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나더 라운드'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기 전 맥주를 한 캔 땄다. 영화 속 인물들이 말하던 ‘인간에게 부족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충족하기’ 위해서. ‘느긋해지고 침착해지며, 음악적이고 개방적인’ 리뷰를 쓰기 위해서. 눈치챘겠지만 핑계다. 이 영화에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술이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피곤함마저 혈중 알코올 농도 부족 때문으로 느껴진다.
영화는 취기를 빌리지 않고 보아도 충분히 즐겁다.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디를 밝히고 어디를 어둡게 할지, 어디를 늘리고 어디서 멈춰야 할지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관객 중 누구라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들 때 그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몇 퍼센트였을지.(촬영을 시작하고 며칠 뒤 감독의 딸 ‘이다’가 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감독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이다의 말에 따라 영화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깊은 위로를 전하고 싶다.)
‘어나더 라운드’는 주인공 마르틴(매즈 미켈슨 분)이 교사로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의 졸업 파티에서 시작한다. 시작부터 술기운이 확 느껴지는 대환장 음주 파티.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은 정반대다. 생기 없는 중년 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표정 없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관객은 직감하게 된다.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건 ‘술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 교사 마르틴은 삶에 의욕이 없다. 학생들은 그의 수업을 귀담아듣지 않고, 수업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한다. 학생들만큼이나 학부모 역시 마르틴을 탐탁지 않아 한다. 이런 상황은 집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마르틴은 부인은 물론 두 아들과도 서먹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분명 상처를 받은 듯한데도 얼굴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마르틴은 친구 니콜라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술자리를 찾는다. 한사코 술을 거부하는 그에게 니콜라이는, 노르웨이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핀 스코르데루가 인간에겐 혈중 알코올 농도 수치가 0.05% 부족하다고 말했다며, 적당한 음주가 자신감과 용기를 줄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마르틴이 술을 한 잔 들이켜는데, 경직돼 있던 그의 눈 주위로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그의 몸속에 가득 찬 눈물을 술이 바깥으로 밀어낸 것이다.
다음날 마르틴은 스코르데루의 가설을 실행에 옮겨보기로 한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술을 마셔보기로 한 것이다. 정말 인간에겐 0.05%의 알코올이 부족했던 것일까? 마르틴은 어쩐지 평소보다 수업이 잘되고 학생들을 대할 때도 자신감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그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즉각 이 가설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심지어 이 실험을 심리학 에세이로 옮기겠다는 야심찬 포부까지 밝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술을 마시고 수업에 들어간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은 수업에서 생기를 되찾는다. 이들은 의미 없이 가르침을 이어 오던 그간의 수업 방식을 버리고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진다.
네 사람은 실험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로 한다. 같은 알코올 농도에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를 수 있기에, 자신에게 맞는 양의 알코올을 섭취해 최적의 양을 찾자는 것이다. 이번에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업은 물론이고 마르틴은 가족들과 관계에서도 활기를 되찾는다. 집안 분위기는 한층 밝아진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인 혈중 알코올 농도 최대치 실험에 돌입하는 순간,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만취한 마르틴이 집을 찾아가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잠이 든 채 발견되고, 동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수군댄다. 마르틴의 아들은 우여곡절 끝에 아빠를 집으로 데려가지만, 취한 마르틴은 부인에게 그간 참아왔던 것을 터뜨리고 만다. 그러곤 말싸움 끝에 식탁마저 뒤집어엎은 후 집을 나온다. 술은 그저 잠깐의 위로였을 뿐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했고, 네 사람은 모두 위기에 빠진다. 마르틴은 다시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친구 중 한 명인 톰뮈는 중독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 속 음주 장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고등학생들의 음주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틴과 친구들, 즉 중년 남성들의 음주 장면이다. 모두들 신나게 술을 마시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두 집단의 음주에는 차이가 있다. 학생들에게 음주는 음주 그 자체이지만, 중년의 음주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은 현실 도피를 위한 것일 수도, 현실 극복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걱정 없이 취하던 아이들이 자라나 걱정을 잊으려 술을 마시게 되는 현실이 어쩐지 코끝 찡하게 느껴진다. 두 집단에 대한 대조적인 묘사는 그들의 중간 어디쯤에 와 있는 내(관객) 술잔 역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주목할 만한 장면은 신나게 취해 있던 영화가 술에서 깨어났을 때다. 영화가 이 다음에 무슨 말을 이어갈까, 만취 상태로 어지럽혀 놓은 것들을 어떻게 수습할까 궁금해지는 찰나, 영화는 잠시 침묵하더니 서둘러 위기를 모면하기보다 천천히 주워 담는 쪽을 택한다. 직전까지 시끌벅적하고 쾌활하던 영화는 차분해지고, 템포 역시 느려진다. 마치 전날 과음한 사람이 다음날 뒷수습을 하듯이. 이 얼마나 기막힌 내용과 형식의 일치인가!
영화는 끝끝내 음주를 도피 수단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하고, 어떤 위기도 술기운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네 사람의 모습을 통해 느끼게 만든다. 그렇다. 알코올로 이뤄낸 것들은 각성의 순간 모두 증발하고 만다.
그러므로 감독은 술을 경유해 인간을 들여다보는 것일 테다. 쓰디쓴 인생의 행로에서 술을 찾고 그것을 마시며 일순간 해방감을 느끼는 인간, 만취하고 패배하는 인간, 그리고 끝끝내 그 패배를 수습하는 인간. 감독의 시선은 결국 ‘인간’에게 닿아 있다.
네 사람의 혈중 알코올 농도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남겨진 그들은 어쩌면 한 단계 나아갔을지 모르겠다. 이 모든 걸 겪어낸 후 그다음에 마시는 한 잔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