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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Jun 01. 2022

춤으로 형상화한 첫사랑

영화 '스프링 블라썸'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여섯 살 ‘수잔’(수잔 랭동 분)에게 세상은 지루한 곳이다. 수잔은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과의 대화에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학업 성적 역시 매우 우수한 편이지만 공부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늘 표정 없는 얼굴로 딴생각에 잠겨 있다. 모임에서는 수다 삼매경에 빠진 친구들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기 일쑤다.


 그런 수잔의 눈에 어느 날 연극배우 ‘라파엘’(아르노 발로아 분)이 들어온다. 라파엘은 수잔의 집 근처 극장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어쩌다 멀찍이 선 라파엘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수잔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만다. 극장 근처 카페에서 딸기잼 바른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라파엘을 본 어느 아침, 수잔은 집에서 딸기잼을 찾아 먹는다.


 어느 날 공연 연습 중이던 라파엘은 극장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주변을 서성이던 수잔과 맞닥뜨리게 된다. 둘은 그렇게 첫 인사를 나눈다. 열여섯 수잔과 서른다섯 라파엘은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금방 친구가 된다. 라파엘은 곧 수잔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학교에 가기 전에 아침을 함께 먹자는 것. 수잔은 날아갈 듯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상기된 얼굴로 춤을 춘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난 날, 라파엘은 수잔에게 자신이 아끼는 오페라 곡을 들려주고 수잔은 금세 노래에 빠져든다. 둘은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렇게 사랑은 시작된다.


 영화 ‘스프링 블라썸’의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빠져드는 이야기. 둘의 상황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라는 특성 때문일까.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빼면 이 영화에는 빈틈이 많다. 수잔이 가족들과 식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인데, 부족한 대사를 배우들이 각자의 역량으로 메우려 분투하는 듯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런 아쉬운 부분들을 단숨에 상쇄시키고 남을 만한 것들이 이 영화에는 있다.


 대표적으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추는 춤. 수잔과 라파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라파엘이 수잔에게 가장 아끼는 음악을 들려주면서부터다. 수잔은 금세 노래에 빠져들고 리듬에 맞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라파엘은 수잔과 정확히 똑같은 동작을 한다.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고, 두 손으로 테이블을 어루만지거나, 허공에서 어떤 형상을 그려내 보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을, 맞춘 듯 똑같은 동작을 하는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함께 무언가를 향유하며 같은 감정을 느낄 때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그런 황홀한 순간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커진다. 두 사람은 또다시 함께 춤을 춘다. 이번엔 좀 더 밀착된 형태로. 둘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단순히 ‘플라토닉한’ 감정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몸짓은 분명 연애 과정에 대한 묘사이며 사랑의 순간의 압축이다.


 그러나 춤은 감정의 본질만을 남길 뿐 서른다섯 남자와 열여섯 여자의 사연을 지시하지 않기에, 끝내 이 장면에 남는 것은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다. 관객은 두 사람의 추상화된 춤을 통해 나의 경험, 나의 사랑을 돌이켜보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이 춤추는 무대 위에 관객의 이야기가 놓인다.


 열여섯 수잔이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가 서른다섯 살 남자(!)라는 설정은 감독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수잔 랭동은 자신의 실제 경험에 상상을 더해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 눈치챘겠지만 주인공 이름도 자기 이름에서 딴 것이다.) 어쩌면 감독이 시간이 더 지나서 이 영화를 찍었더라면 수잔과 라파엘의 나이 차이는 급격히 줄어들었을지 모르겠다. 사회적 시선을 이유로, 혹은 핍진해야 한다는 영화적 통념을 이유로. 그러나 수잔은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외부의 시선으로 판단하거나 재단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해답을 찾았다.


 수잔 랭동의 장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색채에 대한 탁월한 감각도 뽐낸다. 두 사람의 사랑의 매개체가 되는 사물은 대체로 붉은색을 띠고 있다. 라파엘의 딸기잼과 수잔의 석류 레모네이드, 라파엘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와 수잔이 즐겨 읽는 책은 모두 붉은색이다. 석류 레모네이드를 마시던 수잔이 빨대 끝에 묻은 붉은색 음료를 새하얀 린넨 위에 떨어뜨리는 도입부의 장면은 영화 전체를 압축해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물론 시각적으로도 강렬하다.)


 감독은 제3의 인물을 통해 중간중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라파엘 공연의 무대 디자인을 맡은 이의 말이 그렇다. 무대 감독은 “수직의 상징은 생명이며, 수평의 상징은 휴식과 땅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가치를 담고 있는 마호가니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마호가니가 붉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수잔 랭동은 그의 말을 통해 붉은색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관객에게도 영화를 즐길 만한 힌트를 던진다.


 감독 수잔 랭동이 주인공 수잔 역할을 한 배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놀라고 말았는데, 연출을 하며 동시에 연기까지 하는 것은 프로 감독이나 기성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연기 경험이 없는 그가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민배우 뱅상 랭동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는 분명 놀라운 일이다.) 첫 연출작에서 배우로까지 활약했다니!


 수잔 랭동은 열다섯 살 때부터 이 영화의 각본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써 왔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끝끝내 영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나는 감독이 어린 나이에 장편영화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택한 과감한 묘사들에 그의 나이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피나 바우쉬를 동경하고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좋아하던 소녀.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닮은 소녀는 단 한 편의 영화로 수잔 랭동이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의 다음 이야기는 무얼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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