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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서 May 25. 2023

[탈존과 세계] (23. 5. 25 수정)

밖에 서있는 몸

몸과 세계

세계에서 몸은 하나의 사건이다. 우리의 몸은 만들어지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라 질료들의 마주침으로 만들어지며, 만들어진 후에도 쉽게 흩어지고, 재배열되고, 다시 뭉치기도 하는 생성의 사건이다. 모든 존재의 바탕은 세계이며, 존재는 세계의 하나의 사건이기에 절대성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시야에 갇혀있기 때문에, 절대적 자아를 확신한다. 주체는 자기만의 방이다. 세계 속에 자기만의 방을 구축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한다. 자기만의 방에선 모든 물건의 배치가 자신의 의도로 되어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주체의 계획 아래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금–여기 있는 ‘나’는 세계에 서있다. 주체는 자기만의 방을 구축하지만, 세계는 자기만의 방의 바깥으로 언제나 주체의 영역을 침범한다. 세계를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만들 수 있는 자는 곧 세계창조자(demiurgos)다. 사건은 사물이 아니기에, 고정되지 않으며 끝없이 생성되고 흘러간다. 몸은 사건으로써 세계 내에서 탈존하기에 끝없이 균열하고 생성하는 자기 극복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줄광대와 같다. 경계라는 외줄 위에서 율동을 멈출 수 없다. 시야는 외부로 향하지만 생각은 내부로 향한다. 그래서 언제나 몸은 객체와 주체의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세계와 사건

그렇다면 세계와 몸은 어떤 식으로 관계 맺는가? 세계는 자기만의 방의 바깥이기 때문에, 주체는 방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즉, 세계의 개입은 주체에게 예상할 수 없게 우발적으로 벌어지며 타자와의 마주침은 우리에게 세계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내가 길을 가다가 벽돌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하필 그때, 그 장소에서, 그렇게 죽을지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분명 벽돌은 자기만의 방에 떨어졌고, 주체는 벽돌과의 마주침으로 사망하였다. 많은 사람은 이런 사건을 보고, 우연 혹은 필연이라고 단언한다. 기가 막힌 사건이라 신의 계획 같기도 하고, 우연의 중첩으로 벌어진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벽돌은 그 주체에게만 특별하다는 점이다. 그 벽돌이 그 주체에게 특별한 이유는 ‘사망’이라는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세계 내에서 마주침은 끊임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특별해지는 이유는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건의 발생빈도에 따라 확률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몇 분의 1 확률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분모가 커지더라도, 경우의 수가 수억, 수천 만이라고 해도, 분자는 무조건 1이다. 사건은 분자에서 벌어지지, 분모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분모는 사건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 자체이다. 우린 여러 경우를 생각하며 분모를 늘리려 한다. 이 사건은 이렇게 큰 분모에서 비롯됐으니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분자는 1이다. 사건은 주체에게 벌어질 뿐이지, 확률론은 가상에 불과하다. 세계는 주체에게 사건으로써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사건은 주체가 자신이 세계와 접해있음을 드러낸다. 세계는 몸에게 사건으로 다가간다.

사건과 의미

사건은 주체에게 특별하다. 즉, 주체는 사건을 의미로 이해한다. 사건이 사건인 것은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일상 속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건을 인식하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대부분 일상에 묻혀 산다. 일상은 단순함의 대지와 같다. 위도상 같은 힘을 갖는 순간들이 모여 일상이라는 평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사건은 꿈틀거리고, 일상의 대지를 융기시킨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밥 먹을 때 왼손으로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몇 초에 한 번씩 눈을 깜빡이는가? 나는 움직일 때 오른발과 왼발 중 어느 쪽을 먼저 내딛는가? 일상의 늪에서 의미는 평평하게 다져진다. 이것들을 의식하면 할수록, 비일상적인 일이 되고, 평소에 의식하지도 못했던 행동들이 어색해지고 불편하게 느껴지게 된다. 일상의 사건화는 우리에게 눈엣가시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의 집중도를 효율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단순반복운동을 맹목적으로 하고, 오직 의식에 포착되는 사건만 처리한다. 주체는 일상 중 일부에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는 주체의 산물이지, 의미는 세계에 아프리오리하게 있지 않다. 날아오는 벽돌이 나에게 특별한 건 그것이 나에게 날아온다는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이 날 죽인다는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에, ‘나’로부터 의미를 갖는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에겐 내가 맞아 죽는 그 벽돌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을 것이다.

포착과 흐름

결국, 세계는 주체의 포착을 통해, 사건으로써 드러난다. 내 주변시에서 보이는 물체는 내가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특별하지, 그것 자체의 존재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주체는 한정된 시야를 갖기 때문에 세계의 변화 중에 일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사건–의미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버린다. 고흐의 방을 그린 미술 작품을 생각해 보자. 고흐의 방엔 침대도 있고, 탁자도 있다. 그렇다면, 방바닥에 있는 판자의 개수는 몇 개인가? 그림을 처음 본 사람에게 이 질문은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의 눈에 포착된 건 침대와 탁자뿐이다. 주체가 포착하지 않는 곳에선 의미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또 다른 작품으로 칸단스키의 것을 보자. 여러 기하학적 도형들과 여러 색채가 혼합을 이루고 있다. 각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사각형이 보이고, 선이 보인다. 이것들의 관계는 우리에게 어떻게 들어오는가? 추상미술작품을 볼 때, 우린 먼저 그곳을 중심으로 파악할만한 중심을 갖추고, 그것을 기준으로 주변으로 퍼져나가듯이 그림을 본다. 그저 한 곳만 찍으면 된다. 그 한 곳은 주체에게 포착되어 그림의 평면에서 도드라진다. 사건–의미는 주체의 시야에 도드라진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세계 내에서 존재한다. 나의 모든 포착도 결국 세계라는 도화지 내부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세계는 사건이 되기 이전, 사건이 될만한 잠재적인 바탕이다. 그것은 사건의 연속으로써 하나의 흐름이고, 끝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면서 세상은 그저 흐른다. 절대적으로 멈춰있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주체는 포착하고, 그것으로 의미를 구축해 나간다.

우연과 필연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우연과 필연은 무엇인가? 내가 길을 걷다가 1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다면, 그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결론적으로 우연은 포착이고, 필연은 흐름이다. 내가 그 길을 걸은 것도, 그이가 그 길을 걸은 것도 세계 속 하나의 사건들이다. 내가 평소에 걷던 그 길에서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세계의 흐름 중 하나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필연은 자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내가 걷던 그 길은 친구와의 재회라는 사건으로부터 다시 의미를 얻는다. 내가 걷던 그 길, 친구를 마주친 그 시간.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조화된다. 그렇게 나는 1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포착했다. 나는 이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 이후로 모든 것에 의미가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필연은 하나의 숙명처럼 여겨졌다.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법칙으로 간주되기도 했고, 하나님이 선고한 운명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세계는 사건–잠재태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고, 그것은 결국 주체로부터 사건을 일으킨다.


탈존과 운명애

한국에서 제일 남용되고 있는 명언이 있다.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이 말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내가 벽돌에 맞아 죽는 상황 속에서 나를 죽인 벽돌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죽는 나의 삶에 후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운명을 사랑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맥락에서 운명, 즉 사건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하나의 윤리적 어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건의 연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세계에서 탈존한다. 내가 어떤 곳에서 죽을지, 어떤 식으로 태어날지, 누군가를 어떻게 만날지는 그 사건을 우리가 몸소 맞닥뜨리기 전까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도 결국 사건들의 연속인 것이고,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건 삶 속에 녹아든 잠재적 사건들조차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삶을 긍정해야 하는가? 왜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긍정해야 하는가?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이 둘은 각각 사건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반대되는 것이 아닌 함께 가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위의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왜 죽음을 긍정해야 하는가? 우린 죽음을 긍정하는 사람들에게서 경외감을 느낀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 그에게 죽음의 공포는 없었을까?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죽음은 그에게 일생의 삶을 긍정해 준다. 그가 죽음을 긍정하고 불 속에 뛰어든 건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 내가 살아간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죽음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은 태어남을 긍정할 수 있다. 죽음과 태어남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사람은 내가 죽는다는 사실도 긍정할 수 있다. 이것이 몸의 긍정으로서의 탈존이다. 몸은 살아있음으로 그 태어남과 죽음을 긍정한다. 그러므로 몸은 ‘삶’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한다. 이것이 곧 살아감을 통해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삶을 긍정하는 것은 삶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태어남과 죽음조차 긍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살아간다는 것이며, 몸이 세계에서 탈존한다는 의미이다. 탈존자는 세계와 맞닥뜨리는 방식인 사건들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벽돌이 나에게 날아와 죽는다는 사건을 긍정할 수 있으며, 벽돌이라는 타자의 존재조차 긍정할 수 있게 해 준다. 나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 돌이 벽돌이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지, 그 벽돌이 곤약젤리었으면 내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죽었냐 죽지 않았냐는 사후적인 맥락이지 결국 그 존재마저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삶은 살아감으로 긍정된다.


태어남의 문제

위의 질문과 더불어 우리를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는 질문이 있다. 우린 왜 태어났는가? 이 질문은 앞의 질문과는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그것은 삶의 최초원인을 요구한다. 날 태어나게 하는 원인작동자를 요청하는 질문이다. 이는 자연을 필연으로 바뀌게 하는 대답을 요구한다. 세계가 자연성을 가지는 것은 어떤 사건이든 벌어지게 되는 사건들의 잠재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태어남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세계의 흐름을 짜 맞춰내기 시작하면, 이미 나의 탄생이라는 결론이 고정된 채 모든 것이 필연이라는 강제 속에 고정되어 버린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이고, 나의 몸이 필연적으로 태어남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을 도출해 낸다. 결국 탈존하던 몸은 태어남이라는 영역 안에 고정된다. 하지만, 탈존하는 몸에게 탄생은 사건에 불과하지 그것은 몸의 본질이 아니다. ‘몸’은 그 자체가 균열이자 벗어남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탈존한다. 결국, 태어남의 원인을 묻는 물음, 즉 무한소급의 물음은 절대자를 요청하는 물음이 되어버린다.

탈존과 무의미

하지만, 사건 – 의미가 인간을 구원해주진 않는다. 우린 ‘몸’으로 탈존하긴 하지만, ‘몸’도 결국 세계와 관련지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의미는 포착을 통해 밝혀지지만, 의미 이전엔 세계가 있다. 세계라는 바탕에 살아가는 탈존이기에 기본적으로 무의미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 무의미는 비관적 허무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의미가 형성되기 이전, ‘몸’을 담고 있는 세계의 자연성을 의미한다.) ‘몸’은 규정밖에 서있기 때문에, 분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사건에 따라 의미가 중첩되는 하나의 장이지, 절대적으로 의미가 고정되어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포착한다. 포착은 무언가를 잡으려는 몸짓, 발버둥이다. 세계의 흐름 속에서 사건을 붙잡으려 하고, 두드러지는 지반을 손아귀에 쥐려는 애절함이다. 인간은 단순히 세계의 흐름에 맡겨서 살아가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붙잡으려 한다. 인간은 의미를 유희한다. 그들은 의미없음보단 의미없앰에 더 예민하다. 누군가 인간의 존재는 본래 무의미하다고만 주장하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행한 무례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인간 자체의 의미를 붕괴시키면서 천상에서의 의미를 주장하면 사람들은 혹한다. 지금 내 삶에서 비롯된 의미보다 다른 층위의 의미체계가 구축되면, 그것에 시선이 빼앗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포착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만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인간의 무의미는 인간의 모든 의미 체계를 붕괴시키고, 무의미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의미없음에서 탄생하였고, 비로소 거기에서부터 의미가 성립된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가는 탈존임을 증명한다. ‘몸’은 세계와 맞닿아있어서 무의미하지만, 포착을 통해 의미 있는 탈존이 된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자살은 왜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살은 삶에 대한 부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이다. 삶을 부정하는 사람은 태어남도 부정하고 그것은 죽음도 부정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태어남에서 분리하여 태어남으로부터 벗어남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살한다. 그들에게 삶은 부정의 대상이자 살아감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 하지만 과연 죽음이 태어남의 반대일까? 죽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삶으로부터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은 삶과 연관되기에 비로소 죽음이 될 수 있다. 태어나서 살아가기 때문에 죽을 수 있다. 죽음은 하나의 마침표이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는 엔터키가 아니다. 나의 삶은 태어남이라는 들여 쓰기로 시작해 이 ‘몸’을 통해 쓰이면서 죽음이라는 마침표로 끝나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는 무의미하다. 죽음은 태어남과 삶으로부터 포착되기 때문에 의미를 얻지만, 죽음 이후는 세계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의미는 없어진다. 자살은 언뜻 보기에 무의미로 뛰어드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자살로써 다다르는 무의미는 세계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고, 의미로부터 탈주이다. 자살의 단초는 태어남의 다음 과정은 삶이지만, 죽음의 다음 과정은 피안 혹은 안식처라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죽음이 안식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삶은 부정해야 할 대상이며, 삶 속에서 오는 고통은 죄와도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의 기반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죽음을 오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주의이다.

삶은 사건–의미의 연속이다. 내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내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나에게 의미로써 다가온다. 이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하지만 자살은 이런 의미–사건들로부터 탈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 이후가 무의미로의 회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죽음조차 결국 그에겐 사건이다. 결국 죽음조차 하나의 의미인데, 죽음으로써 무의미로 돌아간다는 건 모순이다. 죽음이 의미라는 건 무슨 말일까? 자살한 사람들의 마침표는 항상 자살이라는 키워드로 인생이 평가된다. 자살은 그들의 삶을 왜곡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살한다. 죽음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의미를 지니지만, 그들 자신은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정해버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통해 자살을 사건화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겐 자살이 인생의 하단원을 마무리해 줄 마침표가 되는 것이다. 불의에 저항하며 분신자살하는 사람들은 삶을 내다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삶을 사랑했기에 불의에 저항하고, 몸에 불을 질렀다. 그들에게 자살은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긍정이고 의미를 산출하는 행동이다.

플라톤은 몸을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을 가두고 있기에 감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감옥은 경계가 정해져 있고, 하나의 영역이다. 머물러있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을 어지럽히겠는가? 오히려 몸은 영혼의 파도이다. 그것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흐름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규정에서 벗어나 서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에 플라톤에 따르면 의견(doxa)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플라톤은 몸에 정반대의 견해를 부여하게 된 것인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때문이다. 앎에 절대적 선을 부여하게 되면서 그것이 몸에 갇혀있게 된 것으로써 죄를 짓고 있는 상태로 표현했다. 모든 탈존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플라톤의 도덕주의는 영혼불멸과 철학자의 죽음추구까지 이어지게 된다. 몸은 감정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하기 때문에 상황마다 도덕규범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절대적 도덕을 추구했던 플라톤에게 이는 모든 악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을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당당하지 못하고 검열한다. 내가 오늘 하루도 준칙에 맞게 잘 행동하였는지, 일상의 모든 사건들을 분해하고 하나하나 보편율이라는 퍼즐판에 퍼즐조각을 끼워보듯이 맞춰버린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는 자신의 ‘몸’에 있지 않고 보편율에 있다. 거기에 얼마나 맞냐에 따라 삶의 의미가 양적환산된다. 모든 일상을 포착하려 하기 때문에, 태어남은 그들에게 고통이자 부정이 된다. 의미를 자신의 포착에서 산출해내지 않고 세계 전체로써 산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한계 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절망한다. 이미 태도 자체가 의미산출이 아닌 의미탈주이다.

 

있음과 탈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다.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있음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려왔다. 인간은 에덴동산으로부터의 탈존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려는 욕구,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욕구, 땅으로의 추락 욕구가 있다. 땅으로의 추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탈존이자 인간의 시원이다. 그러므로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탈존할 수밖에 없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아담과 하와는 흙이 된다. 흙으로부터 생겨나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땅으로부터 생겨나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  세상으로부터 생겨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존재. 인간은 추락받았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과 언어] (21.11.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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