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기의와 공적 기표
언어는 한계가 있다. 이 문장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텍스트 밖으로 무한한 의미들이 존재하지만, 언어는 그것들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둘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한계로 텍스트 밖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철학자들의 관점은 주로 두 양상으로 나타났고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선언한 데리다가 최근에 이러한 관점을 드러낸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블랑쇼는 언어 밖의 무한한 곳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라캉도 이와 비슷하게 '우린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며,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고 그의 세미나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생활을 하면서 문법책을 쓸 정도로 언어를 자세하게 분석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논리철학논고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언어의 완벽성에 매료되었던 반면, 교사로서의 생활은 언어의 애매모호함을 포착하게 해준 중요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철학사 내에서도 끝없이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이며 인간을 이해할 때 언어는 필수적이다. 특히 언어는 개인의 생각을 나타냄과 동시에 공시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언어를 통해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언어는 발달한 것이지, 무인도에 홀로 남은 사람에게 언어는 필요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둘 이상의 사람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표현하고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구성요소로 기표와 기의를 정의한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글자와 읽는 방법은 기표이지만, 우리가 표현하고자 했던 본래 사물 혹은 이미지는 기의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기의는 기표에 선행하여 우리는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기호로 상대방에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린 기표와 기의의 특징을 유추해볼 수 있다. 기표는 타자와 내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호체계이기 때문에 규칙적이고, 객관적이다. 이에 반해 기의는 내가 떠오른 이미지이자 표현하고 싶은 바이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즉, 언어는 주관적 이미지를 객관적 기호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먼저, 언어는 사물에 대응한다. 그 사물은 내가 경험하고 기억하여 지시할 수 있는 사물이다. 인간은 경험하지 않은 사물에 대해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어느 파푸아뉴기니의 원시 부족에게 코카콜라 병에 관해 설명한다면, 우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병의 길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중 그 길이가 유사한 물건을 집어들 것이고, 그것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 돌덩이를 들어볼 것이며, 그것의 모양을 표현하기 위해 우아한 곡선을 가진 여인의 몸을 가리킬 것이다. (실제로 코카콜라 병은 펑퍼짐한 치마를 입은 여비서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끝없이 경험했던 콜라병은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에게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들이 경험했던 기억들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말했던 '내적 판단은 외적 기준을 근거로 한다.'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의는 그가 사적 언어를 부정하고 언어게임 이론을 주장했다는 배경이 있지만, 이런 배경을 다 치워놓아도 위와 같은 예시만 보더라도 충분히 도출해낼 수 있다. 이는 아무리 기의가 사적이더라도, 공적 기표로 치환되는 과정에선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고, 사적 언어를 부정하면서 사적 기표가 부정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언어는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슬프다, 기쁘다 등의 언어도 있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베르테르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도 모두 언어를 통해서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지만, 종종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자주 휩쓸리곤 한다. ‘나는 우울하다’라는 문장으로 지금의 기분이 설명되지 않는 것 같고. 미사여구를 추가해보아도 충족되지 않는 기표들이 무한하게 생산되는 경험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우린 이런 감정을 ‘답답함’, ‘무기력함’, ‘우울함’ 등의 단어로 언표하지만, 그것의 실제 감정과 기의를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는 우울하다’라고 말한다면 이 단어에서 그가 표현하고 싶은 기의를 추측해야 하지, 이 문장에 그의 모든 감정과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인간이 '탈주감'을 느낄 때, 이것은 탈주감이라는 단어에서 내가 느낀 감정 전부와 상황이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에서 비롯된다. 사실 '탈주감'이라는 단어는 내가 만든 단어이지만 이 단어를 처음 읽는 독자들은 ‘탈주(脫走)’라는 단어와 ‘감(感)’이라는 단어에서부터 그것의 의미를 대강 유추하고 자신이 느껴본 적 있었는지 기억에서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원초적 감정은 언제나 언어를 앞서있고 이것은 언어를 통해 공시되고 정리될 뿐이지 분명 감정은 언어에 선행하는 것 같다. 사적 기의는 공적 기표로 환원되기 이전에 한계지을 수 없는 양을 갖지만, 그것을 모두 기표에 포함할 순 없다. 즉, 기표를 벗어나는 기의가 존재하며 이는 언표할 수 없는 몸짓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몸짓을 데카르트적 사적 언어로 보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며 이미 자체적인 문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문법은 공적이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초에 감정을 느끼지만. 자신이 배운 언어를 통해 점차 개인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공적으로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에 통용되는 언어로 발전된 것은 아니다. 언어는 개인이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과 맥락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과’를 얘기할 때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이 이루어지면서 암묵적 규칙으로 의미가 정해진다고 보겠지만, 인간은 상당히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공용화한다. 예를 들어 서양의 배와 한국의 배는 품종이 다르기에 생김새와 맛이 다르다. 그래서 우린 서양의 배를 보지 않는 이상 서양에도 배가 있다고 듣기만 한다면, 그 배는 한국의 배와 유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서양인들과 배를 가지고 토론을 할 때 그것은 사과처럼 구형이다고 하면 외국인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상 서양의 배는 오뚝이 모양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의 기억에서 비롯된 차이에 의해 언어게임의 규칙은 계속해서 희미해져 갈 수밖에 없고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은 감정에서도 마찬가지고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를 부정할 때 이 부분에 주목했다. 내가 만약 내가 겪고 있는 치통을 '통치'라고 이름 붙이고 치과의사에게 '통치'라고 말한다면 그는 '통치'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치과의사를 찾아왔다는 점에서 내가 치통을 겪고 있다고 유추라도 가능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통치'라는 말을 내 안의 사적 문법을 통해서가 아닌 외적 준거, 즉 맥락에 따라 유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적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변은 상당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언어를 배우기 전에 형용할 수 없지만, 치통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이 아픔을 치과의사에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때 나는 아픈 곳을 가리키거나 신음하면서 최대한 그에게 알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우린 사적 언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적 몸짓은 존재함을 파악할 수 있다. 몸짓은 하나의 신호로써 누구나 자신의 원초적 감정과 고통을 표현할 수 있고 이것은 같은 인간이라면 파악될 수 있는 가벼운 신호이다. 이것은 점차 인간들 사이에서 공적으로 변하게 되고 그것이 체계가 잡히면 언어로 발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그것의 발원은 사적 기억이라서 완벽한 의미 전달은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도 인간은 자신의 유사한 기억을 상기하며 비슷한 맥락과 상황에서 일어났던 자신의 고통을 떠올리며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언어이고 사적 몸짓이 공시성을 가지며 공적 언어로 바뀌는 시점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인간의 표현력을 증대하고 사고를 명확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 단순 몸짓과 신호에서 체계를 가진 언어로 승화시켜 이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상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도 똑같은 기억을 갖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차이화된 기억 속에서 언어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비슷한 기억을 모두에게 떠올리게끔 작동한다는 것이며, 언어에서 완벽한 번역이 존재하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이 게임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다른 존재로서 다르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한계는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기표와 기의에 기억의 차이를 대입해보면, 기표는 객관적이고 기의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기의의 일치할 수 없는 차이는 각자가 사용하는 기표를 다르게 만든다. ‘나무’라는 단어를 보고 누군가는 지리산의 나무를, 누군가는 집 앞의 나무를 떠올릴 것이다. 즉, “나무”라는 기표는 공통적이지만 그것을 보고 떠올리는 기의에선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표와 기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다. A가 생각하는 나무와 B가 생각하는 나무와 C가 생각하는 나무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린 그들이 생각하는 그 이미지가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각자가 기억하는 나무들에서 ‘귀납적으로’ 기표를 도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겹쳐질 수 없는 기의의 차이에서 기표를 도출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수많은 기억 속에서 기표를 도출했기에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귀납’은 특수한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논리학의 방법이다. 이를 언어에 적용해본다면, 수많은 특수한 기의들에서 우린 그 기의들을 공통으로 지시할 수 있는 기표를 도출해내고 이 기표는 객관적이자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와 반대로 ‘나무’라는 기표에서 우린 각자의 기의를 “연역적으로” 도출해낼 수 있다. ‘연역’은 일반적인 전제로부터 특수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리학의 방법이다. 이를 다시 적용해본다면, 공적으로 사용되는 기표를 듣고 각자 주관적인 기의를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호랑이’라는 단어를 보고 누군가는 귀여운 호랑이 그림을 떠올릴 수 있지만, 누군가는 호랑이에게 물린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러한 기표의 귀납과 기의의 연역은 기표가 객관적인 규칙으로 합의되고 작동되기 때문이며, 기의는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의 겹칠 수 없는 고유성 때문이다. 하지만 기표에서 기의를 잘못 연역하거나 기의에서 기표를 잘못 귀납하면 이해하는데 혼란이 생기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인간은 형용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기표의 한계를 느낀다. 예를 들어, 왠지 오늘따라 마음이 뒤숭숭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 우리는 언어가 뜻하는 바를 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기표의 규칙은 작동하지 않으며, 언어는 탈주된 채 우리의 사적 몸짓 속에서 기의의 형태로만 맴돌게 된다. 이와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어린아이가 책을 읽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된다. 그는 아직 언어에 능숙하지 않지만, 단어를 읽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글자만을 읽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책에서 의미하는 바를 머릿속에 그려내지 못하며 이해할 수 없는 채 단순히 음독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때 우리 머릿속에는 아무런 이미지도 연상되지 않으며, 발성 기관에서 소리 내는 것으로 우리 구강에서 기표가 맴돌게 된다. 그러므로 기표 없는 기의는 공허하지만, 기의 없는 기표는 맹목적이다.
하지만 문학에선 공적으로 사용되는 기표를 사적 규칙에 따라 자의적으로 사용한다.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기표를 보았을 때, 누구나 책상에 앉아 음식을 차려놓고 밥을 먹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이는 ‘밥’과 ‘먹는다’ 사이의 규칙이 성립되며, ‘밥’과 ‘눕는다’라는 단어 사이에는 규칙이 적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학에선 이런 공적 기표가 사적 기표로 바뀌어 자의적으로 의미를 창조해낸다. 이상의 『날개』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여기서 “박제”와 “천재”는 일상언어에서 사용되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박제는 사체를 방부 처리하여 썩지 않고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뜻하고, 천재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상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는 단어를 자의적으로 결합한 순간부터 위의 기표에서 일상적인 맥락으로 이상의 기의를 연역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린 이상이 사용한 문학적 표현과 장치를 그의 작품과 문학관 속에서 해석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표는 우리의 공적 기표 내에서 해석될 수 없는 고유한 기표로서 그의 작품에 의해 기의를 연역해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학은 해석과 독해의 문제를 언제나 안고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들조차 이런 바탕에서 그를 독해할 수밖에 없는데 외국인들이 섬세한 뉘앙스를 살려서 이상의 소설을 읽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언제나 문학은 기표의 탈주를 일으키며, 해석의 문제와 번역의 불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공적 기표는 규칙에 따라 합의되었지만, 문학가의 자의적 사용과 사적 기표로 그의 작품관 내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기의는 언제나 주관적이지 객관적일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기의는 기억의 차이이기 때문에, 각자가 다르게 기억한다면 기의를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여기서 존재의 차이에서 비롯된 기억의 차이와,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된 기의의 차이를 지적하고자 한다. 연장하는 사물은 항상 어떠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 공간엔 다른 물체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연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 개의 복숭아를 양손에 들고 서로를 향해 맞대고 눌러보면 지금까지의 논의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복숭아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엔 다른 복숭아의 존재가 침투할 수 없다. 두 복숭아는 서로가 만나는 "경계"에서 각자의 존재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다. 이 경계야말로 존재의 한계이며 연장성의 끝이다. 경계에선 각자의 연장성은 공존하지 못하고 으깨지며 경계를 기준으로 주변으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저항이 시작된다. 이것이 각 물체가 연장할 때 특정 공간을 고유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존재의 고유한 공간이다. 이처럼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연장성을 고유한 공간에서 점유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그것의 파괴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론적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키가 같은 두 사람이 책상 위에 놓은 사과를 같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같은 높이, 같은 위치에서 사과를 바라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연장성이 배제될 수밖에 없다. 즉, 누군가가 이미 있는 자리에서 볼 수 없으므로 서로 다른 존재라면 서로 다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키가 작은 사람과 키가 큰 사람이 있고 키가 작은 사람이 키가 큰 사람 앞에서 사과를 바라보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때도 키라는 위치의 차이 때문에 키가 작은 사람은 사과의 몸통 부분을 자세히 볼 수 있겠지만 키가 큰 사람은 꼭지 부분을 자세히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은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이고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은 다르게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모든 것을 똑같이 경험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같은 환경을 조성하고 존재자의 환경을 모두 같게 하더라도 존재자의 차이는 극복될 수 없으며, 이 세계엔 같게 누적된 경험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존재의 차이는 기억의 차이를 발생하고, 이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내서 기의에 주관성을 부여한다.
기의가 주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에 기의를 기표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타자와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같은 사과를 경험하더라도 서로 다르게 볼 수밖에 없기에 이런 기억의 차이는 해소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린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선 끝없는 타자와의 소통이 역설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내가 상대방의 위치에서 경험할 수 없기에, 상대방이 말해준 기표를 듣고 기의를 최대한 연역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본래 상대방이 내가 될 수 없고, 내가 상대방이 될 수 없기에, 이런 노력 끝에서 최후의 일치할 수 없는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간극을 한없이 줄여나감으로써 타자와의 소통필요성을 끝없이 열어두어야 하고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의 본질은 우리에겐 타자가 필요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즉, 언어란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기표를 넘어 기의를 이해하는 것이고, 기의를 넘어 기표를 공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