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한국계 학교로 옮겼던 아이들이 새로운 학교에 적응할 무렵, 우리는 한국행을 결정했다. 2020년 코로나가 가져온 불황과 베트남 방역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불안으로 상당수의 국내외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결정했고, 그 가족들도 고국으로 향했다. 그때도 우리는 버텼었다.
베트남 정부가 발표하는 확진자수에 대해 믿지 못했지만, 통제되고 있다는 발표에 희망회로를 돌렸다. 마스크를 쓰면 외출이 가능했고, 배달주문, 온라인쇼핑도 가능했다. 좌석의 50% 인원만 타면 차량 운행도 가능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사무실에서 밥을 해 먹었어도 곧 괜찮아질 거란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2군 아파트 코로나 전수검사 명령으로 인근 학교에서 검사 중
하지만 어느 순간 공기가 바뀌는 게 느껴졌다. 대중교통이 멈췄고, 배달부는 더 이상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건물 밖으로 가서 배달물품을 받아야 했다. 학교도 문을 닫고, 학원도 문을 닫았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집에 머물러야 했다. 아파트 수영장도 출입이 금지되었다. 아파트에 확진자가 나오면 해당 아파트 층이 봉쇄되거나, 아파트 전체가 봉쇄되는 일도 발생했다. 정부 차원에서 재택근무가 권장되었고, 베트남에서 한국에 입국한 대기업 직원의 확진 소식에 혐한 분위기도 조성되었다.(다행히 최종 음성으로 판명됨). 마스크를 잘 쓰지도 않고 모여서 노는 외국인들 때문에 코로나가 퍼진다는 소문도 돌았다. 실제로 타오디엔입구에 있는 부다바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왔고, 결국엔 문을 닫았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갔고,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 시국에 우리는 지쳐갔다.
우리는 한국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냥 버티기에 코로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았다. 버티느냐, 그만두느냐 선택의 귀로에서 우리는 멈추기로 했다. 남편은 한국 기업에 재취업을 했고, 한국에 먼저 들어가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면서 우리가 살 집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동안 우리는 남아서 호치민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아이들 학기가 끝나지도 않았고, 누군가는 남아서 짐을 정리해 한국에 보내야 했다.
다시 이사 준비, 출국 준비
결혼을 하고 2-3년마다 거주지를 옮기는 게 새삼스럽지도 않다. 한국에서도 2년에 1번씩 이사를 했고, 호치민에 도착해서도 7군에서 3년쯤 살고, 다시 2군으로 옮겼다. 그리고 3년이 지나니 다시 한국으로 국제이사를 남은 두 달 동안 준비하게 되었다.
먼저 집주인과의 계약 관계를 정리해야 했다. 보통 두 달치 달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내고, 매월 또는 격월로 월세를 낸다. 이사를 앞두고 보증금 돌려받는 일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일을 종종 봐왔었다. 우리도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게다가 이사를 앞두고 베트남 동화를 정리하던 중이었는데, 한국으로 출국하고 나서 베트남동(VND)으로 보증금이 입금되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돈과 관련된 일은 남편이 주로 처리했었는데, 이번에는 별수 없이 내가 집주인을 만났다. 다행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떠나는 외국인이 많았서인지, 집주인은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해 주었다. 마지막 남은 두 달 치 월세와 보증금을 서로 주고받은 셈 치기로 했다. 보증금 문제도 베트남 동화 문제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두 달 내내 짐 정리를 했다. 테트리스를 잘해둔 덕에 매번 이사 갈 때마다 이삿짐 회사에 견적 외 추가 금액 얘기가 나오곤 했었다. 부피가 정해져 있는 컨테이너로 싣고 가야 하니 짐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우선 중고 단톡방에 책과 옷, 장난감, 자전거 등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다 팔거나 나눠주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화분들도 주변에 나눠줬다. 반면 한국에서 필요할 것 같은 베트남 물건들은 사재기를 했다. 견적을 받기 전 짐을 줄이느라 줄였는데도, 이삿짐 견적 내러 방문한 직원은 컨테이너 하나가 꽉 찰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생에 미니멀리즘은 근처에도 못 갈 것 같다.
아이들 학교와 전학서류를 챙겨야 했다. 학기 리포트가 발행되는 일정에 맞춰 미리 전학서류를 신청해 두었다가, 서류를 발급받으러 7군에 있는 학교에 갔다. 서류발급을 위해 대여했던 교과서도 반납하고, 이전 학교와 현재 다니는 학교 재학증명서, 성적증명서(생활기록부) 등을 발급받았다. 그렇게 모은 서류들을 2부씩 복사해 호치민총영사관으로 가서 공증받았다. 학교나 영사관에 가려면 차가 있어야 했는데, 일반 차량의 통행이 금지된 상황이라 물류 회사에 근무하는 지인 차량을 빌려 차량통행허가증을 만들어 들고 다녔다. 공안에게 걸리면 벌금을 물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다음날 공증된 서류를 찾으러 시내에 갈 때마다 공안한테 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코로나 상황이니 한국에서 사정을 봐주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들었지만, 한국에 가서 서류를 챙기기는 더 힘들 테니 챙길 수 있는 서류는 다 챙겨야 했다.
그리고 출국을 위해선 72시간 전에 PCR 검사를 해야 했다. PCR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고, 우여곡절 끝에 집에서 가까운 미국국제병원에 PCR 검사 예약을 했다. PCR 검사하면서 우는 아이들이 많다고 하길래, 병원에 가기 전 아이들에게 검사 안 받으면 한국 못 가니까 힘들어도 참으라고 얘기해 두었다. 대견하게도 아이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프기보다는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걱정했던 PCR 검사도 무사히 통과하고, 이제 짐만 무사히 패킹해서 내보내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파트 사무동에 확진자가 발생해 아파트가 봉쇄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삿짐이 못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다행히 최소 작업인원 2명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2명이 작업하는 만큼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봉쇄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우리 비행기는 밤 11시 50분이었지만, 호치민은 10시 이후에는 차가 다닐 수 없어서 우리는 리무진 서비스를 이용해 밤 9시에 도착했다. 텅텅 비어 있는 공항. 그래도 언제 어떻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페이스 실드에 라텍스 장갑까지 끼고 중무장을 했다. 에어컨도 틀지 않은 대기석에서 2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끈적끈적 땀이 흘러내리고,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았다. 이륙 직전에 비행기가 캔슬되거나 공항이 봉쇄되어 영원히 갇힐 것만 같았다. 다행히 출발시간이 되어가니 에어컨을 틀어주었고, 더위가 날아가니 불안감도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도 안 받아줘서 회항하면 어쩌나. 이쯤 되면 노이로제 수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공항에 도착해 줄을 서고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고, 줄 서고, 작성하고, 제출하고... 3명 서류를 혼자서 작성하려니 손이 저려왔다. 다행인지 평소라면 까불거리거나 쫑알쫑알 떠들던 아이들이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차분하게 움직였다. 공항을 빠져나오고 드디어 남편을 만났다. 2021년 7월,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호치민 대탈출의 터널을 그렇게 빠져나왔다.
현재까지 한국행을 결정했던 것이 아쉬움은 남지만, 잘한 결정인 것 같다. 우리가 호치민을 떠난 바로 다음 날부터 오후 6시 이후 통금이 생겼다. 특별한 이유 없이 밖으로 나온 사람들에겐 벌금이 부과되었다고 했다. 강아지 산책을 시키다 공안에게 걸려서 벌금을 300만 동을 냈다는 글도 커뮤니티에서 봤다. 도로를 가득 메웠던 오토바이가 도시는 낯설어졌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도시. 호치민은 그렇게 잠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