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스트 도터'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많다. 그런데 원작 소설보다 영화가 좋았던 경우를 떠올려 보면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다른 이(감독)의 상상이 내(독자) 머릿속 상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에는 제약이 없기 때문에 독자는 한없이 자유롭게 소설 속 세상을 머릿속에 그려나갈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막연한 상상을 실재하는 영상물로 만들어내야 하는 매체다.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이는 필연적으로 ‘구현’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소설 속 인물(과 최대한 비슷한 사람)을 현실의 배우 중에서 찾아야 하고, 그 배우를 기용한 이유를 관객이 납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뿐인가. 방대한 원작을 제한된 시간과 장면 안에 압축해 담을 수도 있어야 한다.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영화화한 ‘로스트 도터’는 ‘구현’이라는 거대한 산을 매끈하게 타 넘었을까.
주인공 ‘레다’(올리비아 콜맨 분)는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는 방학을 맞아 한적한 바다로 휴가를 즐기러 왔다. 느지막이 도착한 숙소는 여러모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 레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그런데 지난밤에는 싱싱해 보였던 식탁 위 과일들이 모두 썩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레다는 숙소를 뒤로하고 해변으로 향한다. 잠시 수영을 한 뒤 해변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얼마 후 시끌벅적한 무리가 해변을 장악한다. 대가족으로 보이는 무리는 그곳에 자신들만 있는 것처럼 무례하게 행동한다. 레다는 그들을 보며 불쾌함을 느낀다.
그때 레다의 눈에 젊은 엄마 ‘니나’(다코타 존슨 분)와 그의 어린 딸 ‘엘레나’가 들어온다. 니나의 외모가 너무 아름다운 탓인지 레다는 홀린 듯 그를 바라보게 된다. 니나의 딸 엘레나는 니나에게 안겨 한순간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레다는 자꾸만 자신의 과거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 기억들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두 아이를 챙기며 일을 하는 것은 레다에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에 집중해야 할 때도 아이들은 질문 세례를 퍼부었고, 잠시 쉴 때도 레다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렇지 않을 때는 울기 바빴다. ‘젊은 레다’(제시 버클리 분)는 딸들의 장단에 맞추다가도 툭하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남편은 레다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 무렵 레다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집을 떠나왔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레다는 육아에 지쳐 있는 니나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는 한편 불쑥불쑥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모두가 니나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자각한다. 그러던 어느날 레다는 니나의 가족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엘레나가 가장 아끼는 인형을 훔쳐 숙소로 향한다.
영화는 강요된 모성에 균열을 내려고 한다. ‘늘 헌신하는 엄마’는 ‘도망치는 엄마’로, ‘자식이 언제든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엄마’는 ‘필요할 때만 딸들을 찾는 엄마’로 바꾸어 놓는다. 틀에 박힌 모성의 이미지를 뒤집어 새로운 면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납득할 수 있게 그려진 지점들이 영화에서는 어쩐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원작에 묘사된 젊은 레다는 딸들을 충분히 사랑하며 두 딸을 돌보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다.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자라나는 자녀를 바라보는 엄마의 복잡한 마음에 대해서도 책에 상세히 묘사해 두었다. 일례로 레다의 딸들은 레다가 과일 껍질을 끊지 않고 길게 깎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날 큰딸 비앙카가 엄마를 따라 하려다가 칼에 손을 베이고 눈물을 터뜨린다. 비앙카는 자신이 빨리 낫도록 상처에 뽀뽀해 달라고 말하지만 레다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소설 속 레다는 말한다. ‘아이는 과일을 깎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단호하게 해야만 했다’고. 그런데 영화에서 이런 세부사항은 모두 제거된다. 영화 속 레다는 울고 있는 아이의 상처를 소독한 뒤 눈을 맞추지도 않고 자리를 떠 버린다. 그러고는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는 듯한 제스처를 반복한다.
힘들고 지치는 상황을 모조리 아이들 탓으로 돌리는 듯한 묘사도 여러 차례 나온다. 레다가 자신을 부르는 딸들을 외면한 채 가방을 메고 집을 나가버리는 장면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관객으로 하여금 납득하게 하기는커녕 ‘정서적 학대’라는 반감마저 생기게 만든다. 당연하게도 아이는 부모를 괴롭히려는 의도를 가진 악마가 아니며, 부모의 고통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존재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은 레다가 엘레나의 인형을 훔치는 것이다. 아끼던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가 병이 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인형을 찾는다고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마을 곳곳에 전단지까지 붙였다. 하지만 레다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인형을 돌려주려 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도 영화는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원작 소설은 훔친 인형을 끌어안으며 그동안 자신이 망가뜨린 것과 잃어버린 것을 떠올리는 레다의 모습을 묘사한다. 동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인형을 돌려주고 싶지는 않은 그의 내밀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는 이번에도 그런 심리를 영화적으로 보여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듯, 인형을 훔치고 끌어안는 레다의 모습만을 의뭉스럽게 묘사한다. 결국 이 장면에 남는 건 이해 불가한, 히스테릭한 한 여자뿐이다.
레다가 극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남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나 숙소 관리인을 유혹하려 하는 장면에서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따라가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영화가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어서가 아니다. 시종 레다를 대변하지만 관객을 설득하지는 못하는 탓이다.) 이때 부족한 설명과 삭제된 이야기들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서스펜스다. 감독은 이를 즐기기라도 하듯 레다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나간다. 자녀를 양육하며 고충을 겪는 이들에게 ‘로스트 도터’는 어떻게 다가갈까. 위로도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한 채, 도망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만을 탓하게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