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 아담 드라이버, 알 파치노, 자레드 레토. 이 이름들이 한데 모여 있는 영화라니 어떤 관객이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겠다 싶었던 찰나, 선뜻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구찌’다. 구찌 가문을 다룬 영화라면 재벌가의 뒷이야기로 평범한 다수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류의 영화일 것이고, 아무리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린다 한들 그 비판마저 그들이 만든 브랜드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관람 욕구가 반쯤 줄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극장에 가게 된 것은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몇 해 전 ‘올 더 머니’로 재벌가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준 리들리 스콧이라면 조금 다를지 모른다.
평범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 분)는 우연히 찾은 파티에서 마우리치오 구찌(아담 드라이버 분)를 만나게 된다. 마우리치오가 구찌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파트리치아는 그날 이후 그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쓴다. 당당하고 꾸밈없는 파트리치아의 모습에 매료된 마우리치오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버지 로돌프 구찌는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
마우리치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짐을 싸서 파트리치아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운송회사 일을 도우며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구찌로부터 동떨어진 삶에 만족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급기야 그를 앞세워 구찌가의 일원이 되려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마우리치오의 작은아버지 ‘알도 구찌’(알 파치노 분)는 로돌프와 마우리치오의 소원해진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돕는다. 마우리치오가 가업에 동참하게 되면서 파트리치아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욕심내기 시작한다. 만족을 모르고 질주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마음이 불편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잠시,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른다. 결국 둘은 투자회사와 손을 잡고 알도와 그의 아들 파올로(자레드 레토 분)까지 몰아내기에 이른다. 마우리치오는 파트리치아의 도움으로 구찌의 CEO가 되지만, 그녀의 끝없는 탐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이혼을 결심한다.
삶은 마우리치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는 파트리치아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사업가로서 별다른 재주도 없는 데다 새로운 사람과 연애하며 돈까지 왕창 써버린 탓에 구찌를 위기에 빠뜨리고 만다. 한순간에 구찌 가문에서 밀려난 파트리치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마우리치오를 저주하기 시작하고 끝내 청부살인 업자를 고용해 그를 살해한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는 저자 ‘사라 게이 포든’이 쓴 책 ‘하우스 오브 구찌’를 원작으로 한다. 다시 말해 대중이 몰랐던 이야기를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검증된 사실에 덧붙인 감독의 시각일 터. 이미 알려진 사실을 리들리 스콧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을 보길 바랐는데, 아쉽게도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문제는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는 “이들은 땅이나 왕관이 아닌 껍데기를 두고 싸운다”고 말하는 파트리치아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당연히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상대의 것을 빼앗는 구찌 가문 사람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러면서도 흥미진진하게 그렸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메시지는 흐릿해진다.
마우리치오와 파트리치아의 결혼을 반대하는 로돌프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들이 말하는 ‘자격론’에 실소가 나온다. 구찌의 모든 유·무형 자원은 구찌 혈통을 타고난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는 그들만의 당위.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감독마저 여기에 한 표를 던지는 것 같다. 리들리 스콧은 구찌 가문의 모든 것을 쟁취하려는 파트리치아의 욕망을 꽤나 ‘비판적으로’ 그린다. 반면 탈세를 밥 먹듯 하는 알도나 사업에 전혀 소질이 없는 마우리치오에게는 퍽 관대하다.
물론 파트리치아가 구찌가의 일원이 되려 분투하는 모습은 보기에 불편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욕망으로 얼룩진 나머지, 욕망 그 자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언가를 과도하게 탐하는 그녀의 ‘욕심’이어야 하지, ‘탐해선 안 될 것을 탐하는’ 누군가의 자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해 보자. 정말 구찌는 구찌만의 것인가? 구찌만의 것이어도 되는가?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말했던 루소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리들리 스콧이 이런 경계와 구분선을 좀 더 명확하게 드러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가지려 했을 뿐인데, 어찌된 일인지 범죄 혐의는 파트리치아에게만 부여된다.(그녀가 청부살인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알도가 저지르는 탈세는 상대적으로 그 혐의가 가벼워 보이기까지 하며, 관객은 어쩐지 구찌에서 밀려나는 알도를 ‘짠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영화의 종반부,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는 부족한 사업 능력과 무분별한 사치로 구찌를 위기에 빠뜨린 마우리치오의 지분을 사들여 그를 구찌에서 밀어내려 한다. 그런데 감독은 여기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전문경영인의 행동을 묘하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허탈감과 배신감마저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의 마우리치오와 달리 투자회사 사람들은 여유롭다. 리들리 스콧은 알도와 파올로의 (정당한) 지분을 빼앗던 당시 마우리치오를 몹시 비열하게 그렸는데, 어쩐지 투자회사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때의 마우리치오와 파트리치아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감독은 그저 ‘빼앗기는 사람’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는 걸까?
‘하우스 오브 구찌’는 결국 어디에 기여하는가? 명품(정확히는 사치품)에 대한 선망에? 혹은 재벌과 그 신화에? 감독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관객이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리들리 스콧이 비판을 위해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들, 사람들은 결국 구찌라는 브랜드만을 다시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