋값이 미친 듯이 올랐던 8월, 서울에서 살고 있던 난 보증금 5억 5천만 인 전셋집을 구했었는데, 방 3칸의 32평 정도 크기의 약수동에 위치한 오래된 아파트였다. 일부는 가지고 있던 적금으로, 일부는 은행 대출로 충당을 했었다. 서울에서 나와 남편이 살던 그 아파트 단지를 떠올리며, 지금 이 대 저택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우리의 친구들이, 다른 불만이 해소되는 조건으로 그들이 지닌 이 대저택과 엇비슷한 가격의 32평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문제는 아르헨티나 내부엔 큰 빈부격차가 있고 빈곤층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대부분의 중산층은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정부의 공교육의 질이 높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교육에 투자하기보다는,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그 돈을 빈곤층의 보조금으로 사용한다. 빈곤층은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엔 그들을 더더욱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게 만들며, 교육이 보장되지 않는 한에는 그다음 세대에도 가난이 대물림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식민 지배를 겪으며 빈곤에 시달렸던 1910년대에,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 10위 안에 들었던 경제 대국이었다. 이 문제는 내가 감히 단순히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문제지만, 무엇이 이 두 나라의 미래를 바꾸었을까 생각했을 때 떠올린 여러 이유 중 하나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정부 정책과 고질적인 문제들이 아르헨티나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여행이 끝나 갈 때쯤 우리의 수중엔 남은 페소가 있었는데, 최대한 이 페소를 떠나기 전 다 써버리려 노력했다. 공항에서 나는 남은 돈으로는 아르헨티나의 대표 디저트인 둘세 데 레체를 샀다. 일 년 후, 아르헨티나를 다시 방문할 즈음이면, 이 돈의 가치가 오를 경우의 수 보다는, 지금보다 현저히 더 낮아져 있을 가능성이 크니, 차라리 지금 다 써버리는 게 나으니 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 달 여간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같은 메뉴를 동일하게 시키며 550 페소 정도를 지불했는데,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니 가격이 630 유로란다. 순간, 이상하다. 웨이터가 계산을 잘못했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지난주 금요일에 웨이터가 한 말이 생각났다. 다음 주부터 인플레이션으로 커피와 빵 가격이 오를 거라 했었다. 아르헨티나에 왔으면, 나도 아르헨티나인들처럼 생각하고 민첩하게 행동해야 한다. 예를들면, 우리는 가져온 목돈을 절대 한번에 모두 환전하지 않았다. 조금씩 나누어 환전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은돈으로는, 내일 우리 둘중 한명은 커피와 빵을 곁들어 있는 식사를 하지 못할 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