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에서 살기 전까지 내가 아는 쌀국수는 한 종류밖에 없었다. 포OO 프랜차이즈나 이태원 베트남 음식점에서 파는 베트남 쌀국수, 퍼 보(Phở bo)가 내가 아는 베트남 쌀국수의 전부였다. 하지만 호치민에서 6년을 사는 동안 접하고 맛본 베트남 쌀국수는 너무나 다양했다. 재료와 면발 굵기에 따라 면의 종류가 달라졌고, 식재료와 조리 방법에 따라 음식 이름이 더 다양해졌다. 현지에서 그 다양함 때문에 어떤 쌀국수를 먹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였었다. 쌀국수는 베트남에서 가장 사랑받는 흔한 식재료 중 하나지만, 쌀국수에 대한 정보가 내겐 너무 부족했다. 6년이 지난 지금, 퍼 보(Phở bo)부터 후 띠유(Hủ tiếu)에 이르기까지 직접 먹어본 쌀국수 위주로 정리해 보았다.
쌀국수 면의 종류
반 퍼, 분, 후띠유, 반깐(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베트남 음식은 이름에 대부분 재료와 요리법이 들어가 있다. 쌀국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쌀국수 면의 종류에 대해 먼저 정리해보았다. 쌀국수 요리의 이름은 면의 종류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쌀국수는 기본적으로 반 퍼(bánh phở), 분(bún), 반 깐(banh canh), 후 띠유(Hủ tiếu) 등4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대중적인 면은 반 퍼(bánh phở)와 분(bún)이다. 반 퍼를 쇠고기 육수에 넣고 양지머리나 살코기, 허브, 쪽파 등을 올리면 우리가 아는 베트남 쌀국수 퍼 보(Phở bo)가 된다. 분(bún)은 가늘고 동그란 쌀 당면의 일종인데, 모양과 굵기가 다양해 여러 가지 음식에 사용된다. 얇고 가는 분(bún)은 고이 꾸온(gỏi cuốn, 스프링롤)의 속재료로 사용되며, 분 짜(bún chả)나 분 팃 느엉(bún thịt nướng)에 사용된다.더 두꺼운 형태의 분(bún)은 베트남 중부 지역의 분 보 훼(bún bò Huế)에 사용된다.
반깐(banh canh)은 타피오카와 쌀가루를 섞어 만든 매우 두꺼운 국수로 부드럽고 쫄깃하다. 반깐으로 만든 베트남 요리 중 신선한 게로 만든 반깐쿠아(bánh canh cua)가 유명하다. 납작한 쌀국수를 의미하는 후 띠유(Hủ tiếu)는 반투명하고 쫄깃한 쌀국수로 타피오카를 섞어서 만든다. 건조된 상태에서 반투명한 이 면은 삶아도 반투명하고 쫄깃하다. 그밖에 쌀국수로 만든 반 호이(bánh hỏi)나 베트남식 당면인 미엔(miến) 등도 쌀국수의 종류라고 한다.
호치민 쌀국수 맛집, 퍼 킴 흥(Phở Kim Hưng)
퍼 보(Phở bo)는 반 퍼(bánh phở)와 쇠고기(bo)가 합쳐진 것으로, 반퍼 면을 사용하고, 쇠고기를 이용한 요리라는 뜻이다. 호치민에 도착한 후 푸미흥에 위치한 퍼킴흥(Pho Kim Hung)에서 처음으로 퍼 보를 먹었다. 퍼 보에 고명으로 얹는 쇠고기 부위와 익힌 상태에 따라 메뉴명이 또다시 세분화되었다. 다행히 번역기로 돌린 듯한 한글 메뉴명이 있었고 잠시 고민하다 퍼 보 찐(Phở bò chín, 익힌 소고기 쌀국수)을 주문했다.
한국에서 먹었던 쌀국수는 한 그릇에 만원대를 호가하는 이국의 음식이지만, 현지에서 처음 맛 본 쌀국수는 단 돈 6만 동(3천 원 상당)의 대중 음식이었다. 처음엔 6만 동이면 엄청 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어디서 먹느냐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소문난 맛집에서는 6만 동, 동네 가게에서는 4만 동,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선 12~16만 동으로 3배까지 차이가 났다. 그래 봐야 한국에서 먹는 쌀국수보다는 싼 금액이다. 그러다 베트남 물가에 익숙해니 쌀국수 한 그릇에 16만 동이나 주나라는 생각이 들며, 동네에서 지나가다 들어가서 먹는 동네 쌀 국숫집 4만 동짜리 퍼 한 그릇이 더 정겹고 맛있어졌다.
맑은 국물에 각종 향채와 데친 숙주를 올리고, 라임을 짜서 상큼한 맛을 더하면 텁텁한 맛은 사라지고 시원한 국물의 쌀국수가 되었다. 맵찔이지만 매운 고추를 두 조각 정도 미리 넣었다가 먹기 직전에 빼면 적당히 알싸함과 함께 맛이 풍부해졌다. 같은 메뉴의 쌀국수를 주문하더라도 향채, 라임, 마늘, 고추, 숙주 등의 부재료를 가지고 개인 취향에 맞게 조제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퍼 보와 함께 짜 다(trà Đá, 냉차)를 주문해서 먹는데, 우리나라에서 여름에 마시는 차가운 보리차처럼 더위도 가셔 주고 텁텁할 수 있는 쌀국수의 맛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가격도 저렴해서 가게에 따라 다르지만 퍼킴흥은 4 천동(200원 상당)에 팔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짜 놈(trà nóng, 뜨거운 차)은 무료였는데, 결국 짜다(trà Đá)는 얼음(Đá) 1잔 가격이었던 셈이었다.
퍼 보를 애정하지만 자주 먹다 보면 나트륨 때문인지 몸이 붓는 게 느껴진다. 그럴 때는 국물을 빼고 건더기만 먹거나, 국물이 없는 새로운 메뉴를 시켜보게 된다. 국물은 먹지 않고, 건더기만 먹자니 국물은 너무 맛있다. 퍼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이지만 익숙한 모습 외에도 다양한 시도를 통해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음식이다. 퍼 버거나 퍼 피자 역시 이러한 시도 중 하나도 보인다. 가끔 퍼 보를 먹지 않고 싶을 때 주문하는 퍼 압 짜오(Phở áp chảo, 쇠고기로 볶은 쌀국수 팬케이크)역시 그런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Pho Burger & Pho Pizza(출처: vnexpress.net)
북부지방이 원산지인 퍼 압 짜오는 반 퍼로 만든 베트남식 팬케이크로 겉바속촉이 특징이다. 전통 팬에 기름을 두르고 반 퍼를 꾹꾹 눌러서 누룽지처럼 만든 다음 볶은 채소와 쇠고기 등과 함께 접시에 담아낸다. 이러한 변형된 퍼는 고급식당보다는 대중음식점이나 길거리 식당에서 볼 수 있다. 새로운 쌀국수를 맛보고 싶다면, 이 메뉴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누룽지처럼 바삭한 쌀국수에 각종 볶은 채소와 쇠고기가 올려져 있어 맛과 영양, 식감 모두를 갖추고 있다.
출처: yummy vietnam.net
분짜(Bún chả) vs 분 팃 느응(bún thịt nướng)
3군 위치한 꽌 넴(Quan Nem)은 꽤유명한 맛집이다. 식당 입구에 CNN이 선정한 맛집이라는 문구를 탓인지 현지인보다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맛집인 것 같다.알고 보니 꽌 넴은 분짜 맛집이 아니라 넴(Nem) 맛집이었다. 스프링롤을 기름에 튀긴 것을 짜조(chả giò) 또는 넴란(nem rán)이라고 하는데, 꽌넴에서 파는 넴은 북부 스타일로 어른 손바닥보다 사이즈가 컸다. 접시에 담아온 커다란 넴을가위로 잘라서 서빙했다. 꽌넴에 가면 항상 넴과 함께 분짜(Bún chả)를 함께 주문한다. 분짜는 쌀국수를 소스에 적셔서 야채에 싸서 먹는 스타일이다.
7군에서 배달이 되는 분짜 맛집, 분짜 하노이(Bún chả Hà Nội)가 있다. 전화를 하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직원이 주문을 받는다. 굳이 "템 습, 라우 뉴뉴" 베트남어로 국물과 채소를 추가시킨다.
직접 가기 힘들 땐 배달을 시키지만, 직접 가서 먹는게 제일 맛난다. 분짜 또는 닥비엣(dac biet, 스페셜)을 주문하는데, 닥비엣은 스프링롤까지 추가된 메뉴다. 숯불에 구운 떡갈비와 삼겹살, 각종 향채와 채소, 특제 소스(국물), 분이 나온다.
분 팃 느엉(bún thịt nướng)은 분과 팃 느엉(thịt nướng, 구운 돼지고기)가 허브, 채소, 숙주나물과 함께 나오는 요리다. 함께 나오는 메뉴다. 이 요리는 느억 맘(nước mam, 피시 소스), 볶은 땅콩, 무/당근 절임 등과 같이 나온다. 분팃느엉은 분짜가 원산지인 하노이를 제외한 베트남 전역에서 인기가 있는 메뉴다.분짜는 쌀국수를 소스에 적셔서 야채에 싸서 먹는 스타일이라면, 분팃느엉은 베트남식 비빔 쌀국수에 가깝다.
분 짜(분, 짜조, 고기, 채소 등이 한 그릇에 함께 서빙) vs 분 팃 느엉(구운 고기, 채소, 분, 소스가 따로 서빙)
개인적으로 나는 붉은 국물보다는 맑은 국물을 선호하는 편이다. 얼큰한 맛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종종 분 보 훼를 추천했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거부했었다. 그러다 중부지역에 놀러 갔다가 렌터카 기사에게 추천받아 간 곳이 닥산 소못 찐곡 분 보 훼(Đặc Sản Số 1 Chính Gốc Bún Bò Huế)이었다. 굳이 해석하자면 스페셜 넘버원 원조 분 보 훼 식당이었다.
현지인의 추천으로 갔으니 당연히(?) 위생적인 면은 패싱 해야 했다. 분보훼 한 그릇과 짜다 한잔 시켰다. 맑은 고기 국물에 익힌 채소를 넣고, 통통하고 쫄깃한 면발에 연신 감탄했다. 분 보 훼는 당연히 텁텁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선입견을 깨준 집이었다. 서울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집이 맛집이든 No.1 원조 분보훼는 맛집이 확실했다. 물론 분보훼의 진한 국물을 좋아하는 분들께 이 집 분보훼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다음 해 다른 손님과 함께 이곳을 다시 찾았지만, 처음 먹었을 때의 그 맛은 아니었다. 깔끔했던 국물이 기름져서 예전의 그 맛이 아니었다. 왜 맛집은 맛이 변하는 걸까 아쉬움을 남기고 떠났던 기억이 있다. 후기를 찾아보니 이 식당에 대한 호불호가 있었다.
2017년 기준 맛집이었으나 2018년은 글쎄?
하지만 그 후에 푸미흥 퍼킴흥에서 우연히 분 보 훼를 먹게 되었다. 스탠딩 메뉴판의 앞쪽은 퍼 보 메뉴, 뒤쪽은 분 보 훼의 메뉴였는데 별생각 없이 뒷면을 가리키며 주문한 실수였다. 내 앞에 놓인 분 보 훼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익힌 채소와 향채를 양껏 넣고, 라임즙을 짜넣었다. 라임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베트남에서 쌀국수를 먹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맵지 않고 얼큰한 분 보 훼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온 몸에 기분 좋게 땀이 흘렀다. 비록 맵찔이지만, 사람들이 왜 얼큰하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와닿았다.
호치민 생활 2년 차, 새로운 쌀국수를 맛보게 되었다. 퍼 보나 분짜를 즐겨 먹던 내게 남편은 후 띠유를 소개해주었다.후 띠유(Hu Tieu)는 이름의 반 투명하고 꼬들꼬들한 면이 들어간 요리였다. 맑고달큰한 국물이 특이했다.
베트남에서는 흔히 북부엔 퍼 보, 남부는 후 띠유라고 말한다. 퍼 보의 원조인 북부지역에서 아침식사로 퍼 보를 먹는다면, 호치민을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는 후 띠유를 먹는다. 그러고 보니 거리를 다니다 보면 후 띠유 남방이라고 쓰여있는 가게나 노점상이 많이 보이긴 했다. 후 띠유 남 방에서 남방은 캄보디아 프놈펜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프놈펜 스타일 쌀국수(Phnom Penh style rice noodles)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껀터에 놀러 갔을 때 수상시장에서 먹었던 투명한 면발의 쌀국수도 후 띠유 였던 것 같다. 후 띠유 남방만큼이나 유명한 것은 후 띠유 미토(Hu Tieu My tho)인데, 미토는 메콩 델타의 지역명 중 하나다. 후 띠유 남방과는 달리 향채와 향신료가 들어가 칼칼한 맛이 났다.
집 근처라 즐겨가던 후 띠유 남방 뀐(Hu Tieu Nam Vang Quynh) 식당은 국제학교 앞이라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지 영어 메뉴가 함께 적혀 있었다. 후 띠유는 국물이 있으면 후띠유 느억( nuoc), 국물 없는 비빔면은 후티유 코(kho)라고 한다. 추가로 들어가는 식재료에 따라 텁껌(Thap cam, 모둠), 쓰엉(xuong, 갈비), 믁(Muc, 오징어), 닥 비엣(Dac Biet, 스페셜)으로 나뉜다. 주문할 때는 면 종류를 고른 후에, 국물 여부를 결정하고, 부재료를 고르면 된다. 나는 주로 후 띠유 면에, 국물이 있고, 해산물이나 텁껌(모둠)으로 주문했다.
아침에 항상 붐비는 2군 타오디엔 스타벅스 맞은편 모퉁이에는 이름 모를 식당이 있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다 보면 좁은 골목에 계속 오토바이가 들락날락하는 걸 보며 꽤나 맛집인가 싶어 궁금해졌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 아침을 거르고 일찍부터 타오디엔 거리에 갔던 어느 날 홀린 것처럼 식당에 들어섰다.
아침이어서 그런지 테이블 순환이 빨라서 금방 자리를 잡고 앉았다. 후 띠유와 반 깐을 같이 하는 곳이었다. 면을 고르고, 부재료를 고르는 것은 동일했다. 반 깐 하이산(Banh Canh Hai San, 해산물 반깐)을 시키고, 사탕수수 주스도 같이 시켰다. 통통하고 쫄깃한 면발에 진한 국물이 마음에 들었다. 돼지 육수의 텁텁함은 오늘도 라임으로 커버했다.
그리고 주말 아침,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다시 왔다.아이들도 우동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후루룩후루룩 잘 먹었다. 그날 이후, 주말 아침 타오디엔에서 체험학습이 있는 날에는 이곳에 들러 아침을 해결하고 아이들을 센터에 들여보낸 후 스타벅스나 다른 카페에서 커피를 하는 게 주말 코스가 되었다.
처음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깨끗하고 정갈한 곳에서만 음식을 먹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나마 깨끗하다는 7군 푸미흥에서도 바퀴벌레나 쥐와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은 일상이었다. 어느 순간 위생을 적당히 포기하면 맛을 얻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닿았다. 그 때문인지 길을 걷다가도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혼자 먹는 게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 호치민에 도착했을 때 주문하는 것 마저 버거웠었는데, 6년이 지난 지금 적어도 식당에서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다. 이 글이 처음 메뉴를 보고 당황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