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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Feb 23. 2022

끝내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

영화 '프랑스'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영이 시작되고 단 몇 분 사이, 나는 세 번이나 당황했다. 시작과 동시에 화면에 영화 타이틀이 뜨더니, 레아 세이두가 대뜸 카메라 앞으로 걸어와 ‘연기’를 시작한다. 언제나 사실적인 연기로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던 그가 카메라를 한껏 의식하는 듯한 어색한 시선 처리로 통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적잖이 당황스럽다.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라고 말하는 감독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짐작은 얼마 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무너진다. 감독은 관객이 영화를 ‘실제 상황’으로 인식하길 바라는 걸까?


 영화는 ‘세계를 향한 시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명 기자 ‘프랑스 드 뫼르’(레아 세이두 분)의 취재 과정을 축으로 진행된다. 그는 일 자체보다 어떻게 하면 세간의 이목을 끌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름을 떨칠 수 있을지에만 관심이 있다. 앞서 말한 마크롱 대통령의 기자간담회장에서도 ‘프랑스’는 프랑스 정세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도, 첫 번째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슈 몰이)만을 즐길 뿐 정작 대통령의 대답엔 관심이 없다. 전쟁터의 실상을 취재하러 가서도 그는 같은 모습이다. 현실을 깊이 있게 담아 전달하려 하기보다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질 법한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만드는’ 데만 골몰한다. 프랑스가 취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취재 현장인지 아니면 영화 촬영장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렇게 모든 사안을 자신의 커리어 상승의 도구로만 생각하던 프랑스는 어느 날 운전 중에 오토바이를 치는 사고를 낸다. 사고로 다친 남성은 경제력이 없는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가장이었다. 프랑스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일하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청년을 보며 알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낀다. 그는 청년을 여러 차례 찾아가고, 보험금과 별개로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한다. 사고 이후 프랑스의 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른다.


 프랑스는 급기야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방송계를 떠나기로 선언한다. 남편과 아들에게도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는 치유를 위해 한적한 요양원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는 프랑스의 사생활을 기사로 쓰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기자였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는 또 한 번 충격에 빠진다.


 프랑스는 얼마 못 가 깨닫는다. 자신 역시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착취해왔다는 사실을. 그의 눈물샘은 마를 날이 없다. 프랑스는 방송으로 복귀해 다시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터로 취재를 나가 보지만, 흐르는 눈물과는 달리 현장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한결같다. 그런데 이후 프랑스의 삶에 진짜 고비가 찾아온다. 남편과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만 것이다. 갑작스럽게 남편과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는 프랑스의 모습은 이번에도 다른 언론들의 가십거리가 될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취재 방식은 이제 달라졌다. 언제나 자신이 중심이던 그의 취재 영상은 취재원 중심으로 바뀐다. 취재원의 아픔을 이용하지 않고, 진심으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수없이 많은 요소에 방해를 받는다. 이 영화에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 유독 많은데, 감독은 차량 의자만 뺀 배경을 모두 (티 나게) 합성 처리했다. 배우들이 카메라를 향해 걸어오는 등 다분히 카메라를 의식한 움직임들을 보여주기도 한다.(연기 도중 카메라를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 가장 ‘사실적인’ 영상은 거의 조작에 가까운 프랑스의 취재 영상이다.


 영화는 무엇이 진실인지,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두 시간 남짓한 영화라는 영상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듯하다. 혼란스러운 프랑스의 삶은 프랑스의 어지러운 정세 혹은 미디어를 둘러싼 상황을 은유하며, 감독은 프랑스 드 뫼르가 고통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듯 국가 프랑스 역시 그녀처럼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영화의 도입부는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해놓은 완벽한 오프닝일 것이다.


 프랑스는 전쟁을 부추기는 정부를 비판할 때나 난민들이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촬영할 때, 취재 영상에 자신의 얼굴을 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영화 속 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프랑스와 함께 ‘셀피’를 찍자고 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프랑스가 모든 상황을 자신의 취재거리로 여기듯, 사람들은 프랑스가 오토바이 사고를 낸 직후에나 요양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셀카를 찍자며 마구잡이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들에게는 그저 찍고자 하는 욕망만이 있을 뿐 프랑스의 상황은 중요치 않다. 이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보다 자기중심적으로 소비하고 착취하는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것처럼 보인다. 셀피는 재난마저 도구화하는 우리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설정인 셈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런 모든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있다. 영화가 프랑스의 각성을 위해 남편과 아들을 죽게 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 프랑스의 남편과 아들은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 타이어에 펑크가 나면서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여러 차례 도로 위를 뒹굴던 차량은 마주 오는 대형 트럭에 받쳐 한참을 끌려가다 결국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이후 추락한 차는 불이 붙어 폭발하고 만다. 영화는 이 장면을, 차량이 한 바퀴 구를 때마다 차 안에 타고 있는 인물의 얼굴에 상처가 늘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식으로 묘사한다.


 감독은 지금까지 현장을 자극적으로 비틀어 가십으로 소비하고 재난마저 착취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프랑스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이용해도 괜찮은 것일까? 내게 이런 기능적인 접근 방식은 지금껏 이런 세태를 비판해  감독의 자기부정으로까지 보인다. 더욱이 런 적나라한 묘사는 분명 영화 바깥에서 교통사고를 겪은 적이 있거나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것이다. ( 장면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실책으로 보이는 것은, 이후 프랑스가 각성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의도였다면 프랑스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러닝타임 내내 진실과 윤리를 힘주어 말하던 영화에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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