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뒷것...내 연주보다 페이지터너 하는 게 더 떨렸다
요즘 '뒷것'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덕분이다. 학전을 만든 김민기는 무대에 오르는 가수나 배우는 '앞것', 그리고 그 무대를 만들기 위해 뒤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뒷것'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전이 33년만에 문을 닫은 지금, 문화예술의 ‘못자리’ 학전의 ‘뒷것’으로 살아온 김민기의 이야기는 더욱 큰 울림을 남겼다.
그런데 며칠 전 음악회에 갔다가 무대에 오르면서도 '뒷것'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음악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페이지터너(Page Turner)다. 말 그대로 ‘페이지(page)’를 넘겨주는 사람(turner)’, 음악회에서 연주자 대신 악보 넘겨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넘순이' '넘돌이'라는 별명으로도 많이 불린다.
모든 음악회에 다 페이지터너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독주곡이나 협주곡은 대개 암보로 연주하기 때문에 페이지터너가 없다. 그러나 여럿이 연주하는 실내악이나 피아노 반주의 경우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악기 중에서도 특히 피아노 악보는 음표가 많고 복잡해서 연주자가 직접 넘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옆에 페이지터너가 앉게 된다. (종이에 인쇄된 악보 대신 전자 악보를 쓰면, 손이나 발 터치로 간편하게 악보를 넘길 수 있으니 페이지터너가 없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전자악보는 전원이 꺼지거나 오작동할 가능성도 있어서 아직 전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있다.)
페이지터너는 전문인력을 파트타임으로 고용하는 경우도 있고, 연주자와 친분이 있는 후배나 제자가 하는 경우도 있다.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음악 전공자가 하는 경우가 많다. 음악적 지식은 기본이고, 공연 내내 한 음이라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갖춰야 하며, 연주자와 호흡을 잘 맞춰야 한다.
페이지터너는 연주자의 옆에 조용히 앉아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일어나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악보를 넘겨주고 다시 앉는다.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까다로운 일이다. 어떤 연주자는 조금 일찍 넘겨주기를 원하고, 어떤 연주자는 딱 맞춰서 넘겨주길 원한다. 어떤 사람은 페이지터너가 여유 있게 일어나서 악보를 넘길 준비를 하길 원하고 어떤 사람은 미리 일어나는 게 신경에 쓰인다고 싫어한다. 이렇게 연주자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으니, 페이지터너는 이를 잘 파악해서 제 때 넘겨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페이지터너’는 연주 내내 무대 위에 있지만, 무대 위에서 돋보이면 절대 안 되는 사람이다. 바로 옆에 있는 연주자조차도 페이지터너를 의식하지 못할수록 훌륭한 페이지터너다. 페이지터너는 장신구 없이 수수한 차림으로 연주자를 돋보이게 해야 한다. 보통은 무난한 검정색 정장을 많이 입는다. 페이지터너는 연주자와 함께 무대에 입장 퇴장해서도 안되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조용히 뒤따라가야 한다. 객석의 박수에 답례할 수도 없다. 연주에 쏟아야 할 관심이 분산되지 않도록 악보를 넘길 때 이외에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한다.
몇 년 전 페이지터너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한 실내악 공연을 취재한 적이 있다. 페이지터너에 주의를 기울였더니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특히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들이 인사할 때, 페이지터너가 살짝 일어나 피아노 뒤로 숨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뒤에 서서 작은 손뼉을 치는 페이지터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피아니스트 김영호 씨는 페이지터너의 역할은 ‘연주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며, ‘보이지 않는 연주자’라고 표현했다. 특히 현대 곡에서는 페이지터너가 악보만 넘기는 게 아니라 악보에 표시된 대로 피아노 내부 현을 두드리거나 튕기는 등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김영호 씨는 ‘페이지터너의 실력이 공연의 질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했다.
“연주자들은 지금 연주하고 있는 그 음을 보는 게 아니라 항상 그 앞을 보면서 연주하거든요. 그 타이밍이 연주자마다 조금씩 다를 거예요. 페이지터너가 이걸 파악해서 호흡을 맞춰서 넘겨줘야 연주가 매끄럽게 진행되죠. 그렇지 못할 때는 굉장히 불안하고 연주자가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죠. 제가 해외에서 공연할 때 일인데, 어떤 할머니가 페이지터너를 하셨어요. 그런데 긴장을 많이 하셨는지 계속 부들부들 떠시더니, 드디어 사고를 내시더라고요. 악보를 떨어뜨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할 수 없이 연주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죠. 정말 난감했어요.”
페이지터너 직접 해보니
나도 페이지터너를 해본 경험이 있다. 내가 참여하는 아마추어 음악동호회에서 지인들을 초대해 작은 공연을 연 적이 있는데, 연주한 멤버들끼리 서로 페이지터너를 해준 것이다. 내가 페이지터너가 되어야 했던 곡은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였다. 20분 가까이 걸리는 짧지 않은 곡이고 반복이 많아서, 나는 리허설 때부터 긴장 모드였다. 음악에 집중해야 하지만, 너무 집중해서 몰입이 되어버리면 페이지 넘기는 걸 잊어버릴 수 있으니 그러지 않을 정도로만 집중해야 했다.
공연 프로그램에는 내 연주가 먼저 배치되었다. 내 연주가 끝나고 다시 페이지터너로 무대에 올랐는데, 정말 내가 연주할 때보다 더 긴장되고 떨렸다. 내가 연주를 못하면 내 탓으로 끝나고 말지만, 내가 페이지를 잘못 넘기면 남의 연주를 망치게 될 수 있으니까.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두 멤버 중 한 사람이 연주를 중단했다. 앗! 왜 그러지? 내가 잘못했나? 페이지를 너무 빨리 넘겼나? 너무 늦게 넘겼나? 혹시 두 페이지를 한꺼번에 넘겼나? 짧은 순간에 내 머리속이 하얗게 되었다.
연주를 중단한 멤버가 당황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전까지 계속 암보로 연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악보를 의식하면서 헷갈려서 엉켰다고. 돈 내고 보는 프로페셔널 공연도 아니고, 관객들은 모두 웃으면서 격려의 박수를 보내줬다. 연주는 다시 시작되었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아, 내가 잘못 넘겨서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페이지터너라는 일의 ‘무게’를 새삼 실감하게 된 계기였다.
공연 한 편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수많은 ‘뒷것’들이 필요하다.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앞것’, 즉 출연자들이 무대에서 빛나게 하는 것, 좋은 공연을 만드는 일이다. 페이지터너는 그 중에서도 좀 특이한 존재다. 무대 위, 그러니까 앞에 있으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뒷것’이어야 하니까. 앞으로 음악회에 가면 한번쯤은 무대 위의 ‘뒷것’ 페이지터너에도 관심을 기울여보면 어떨까.
*방송기자클럽회보에 기고한 글입니다(202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