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픈 손가락(2)
엄마의 이야기 속 또 다른 가해자는 바로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였다.
부모의 격렬한 부부싸움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한 엄마의 정신상태는 엄마에 대한 할머니의 완벽주의적인 기대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좌절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엄마는 이 시절에 대해 상세히 얘기한 적은 없지만 자신이 ‘정신병’을 앓았다고 말하곤 했다.
부부싸움은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잘못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려울 때도 많은데 엄마의 마음은 자신의 아빠에게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살았던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젊은 아빠가 얼마나 다정했는지 그리움을 담아 말하곤 했다.
엄마의 서사를 받아들인 나는,
그러나,
아빠와의 즐거운 기억을 간직하는 딸이자 외할머니를 존경하는 손녀이기도 하다.
이런 태생적인 다층적 정체성으로 인해 나는 엄마와의 거리를 조금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도 영향을 미쳤는데 따로 떨어져 산 기간이 길었던 아빠보다는 언제나 근거리에 있어 온 외할머니와 감정적 동화가 조금 더 쉬웠다.
할머니는, 다정하고 너그러운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나를 무척 예뻐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이 되면 할머니는 꼭 참외를 먹었다. 할머니만의 참외 먹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건 참외 껍질을 벗기고 참외를 가로로 반절 분할하여 반쪽의 과육을 살살 도려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수히 많은 씨앗을 품고 있는 해면 같은 재질이 나오는 데 그걸 아이스크림처럼 먹는 것이다. 할머니는 언제나 나의 입에 그 촉촉하고 달콤한 부분을 먼저 넣어 주셨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지어준 별명은 no problem이었는데, 무언가를 걱정스레 물어보면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대답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할머니는 유쾌하게 웃으며 쟤는 뭐만 물으면 no problem 이라고 한다며 그런 나를 신기해했다. 아마 거듭될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한 대답이었을 테지만 할머니가 붙여준 별명은 나의 낙천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저 별명 덕분에/ 때문에 나도 꽤 오랫동안 내가 낙천적인 사람인 줄 알고 살았다.
언젠가 할머니와 같이 사극 드리마를 보는데 여자배우가 옷을 벗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할머니에게 저 사람은 왜 옷을 벗는 거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조금 생각을 하시더니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서” 라고 알려주셨다. 언젠가 엄마와 아빠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이 서로에게 대답의 책임을 돌리거나 거짓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건 엄마나 아빠에게는 기대하지 못할 할머니의 훌륭한 자질이었다.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
그리고 그건 할머니의 삶 자체와도 같았다. 지금껏 문제를 정면돌파하며 삶을 개척해왔기에, 할머니의 기준은 높고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특히 ‘학문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EBS에서 하는 명사의 강연은 빠짐없이 녹화해두어 할머니 서랍장에는 비디오 테잎이 산을 이루었다. TV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문익환 목사의 부인이자 본인도 신학자이면서 민주화 운동가였던 박용길 여사(황해도를 고향으로 둔 동향인이라 더 각별했던 걸까)를 주기적으로 방문했고, 어린 나에게도 자신이 어디 갔다 왔는지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나는 할머니의 말들을 어렴풋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할머니는 통일운동,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많아서 관련 단체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할머니의 시야에 있으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할머니의 성에는 차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자신을 실망시킨 딸에 대해 할머니는 자신의 성격을 못 이기고 비난을 퍼부었던 모양이다. 내가 할머니의 딸이 아닌 손녀로 태어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나의 관계에는 다행스럽게도 나는 할머니가 아닌 엄마의 딸로 태어날 운명이었고, 조금은 여유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할머니가 동네에서 만나는 다른 할머니들과는 뭔가 좀 다르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내심 좋았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위인전에 나오니 커서 할머니의 위인전을 쓰겠다고 했던 게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웃어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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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인정도, 남편의 도움도 받지 못했던 엄마는 늘 체력이 바닥나 있었고, 거기에 날이라도 흐리면 몸이 아파 죽겠다고 신음했다. 나를 낳고 조리를 잘못한 탓이라 했다. 컨디션이 반짝 괜찮은 날에는 주로 어디 같이 놀러가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컨디션은 올라가면 곧 떨어지기 마련이었으므로 언제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엄마가 으레 그 찌푸린 얼굴로 “내가 좀 몸이 안 좋은데, 나는 안 가면 안될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기대에 부푼 내 마음에 구멍이 숭덩 숭덩 나버렸다.
병약하면서 성질이 급한 엄마는 요리를 하다가도 자주 손을 베었다. 접시나 물컵도 종종 깨뜨렸는데 그럴 때는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르게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엄마는 본인이 실수로 무언가를 깨뜨리고도 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며 신경질을 내곤 했다. 그러면 나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