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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서 May 31. 2023

[탈존과 세계] (23.6. 2. 수정)

흐름으로써의 세계

세계는 유동(flux)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흐르면서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는 운동이다. 세계의 끝없는 운동 속에 ‘몸’이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무엇으로 고정되지 않으며, 흐름으로써 작용한다. 흐름이라는 작용은 무언가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언가로 굳어지거나 정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흐름은 다양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며,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이상하지 않게 되고, 이는 특정한 무언가가 아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러한 힘은 세계가 흐르고 있다는 것, 그 흐른다는 작용 자체가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독립적인 형이상의 공간이 아니라 배경으로써 마주침의 총체이며, 이는 흐름이다. 흐름으로서의 세계는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질서이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매 순간이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그 자체이다. 세계라는 운동은 자신이 질서이고, 흐르는 힘이 펼쳐진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엔 창이 없다. 창이 없기 때문에, 모나드 사이엔 신의 예정조화가 필요해진다.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창 닫힌 단자 그 자체는 독립적 존재이며, 그 자체이다. 그것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거짓이며, 모든 것은 신의 예정조화에 의해 최선의 세계로 창조되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창조성은 초월자의 창조성으로 대치된다. 그것은 세계창조자에 의해 질서 지어질 수밖에 없다.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질서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세계 속 모든 사건은 신에게 부여받은 질서에 의해 발생된 것일 뿐, 자생적인 가치는 없다. 고도의 필연은 빈틈없는 우연과 다를 바가 없다.

세계의 흐름은 우리에게 시간으로 느껴진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시계 속에 있는가? 시계는 시간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이지, 시간 자체를 표현하지 않는다. 시간은 초침이 움직이는 매 순간의 바탕인 세계에서 비롯되지, 초침의 순간적인 분절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즉, 시계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시계침의 속도를 나타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시간은 초침의 운동이자 흐름이며, 그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느껴지는 속도감이다. 시간은 느껴지지, 계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계의 흐름을 우린 시간으로 느끼며, 세계는 시간성을 가진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시간성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아이온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신에 의해 질서 지어진, 불변의 방향성이다. 하지만 시간은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물이 한 가지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에 시간이 방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의 흐름은 방향성이 아닌 파동성을 지닌다. 파동은 울림에서부터 퍼져나가기 때문에, 모든 방향으로 발산되는 흐름의 힘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크로노스적 방향성이 아니라 아이온의 그 자체로 무한한 파동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세계가 흐른다는 작용으로써 추동하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세계는 기본적으로 시간성을 지니지만, 이 흐름의 힘은 우리에게 보일 땐 모든 곳에서 같지 않다. 후술 하겠지만, 우린 있음을 자리로 보고, 그것을 하나의 위치로 포착한다. 시계 초침을 각 숫자에 고정시켜서 시간을 읽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자리를 위치로 고정한다. 그러므로 그 위치에 있는 대상이 가지는 시간성을 속도로 체감한다. 세계의 흐름을 특정 자리에 놓고, 그 사이의 운동을 계산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계산된 시간으로 변환되어 우리는 그것들을 다르게 생각한다. 즉, 시계에서의 1초가 우리 마음속에서의 1초와 다른 이유는 시계 위의 초침에서 시간이 계산되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시간은 시계에서의 1초로 변환되지만, 우리에게 1초는 내 ‘몸’에서 느껴지는 세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나만의 속도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위치에 따른 속도의 차이는 우리가 볼 땐, 세계의 흐름이 멈추거나 정체되어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 때문에, 하나의 공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은 세계의 힘을 발현하는 시간으로써 느껴지는 흐름의 관점에서 하나이다.

한 방향으로 흐르던 물도 거대한 바위를 만나면 물길이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 다른 흐름이 만나 거대한 흐름을 만들기도 하며, 그것이 서로 상쇄되어 잔잔해지기도 한다. 이는 있음과 같다. 있는 것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물길은 둘로 나뉘게 되고 이 흐름들은 방향을 달리하며 또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낸다. 있음의 자리는 그릇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정처 없이 흐르기만 한다. 그릇은 물을 가둬두고 흐르지 못하게 한다. 물조차 흐르지 못하게 막는 하나의 자리차지는 있는 것의 존재성이다. 정처 없이 흐르기만 하는 물을 폭포로 만들기도 하고, 계곡으로 만들기도 하고, 삼각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은 높이 차이를 빗어내는 있음의 존재성이다. 그렇다면 있음은 흐르지 않는 것인가? 있음은 세계로부터 독립된 것인가? 물을 가로막고 있는 있음도 물의 힘이 더욱 거세지면 결국 힘없이 무너져, 흐름에 동조하게 된다. 그리고 있는 것들의 자리는 원래부터 그것이 그곳에 있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존재가 만들어지는 곳은 세계의 흐름이 그 자리에선 속도가 느려지면서 하나로 뭉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음의 존재성은 절대공간이 아니라 사건의 발현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속 흐름들의 충돌이자,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없는 공간은 진정으로 비어 있는 곳이 아니다. 무언가가 비어있는 것은 필연적 법칙으로 비롯된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음이 부재한다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 자리가 절대적으로 비어져있어서 채워질 수 없는 곳은 아니다. 그곳은 세계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절대’무’로 생각되는 공백이 아니다. 그곳에도 세계의 흐름은 존재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다양한 마주침 속에서 자리가 마련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우리에게 세계를 드러낸다. 세계는 흐름이지만 우리에겐 사건의 총체로 드러난다. 우리의 몸도 만들어지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정체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언제든 분해될 수도 있고, 다시 모일 수도 있는 세계 속 하나의 흐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야를 갖기 때문에, 세계를 관점으로 본다. 즉, 세계는 우리의 시야로 인해 평면으로 이해된다. 세계가 평면으로 이해된다는 건, 세계가 우리의 포착으로 인해 평면으로 굳어진다는 것이다. 우린 세계를 유동 자체로 이해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점에서 세계는 한계를 가지며, 그 관점은 세계를 고정시키고 하나의 평면으로 고정시킨다. 따라서, 우린 세계를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고, 그 입장이라는 건 우리의 시야와 함께 가며, ‘몸’은 세계에선 하나의 사건이자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탈존–평면이 된다. 그러므로 세계의 흐름은 우리의 포착에 의해 자리를 획득하게 되고, 우리는 있는 것을 자리로써 포착하고, 그곳에 고정한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있다는 건 포착에 의해 우리에게 고정당함으로써 그곳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실제론 세계의 흐름에 따라 이해되어야 할 뿐이다. 그러므로 내 앞에 있는 컵은 나에게만 앞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세계의 입장에선 나나 컵이나 흐름 속에 있을 뿐이다. 컵의 있음은 나로부터 비롯된 나에게만 사건이다. 사건은 내가 포착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우리 ‘몸’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몸’을 통해 각자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으로 자신만의 평면을 가지게 된다. 하나의 사과를 다 같이 볼 때, 우린 결코 똑같은 위치에서 사과를 바라볼 수 없다.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사과를 보면, 내가 타자와 겹쳐지지 않는 이상 결코 같은 곳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으로 이 자리에 서있다는 건, 무조건 타자와 다르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는 다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타자와 같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각자의 관점은 같은 탈존의 다른 형태로 형성된 평면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평면 사이엔 수직적 구조는 형성될 수 없다.

‘몸’은 세계를 이해한 방식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 타자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몸’이 마주치는 대상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타자와의 마주침은 다시 사건으로 우리에게 이해되며, 이 사건으로 타자를 파악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갑자기 날아든 물체를 피하지 못한 채 맞았다면, 우린 그 물체를 결코 파악하지 못한 채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린 맞는다는 사건으로 타자를 이해하면서 그것을 딱딱한 무언가라고 파악한다. 여기서 나와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딱딱함이 드러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물체가 본질적으로 딱딱한지는 나와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엔 결코 확정되지 않는다. 그 물체의 딱딱함은 나와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타자의 사건이다. 타자의 입장에선 나의 ‘몸’은 내가 그것을 딱딱하다고 이해하는 것과는 반대로 물렁한 무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물렁하다는 것과 타자가 딱딱하다는 것은 사건으로부터 이해되며, 타자의 딱딱함은 나와의 마주침으로 비롯된 것이지 그것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잠재적인 흐름으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가, 그것은 사건으로써 현실화된다. 세계는 사건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고, 그것은 마주침으로 비롯되어 우리의 ’몸‘과 타자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몸은 세계의 흐름 속에 유영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간으로 느껴지고, 무언가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세계의 흐름은 개체 속에선 각자의 리듬 속에서 변주하기 때문에, ‘몸’들은 각자만의 속도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시간이 시계의 속도로 치환되는 과정은 우리가 시간을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고, 시계가 60마디로 이루어진 것처럼 분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계는 흐르기 때문에 정지할 수 없으며, 어느 지점으로 분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운동과 시간은 분할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흐른다. ‘몸’은 세계의 흐름을 각자 속에서 느끼기 때문에, 우린 각자 다르게 시간을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매순간 느껴지는 세계는 단편적이거나 순간의 중첩일 수 없다. 세계를 순간으로 치환하는 것도, 우리에게 느껴지는 시간과 운동을 최소 단위를 가정함으로써 분할하는 것이고, 그 순간 자체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순간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순간은 지칭하려는 순간조차 그 순간이 아니게 되어버리고, T1이라는 순간과 T2이라는 순간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조차 무색해져 버린다. 이러한 시간의 연속성은 세계와 ‘몸‘이 연관되는 방식에 관여한다. 세계의 흐름에 대한 ’몸‘의 느낌은 감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순간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고, 계속되는 변화 속에서 느낌으로써 강렬도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감정은 세계에 대한 몸의 느낌이고, 그것은 ’몸‘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느껴진다. 우리가 화가 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화가 나는 감정은 분노의 순간들이 모여서 감정을 형성하지 않고, 분노의 감정이 강하게 우리 몸에 느껴지게 되고 그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우리에게 연속되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흐름은 일정한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강제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우리가 화가 나면 계속해서 화가 나는 감정이 들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느껴지는 방식은 세계와의 접촉 속에서 연속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요동치게 된다. 즉, 세계가 변화하는 것에 따라 ’몸‘도 그에 맞게 변화를 느끼게 되며 이것은 감정이 결코 양적으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반복되는 일을 하더라도 처음 했을 때와 그 다음에 했을 때 느낌이 달라지게 된다. 이전에 했다는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 기억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느껴질 수 있어도 그 일에서 비롯된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기억이 아니라 그 일을 하고 있는 세계와의 접촉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은 ’몸‘이 시간의 연속에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의 감정은 특히 사건과 마주할 때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사건을 포착하지 않고 세계의 흐름을 느꼈을 땐 강렬도가 낮고 정적이지만, 사건이 감정을 폭발시킨다. 매일 보는 친구의 얼굴에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느 날 유독 눈에 띈 쌍꺼풀에 매력이 느껴지곤 한다. 요컨대, 세계를 포착하면서 사건을 발생시키고, 그 사건은 우리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반대로 세계는 눈을 통해 우리에게 펼쳐진다. 인간의 오감 중에 가장 강렬한 감각은 시각일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지 않는 이상, 세계는 멈추지 않고 우리의 뇌를 자극한다. 그래서 플라톤이idein(보다)에서 비롯된 eidos(모습)를 형상(idea)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어떤 하나를 다른 대상과 비교했을 때, 어떻게 보이냐에 따라 유와 종이 나뉘어지고, 이것은 그 대상의 모양새(eidos)에 따라 본질을 밝히는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시각은 모든 것을 보면서 볼 수 없다. 우리의 뇌엔 시야 전체가 인상으로 박히지만, 정작 그것을 상기해보면 기억하는 부분은 몇 없다. 앞에서 언급한 고흐의 방을 생각해보자. 고흐의 방이 캔버스 크기로 우리 눈 앞에 전부 펼쳐지더라도, 창문 너머에 무슨 나무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인상으로 어렴풋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포착되기 전까지 그것은 세계의 잠재성과 유사하게 우리에게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 더욱 자세하게 얘기해보자면. 우리의 시야는 중심시와 주변시로 나뉘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일단 중심시는 포착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며 세계를 사건화한다. 반면, 주변시는 중심시와 성격이 다르다. 주변시는 보이지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중심시를 통해 보지만, 주변시를 통해선 보인다. 주변시는 중심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으로 우리의 시야 전체를 담당한다. 그것은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포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의미를 산출하는 것은 중심시이지만, 의미가 잠재되어 있는 곳은 주변시이자 곧 세계이다. 여기서 중심시과 주변시가 나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와 마주하기 때문에, 시야에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시야는 세계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특정한 관점을 갖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보는건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가 직접 고개를 돌려한다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바라보게 된다. 세계를 전부 볼 수 없기 때문에, 특정한 시야 내에서 봐야할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기억의 방식과 유사하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다가 상기하려고 하면 뚜렷하게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시각적 인상은 시야를 전부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들을 우린 모두 인식하거나 모두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고흐의 방을 전부 본 상태에서 특정한 곳에 집중하면 비로소 그곳에 빛이 드는 것처럼, 시각자료를 잠재적으로 저장해놨다가 상기를 위해 집중을 가하면 생각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과 기억의 관계는 주변시와 중심시의 관계와 동일하다. 보는 대로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포착하기 이전에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상기를 통해 특정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포착을 통해 세계 속에서 의미를 구축한다. 우리의 기억은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가 상기를 통해 ‘지금‘ 머릿 속에 연상되는 것처럼, 사건은 세계에 잠재되어 있다가 포착을 통해 ‘지금’ 나에게 의미를 갖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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