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 by 존 에버렛 밀레이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ais (영국, 1829-1896)
미술 사조 : 영국 라파엘 전파
1851-1852년, 캔버스에 오일,
76.2cm X 111.8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미쳐 자신의 죽음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강물에 빠져서도 꽃을 쥐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오필리아! 남들에게 보여 주기식의 행복이 아닌, 나다운 행복을 위해서라며 기어코 낸 내 용기가 왠지 무모는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에 혼란스러웠다. 앞으로 다가올 고통도 모르고 나이브한 단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그림 속 오필리아처럼 미친 거라면... 나는 내가 끝까지 이 현실을 왜곡하길 바랬다.
가을이 한껏 무르익었던 어느 날, 네이버에서 본 물건을 확인한 뒤 부동산 사장님의 차가 어느 집 앞에 멈춰 선다. 내가 찾는 꼭 그런 집이 있다고 한 톤 더 높아진 더욱 낭랑해진 목소리로, 그 기대감에 절대 배반하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함의를 지닌 표정과 음색으로. 아, 이 집인가...? 내가 찾던 집이? 내게 꼭 맞는 집이?
배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딱 이 집이야!'라는 인상은 결코 들지 않았다. 아마도 마당이 없기 때문에 더 그랬을 거다. 심지어 대문 비스므리한 것도 없어 한껏 남루해 보이는 집. 어렴풋한 기억을 한참이나 거슬러, 유년 시절 골목 어귀 피아노 교습소가 떠오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때의 모든 상황을 돌이켜 보면 나는 이 집에 설득당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게는 그런 시절이었다. 적지 않은 과년한 나이였지만 혼자 이 모든 걸 선택하고 감당하기가 힘에 부쳐 사실은 한껏 움츠려 있었던 그런 시절, 크게 실수를 하는 건 아닐까... 정말 그런 걸까 봐 겁이 나서 자꾸만 그 생각을 묻어두고 외면하려 했다. 에잇 그냥 확 아무 집이나 선택해 버리자!
레에르테스 : 그럼 익사했다는 건가요? 아, 어디서요?
거트루드 왕비 : 강둑에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유리 같이 투명한 강물 위로는 하얀 잎사귀가 떠다니고 있었어요. 그녀는 까마귀꽃, 쐐기풀, 데이지, 긴 보라색 야생화로 아름다운 화관을 만드는 중이었죠. 그때 물아래로 신비롭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하나가 그녀를 매혹했습니다. 그 가지를 꺾어 화관을 더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어 졌죠. 그렇게 나무를 오르다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만... 손에 꼭 쥔 야생화 꽃들과 함께 강물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익사! 익사!
꽃들은 여기저기 흩뿌려졌고 넓게 퍼진 그녀의 드레스가 물 위로 만개한 듯 부풀어 올라 한 동안 그녀를 안온하게 감싸 안았다. 물속에서 막 피어난 한 송이 은빛 수련처럼 차가운 죽음의 강물을 흘려가며 그녀의 노래가 가녀리게 울려 퍼진다.
자신의 위험을 인식조차 못한 사람처럼,
아니 자신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애써 외면한 사람처럼,
마치 원래부터 물속에 태어나고 살던 생물인 것처럼 자연스레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떠내려갔다.
그 옛 찬송가를 몇 곡이나 불렀던 걸까? 이제 화려하게 만개한 꽃이 지듯 물에 젖은 그녀의 옷은 너무 무거워졌고 강바닥의 진흙탕은 가엾은 여인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젊은 날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그녀의 아름다운 선율도 서서히 사그라들고 만다. 어쩌면 헤어 날길 없던 그녀의 슬픔과 광기를 잠재울 수 있었던 유일한 해방구는 죽음뿐이지 않았을까?
오필리아는 순수한 마음으로 약혼자 햄릿을 사랑했지만, 그는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으로 여성 혐오에 빠져 오필리아를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그리고 햄릿이 실수로 그녀의 아버지까지 죽이게 되자 오필리아는 더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버린다. 속물적인 아버지, 욕망덩어리 왕, 권력과 쾌락의 유혹에 약한 여왕, 냉소적인 애인...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몰고 간 잔인한 죽음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햄릿> 4막 7장에 나오는 이 오필리아의 죽음은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낭만적으로 묘사된 죽음의 장면일 것 같다.
<햄릿>의 배경은 덴마크였지만, 그림 속 다분히 영국적인 풍경은 밀레이가 잉글랜드 서리(Surrey) 근교의 호그스밀 (Hogsmill) 강둑을 배경으로 복잡한 자연의 식물군을 풀잎 하나하나까지도 충실하게 그려낸 것이다. 사방에서 뿜어대는 꽃 덤불의 향내와 손끝에서 촉촉하게 젖어드는 수풀의 촉감마저 느껴질 만큼 정밀한 묘사 덕에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가 오히려 자연의 품에서 위로받고 있는 듯한 (어쩌면 죽음을 초월한듯한) 기이한 평온마저 감돈다.
강물 위에는 셰익스피어가 오필리아의 화관에 묘사한 수십 종의 야생화와 식물이 사실적으로 표현됐지만 다른 개화 시기의 꽃들이 동시에 보여지기도 한다. 이는 밀레이가 파리와 모기떼, 악천후와 주민들과의 갈등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장작 5개월 동안 강의 풍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꽃의 언어"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관심이 고스란히 반영된 듯 각각의 꽃에는 고유의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오필리아에게 기대어 있는 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을,
오필리아의 오른손 근처에 떠 있는 데이지는 '순수'를,
오필리아의 뺨과 그녀의 드레스 옆에 떠있는 분홍색 장미 그리고 강둑의 흰 들장미는 '젊음'을,
오필리아의 목에 두른 제비꽃 화환은 '충절'을,
오필리아의 드레스 위에 떠 있는 팬지는 '헛된 사랑'을 은유한다.
단 하나, '잠'과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색 양귀비꽃만은 <햄릿> 속에 언급되지 않았다. 훗날 이 작품의 모델인 엘리자베스 시달이 아편중독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밀레이는 양귀비의 붉은색을 화폭 가운데 강렬하게 새겨놓았다.
(위) '오필리아' 작품 상세
(아래) 밀레이가 '오필리아'를 그렸다고 생각되는 호그스밀 강의 일부 풍경
가장 라파엘 전파다운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오필리아>에는 이처럼 관찰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묘사된 자연 풍경 위로 화가의 시적 상상력이 겹쳐져 있다. 역사가들이 '빅토리안 아방가르드 (Victorian Avant - GARDE)'라고 칭하는 반항적인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19세기 영국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존 화단에 반기를 들고 낭만적 서정과 중세적 신비가 풍겨 나는 중세 고딕과 르네상스 거장인 라파엘 이전의 소박한 초기 르네상스 화풍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신화와 전설, 문학 등에서 그림의 소재를 가져와 사실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라파엘 전파에게 '식물학은 성직자의 과학이다'라며 식물학과 광물학을 중시한 존 러스킨은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방식의 교본이었고, 인간의 고뇌와 변화무쌍한 운명을 이야기하는 셰익스피어는 성서와도 같았다.
뭔가 아이러니하지만 라파엘 전파의 이런 역설적인 매력 덕분에 과거에 사장된 구태의연한 예술을 넘어 오히려 현대에 더 추종을 받고 패션, 사진, 뮤직비디오, 영화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1️⃣(위)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 머리를 위한 연구, 1852년 © 버밍엄 박물관 및 미술관
2️⃣(좌) 존 에버렛 밀레이 경의 1852년 오필리아 연구 © 플리머스 시의회(예술 및 문화유산)
3️⃣(우) 존 에버렛 밀레이 경의 그림 오필리아 1852년에 대한 약간의 스케치 © 피어폰트 모건 도서관
밀레이는 인물과 배경을 동시에 그리지 않고 먼저 현장에서 강둑의 배경이 되는 풍경을 그린 뒤, 그의 런던 스튜디오에서 겨울 동안 오필리아를 그려 넣었다. 그에게 오필리아의 심리 상태와 감정을 함의하는 자연 풍경은 단순한 객체가 아닌 인물만큼 중요한 주체였다.
당시 19세였던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이 밀레이가 중고 샵에서 4파운드에 구입한 (낡고 더러웠지만) 화려하게 반짝이는 은색 자수 드레스를 입고 오필리아로 변신했다. 익사 장면을 실감 나게 재현하기 위해 추운 겨울 무려 4개월 동안 그녀는 물이 가득 찬 좁은 욕조 안에서 두 팔을 벌린 불편한 기도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욕조 아래 설치된 오일 램프로 겨우 물을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램프가 꺼졌는데도 작업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밀레이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불평한마디 없이 찬물에 오랜 시간 방치된 시달은 폐렴에 걸리게 된다. 이에 대노한 그녀의 아버지는 나중에 밀레이에게 의료비로 50파운드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고단과 열정으로 완성된 오필리아의 시적인 죽음은 청초하지만, 살짝 벌린 입술과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몽롱한 눈빛은 더없이 관능적이고 에로틱하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아름다운 왕관이었던 머리카락, 당시 많은 화가들을 매료시킨 시달의 길고 풍성한 빨간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수초처럼 미세한 물결을 그리며 그녀들(오필리아와 시달)의 사악한 운명처럼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그림 속 숨겨진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내다 보니 왠지 불길하게만 느껴졌던 그 일랑거림마저 어느새 내게 평화로운 화해를 건네기 시작한다. 애인의 배신에 미친 나머지 익사하고 마는 한 순수한 여인의 표면적인 비극 아래 감춰진 메시지는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구도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터무니없는 억측이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제 나는 삶의 변화를 위한 물살에 내 몸을 던졌으니까. 결국 어디로든 흘러갈 물살, 그 끝에 기어이 닿아보자.
밀레이는 어떤 곳에 살며 이토록 처연한 아름다움을 내재한 작품을 그렸을까?
예술 작품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그걸 잉태해 낸 화가의 집에 관심이 많다. 화가의 집은 단순한 먹고 자고 생활하는 일상을 넘어 예술적 영감의 원천과 작품의 밑그림이 된다는 걸 알기에 그들이 머문 집에서 수많은 단서를 찾아내 해석하고 싶어 진다. '공간'과 '예술'은 언제나 변함없을 내 삶과 작업의 화두이다.
1876년부터 밀레이와 그의 가족은 런던 켄싱턴 팰리스 게이트에 살았다. 그의 대중적인 성공은 밀레이가 고풍스럽고 웅장한 스튜디오 하우스를 짓는데 자금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이 집을 짓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는데, 비용은 약 £13,400(현재 £1,474,000에 해당)이었다. 1873년 당시 예술가들에게 주목받던 켄싱턴에 부지를 구입하고 1876년에 건축을 완료한 후 남은 평생을 이곳에서 지내며 삶을 마감했다. 이탈리아 양식의 조금은 평범하고 유행하던 스타일과도 다소 동떨어진 커다란 정사각형의 소위 "구식"인 밀레이의 붉은 집은 그의 말년 작품처럼 어떤 가식도 없이 담백하게 그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
집에서 가장 큰 방은 50피트 길이의 작업실이다. 켄싱턴 하이로드가 내다보이는 최북단의 높은 창문과 크고 넓은 작업실은 화려한 테피스트리, 동양풍 러그와 도자기 꽃병이 늘어선 대리석 벽난로, 벽난로 위에 놓여진 무리요(Murillo)의 초상화, 그리고 우아한 대리석 분수와 시칠리아산 대리석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모든 오브제들은 그의 고상한 미적 취향뿐 아니라 화가로써 엄청난 부와 명예를 획득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작업 공간이라기보다는 응접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창고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과 대형 캔버스를 이동하는 시스템 등이 갖춰진 이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화가에게 최적화된 장소였다.
중간 이상의 키와 잘생긴 얼굴, 넓은 어깨를 지닌 건장한 체격, 풍부하고 감미로운 목소리와 생기 넘치는 안색을 지닌 솔직하고 유쾌한 영국 신사였던 존 에버렛 밀레이는 비록 불륜스캔들로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선택한 상업적인 그림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거기에 게의치 않고 당당하고 멋지게 현재의 행복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영원히 남는 예술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지 마. 지금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뭐 어때? 난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칭찬하고 기꺼이 돈 주고 사면 좋겠어. 몇백 년 뒤 사람들이 뭘 좋아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때 좋은 평가를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그때 난 죽고 묻혀서 먼지가 됐을 텐데.”
(라파엘전파 동료였던 윌리엄 홀먼 헌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마지막 켄싱턴 집은 현재 잠비아 공화국 고등 판무관실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