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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에최 Nov 28. 2023

남자 없는 여자들

3. 아픈 손가락(1)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엄마가 나를 붙잡고 다짜고짜 울기 시작했다. 아빠가 직장에서 잘리게 되었다고, 이제 어쩌면 좋으냐며 펑펑 울었다. 엄마는 아직 직장이 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내 앞에서 울어버린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엄마는 기쁨이나 슬픔, 행복 같은 감정을 크게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런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 낯선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것이었다. 내 앞에서 엄마는 아빠가 직장을 잃게 되었다며 아이처럼 울고 있는데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모르겠다. 엄마가 무얼 원했는지. 그저 자신의 불안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조금 힘들어질지언정 거리로 나앉지는 않을 거야, 같은 중학생 입에서 나올 법한 이성적인 위로를 듣고 싶었던 걸까.      


 나의 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의 불안은 보고 싶지 않았다. 14살의 나는 아직 그런 걸 감당할 준비도, 감당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내가 바라는 건 아빠가 직장을 잃었지만 엄마가 있으니까 괜찮아, 걱정하지마. 라며 안심시켜주는 엄마인데. 경황이 없어서 였을까. 나의 불안을 예측하기엔 자신의 불안을 감당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나를 함께 의논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결의를 나눌 수 있는 동지 정도로 생각하고 싶었던 걸까.     


*     


 이전에도 엄마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 냈었다. 주로 아빠와 시댁에 대한 비난과 불우했던 유소년기 이야기였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결혼하고 보니 아빠네 집은 지지리도 가난한데 아빠 말고는 아무도 일하지 않는 희한한 집안이었다. 아빠는 오남매 중 맏이이자 장남이었다. 명절 때 들렀던 친가는 늘 북적북적했다.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시집간 큰이모와 결혼하지 않은 막내 삼촌을 뺀 남매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은 할아버지 가족들이 더해질 때면 말 그대로 집이 압력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좁아터진다는 말과 상다리가 휜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는 명절날 친가의 풍경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작은 방 하나, 큰 방 하나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반지하같은 부엌이 있던 아주 낡은 한옥집의 공간 들은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큰 방은 가장 수가 많은 아이들 차지였고 작은 방에는 아들과 사위들이 모였다. 각각의 방에는 명절 내내 TV가 틀어져 있었다. 자연스레 여자 어른들의 공간은 하나 남은 장소가 된다. 할머니와 엄마, 고모들은 모두 부엌에서 일을 했다.     

 

여자 네 명이서 지지고 볶고 끓인 음식들이 한가득 상에 차려지면 그걸 큰 방으로 운반하는 건 남자 어른들 몫이었다. 우리 가족을 뺀 모든 친척들이 독실한 기독교인 가운데 식전기도가 언제나 이루어졌다. 기도는 주로 할머니가 맡았다. 우리 큰아들 가족을 복되게 하옵시고, 이 자리에는 없지만 우리 첫째 딸, 그리고 우리 둘째 딸, 셋째 딸, 막내아들, 그리고 그 모든 자식을 복되게 하옵시고.. 모두를 복되게 한 뒤 마침내 아멘이 울리면 거국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한바탕 식사가 끝나고 나면 과일상이 차려졌다. 모두가 방의 가장자리에 앉아 TV를 보며 과일을 먹었다. 모든 먹는 행위가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종이인형 놀이를 하거나 어른들이 준 용돈으로 구멍가게에 가 과자를 골랐고 남자들은 다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여자들은? 부엌으로 돌아가 수많은 식기와 수저와 젓가락과 컵들을 설거지하고 뒷정리를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라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빠는 대기업에서 일하며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 대신에 가족을 부양할 정도의 월급을 받았지만 그 중 일부를 본인 집안 식구들을 위해 써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빠의 본가로 흘러 들어가는 ‘돈’이었다. 친가에 주기적으로 송금되는 생활비 말고도 엄마는 아빠의 장남노릇과 아빠의 장남노릇을 기대하는 친가에 진절머리가 났던 모양이다. 한번은 아빠가 장남이므로 할아버지의 묘지를 재단장하는 데에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친척의 말에 엄마가 그런 법이 어딨냐며 발끈했던 기억이 난다. 

     

 후기 조선시대가 재현되는 것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빠가 일순간에 집안일도 잘 거드는 다정한 남편감이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만삭이었을 때에도 아빠가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나에게 여러 차례 고발하듯 말한 적이 있다. 사실 아빠는 엄마보다 정리도 요리도 더 잘하지만 엄마는 그 사실을 깨달을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엄마의 남편, 즉 나의 아빠를 엄마의 평가를 통해 인식했다. 아빠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엄마가 만들어놓은 렌즈가 씌워졌던 셈이다. 그러니 내가 엄마를 오랫동안 피해자라고 해왔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집안일에, 육아에, 자녀교육에 직장일까지 다 하는 엄마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단순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는 폐기한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의 나를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엄마가 그렸던 그 구도 속에 나의 자리는 없었다. 피해자인 엄마와 몰염치한 아빠만 있었을 뿐.    

  

 그렇다고 아빠와 처음부터 데면데면했던 건 아니다. 아빠의 회사가 지방으로 이전하여 엄마와 아빠가 주말부부가 되고 난 다음 아빠가 있는 도시로 이사해 가족이 다함께 2년 남짓의 시간을 보낼 때까지는 사실 아빠와 즐거운 기억이 더 많다. 엄마와의 좋은 기억이 지하철이나 이동하는 차 안에서 하던 스무고개나 묵찌빠, 끝말잇기 같은 정적인 놀이를 통해서였다면 아빠와는 수영장에서 하는 숨박꼭질, 바다에서 잠수해 조개 캐기, 스키 타기와 같은 동적인 놀이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특히 아빠가 일년에 한번, 여름 휴가철이 되면 가족들을 데리고 바다로 산으로 돌아다녔던 기억은 나의 찬란한 유년 시절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차를 타고 하염없이 이어지는 아찔한 대관령 고개를 넘던 일, 안개가 자욱한 오대산을 통과하던 아침, 바다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밤이 되면 텐트 밑에 깔린 모래의 촉감을 느끼며 단잠을 자던 일, 바다에서 캔 조개로 라면을 끓여 먹던 일. 모두 아빠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내게 방랑의 유전자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전부 아빠에게서 물려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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