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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영 Jul 19. 2022

영화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영화 '컴온 컴온'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이크 밀스 감독의 이름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그의 전작 ‘비기너스’가 떠오른다. 75세에 커밍아웃을 선언한 아버지와 그를 바라보는 아들(감독 자신)의 이야기. 한 줄로 요약하면 언뜻 다이내믹한 내용이 상상되지만 영화는 내내 덤덤하기만 하다. 그의 다음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늦둥이 사춘기 아들(감독 자신)을 홀로 키우는 엄마의 고충을 말하는데, 감독은 이번에도 그저 바라볼 뿐, 인물들이 놓인 상황을 판단하지도 나서서 해결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쯤 되면 영화의 묘사 방식이 곧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삶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꼭 정답을 찾아낼 필요가 없다는 걸 그는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이미 깨달은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내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반드시 극복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앞서 말한 두 영화와 ‘컴온 컴온’에는 모두 소년이 등장하는데, 이번 영화에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늘 자신을 대변하던 소년 캐릭터가 이번엔 감독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아들에서 발전시킨 인물이라는 것. 물론 이번 작품에서도 감독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앞선 영화들과 같다. 그리고 여기에 감독 마이크 밀스의 탁월함이 있다. 자신이 자녀일 때 부모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건, 아직 (부모가 되기 전) 겪어보지 못한 시기의 일이기에 취할 수 있는 태도일지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위치가 자녀에서 부모로 바뀌었음에도 그의 태도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자녀였던 자신의 마음을 지표 삼아 자녀를 판단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들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그저 존중하며 바라볼 뿐이다.


 라디오 저널리스트 ‘조니’(호아킨 피닉스 분)는 미국의 여러 지역을 돌며 어린이들을 인터뷰한다. 인터뷰 주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삶과 미래다. 디트로이트 지역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 저녁, 조니가 엄마의 기일을 핑계 삼아 여동생 ‘비브’(가비 호프만 분)에게 전화를 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비브가 조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남편을 도우러 잠시 그가 지내는 곳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것. 비브는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 아들 ‘제시’(우디 노먼 분)를 돌봐 달라 말한다.


 비브에 따르면 제시는 착하고 조금 이상한 아들이다. 제시는 밤마다 자신을 고아원에 사는 ‘고아’라고 말하며 상황극을 시작한다. ‘고아원은 침대도 좁고 애들이 코를 골아 불편하다’며, 제시의 방에서 자고 가도 되겠냐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한다. 그러면 비브는 제시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오늘은 마침 우리 아들 제시가 집에 없으니 제시의 침대를 사용하라’는 것. 제시의 이런 행동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함께 역할극에 동조하는 비브 역시 그 행동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저 받아들인다. 감독의 모습처럼.


 감독은 ‘엄마’(양육자)들의 고충을 이야기하기 위해 인물을 엄마와 아들로 구성하지 않고, 조금 방향을 틀어 삼촌과 조카로 설정한다. 영화는 엄마라는 존재가 늘, 너무도 당연하게 감당해오던 일들이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삼촌의 모습을 통해 드러낸다. 매 끼니 식사를 챙기고 목욕을 시키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한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보듬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는 내내 느낄 수 있다.


 제시는 늘 조니의 예상 밖에 머문다.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난 날, (평소 다른 어린이들을 인터뷰할 때처럼) 조니가 제시에게도 ‘미래가 어떨 것 같냐’고 묻자 돌아온 답변은 ‘질문에 답하기 싫다’였다. 답변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제시는 역으로 조니를 향해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영화에는 두 번의 역지사지가 있다. 상기한 비브의 역할을 대신하는, 그래서 양육자의 입장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조니의 모습이 그렇고, 내내 질문하는 입장에서 (제시에 의해) 받는 입장이 되어버린 조니의 또 다른 모습이 그렇다. 영화는 ‘질문당하는’ 조니를 통해 보여준다. 어른은 아이를 상대로 늘 ‘묻는 사람’의 위치에 서려 한다는 것을. 조니 역시 답변보다는 질문이 익숙한 어른이었다. 비브와 소원하게 지냈던 이유와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이유에 대해 분명 답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시가 갑작스럽게 ‘왜 그런 것이냐’ 물어오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동행은 끝없는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이야기(논픽션) 허구의 상황(픽션) 덧붙여 영화를 만들어온 밀스 감독이 이번에는 논픽션 인터뷰 장면들에 영화의 절반 가까이를 내어줬다. 조니가 아이들을 인터뷰하는 장면들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  지역에 사는 아이들을 만나 촬영한 실제 영상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있는 영화는 인터뷰 장면들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아이는 정말 어른에 의해서 자라는 것이 맞는가 대해. 여기에 어린이 인터뷰이의 놀라운 답변을  가지 적어본다.


 디트로이트를 위험한 곳, 엉망인 곳이라고 말하는 (선입견을 가진) 이들에게 ‘이곳에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느냐’ 물으며 자기가 사는 곳을 야무지게 변호하는 소녀. ‘우는 아이는 싫으니 강해져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저항하며 ‘사람은 원래 울기도 하지 않냐’고 답하는 소년. ‘부모님이 내 아이라면 어떤 것들을 배우게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기적이지 않은 것, 무례하지 않은 것, 화내지 않는 것, 앞장서는 것’이라고 답변하는 또 다른 소년.


 감옥에 가 있는 아빠를 대신해 동생을 챙기던 어린이는, 동생만큼은 그런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며 동생을 위해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초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저 자신으로 있고 싶다며, ‘나다운 게 초능력이며 그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도울 것’이라던 또 다른 어린이의 말을 듣고는 무언가가 몸에 흐르는 느낌이었다. 우리에겐 이미 서로 돕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는 걸 아이는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런 답변들을 듣고 있으면 감독이 어린이들을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었으리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아이들의 인터뷰 음성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끝난 것은 영화일 뿐, 스크린 바깥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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