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픈 손가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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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질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엄마는 너무 너무 무서웠다.
엄마의 감정은 밟아야 할 단계와 절차를 생략하고 한순간에 폭발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나에게 뭐를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잔소리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마 본인이 피곤해서였을 거다.
피곤한 사람은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어쨌거나 지시나 잔소리도 하는 사람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엄마에게는 그럴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잘못했다는 감각을 느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학교에서 받아온 아프리카 기아를 위한 모금 저금통이 있었는데 그곳에 차곡차곡 동전을 쌓고 있던 나는 어느 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동네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저금통에 든 돈을 주고 말았다. 아마 동전은 좋은 것 같으니 좋아하는 친구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나 보다. 깨진 저금통과 사라진 동전을 본 엄마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기 전까지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그게 명확하게 잘못된 행동이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결국 그 일로 나는 엄마가 벌을 줄 때까지 불안에 시달리다가 손을 들고 벌을 받았는데, 내가 혼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엄마가 신경질을 내거나 화를 낼 때 내가 느끼는 무서움은
엄마가 떠날 것 같다거나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이 아니고
나보다 물리적으로 강한 상대에게 느끼는 위협이었다.
그러다 엄마는 가끔 분에 못 이겨 나의 뺨을 때리기도 했으므로
그건 실체가 있는 공포였다.
뭐라도 대꾸를 하면 엄마의 목소리는 더 날카로워지고 커졌기 때문에
그럴 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았다.
엄마는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엄마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의 세계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그 밖의 세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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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우리집에 올 때 꼭 자신이 만든 무언가를 싸들고 온다. 며칠 전에 만들었는데 맛있어서 가져왔다든가, 다른 데서 먹어봤는데 괜찮아서 만들어왔다는 반찬이다. 엄마는 본인이 사용한 재료가 건강에 좋은 것임을 늘 강조한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것들은 아니고 브로콜리나 토마토, 달걀 같은 것들이다. 요즘엔 tv나 유투브에서 영상을 보다가 새로 접한 소위 슈퍼푸드가 있으면 한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 같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의 마음 속 넘버원 슈퍼푸드는 콩이다. 학교에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던 시절 나의 단골 반찬은 콩자반, 콩나물무침, 두부구이였다. 이 반찬들이 번갈아 등장하는 게 아니고, 매일 같이 나의 도시락 반찬은 저 콩 삼총사였다. 이쯤되면 요리사가 콩마니아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번은 엄마가 축축한 검은콩 한 통을 주며 콩을 식초에 절인 것인데 몸에 아주 좋은 것이니 꼭 먹으라며 당부했는데 정말 미안하게도 그 냄새와 식감과 맛 모든 것을 그 누구도 참을 수가 없어 냉장고 한 구석에 내버려 두다가 결국 고스란히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고행이 되면 안된다는 게 나의 소신이다. 세상에 몸에 좋은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취향에 맞지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엄마는 자신이 즐겁지 않아도 몸에 좋다고 하면 어떻게든 먹어야 한다. 건강 앞에서 당위는 즐거움 따위를 이겨 버린다.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식구들에게 제공하는 일은 엄마가 스스로 부여한 숙명 같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일 끝나고 집에 온 엄마는 부엌으로 직행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나를 가장 안쓰러워할 때는 내가 배고파 할 때였다. 그럴 때면 시간이 언제인지에 관계없이 부랴부랴 음식을 차려주었다. 엄마에게 음식의 가장 큰 가치는 건강함인 것 같았다. 엄마가 요리하는 햄이랑 어묵, 심지어 라면의 면은 모두 한번 데쳐 “나쁜 기름”을 쪽 뺀 채로 상에 올랐다. 아... 건강에 좋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름을 뺀 햄, 어묵, 라면은 햄, 어묵, 라면이 아니었다. 지금도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가 먹는 음식을‘건강한 것’과 ‘건강하지도 않은 것’ 구분지어 얘기를 한다. 어찌나 말을 했는지 엄마가 아이를 봐주던 날이면 아이는 내게 “엄마 이건 건강한 거에요?” 라고 물었다.
얼마 전 엄마가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하기에 결과에 무슨 문제는 없는지 물었다. 큰 문제는 없는데 당뇨의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군살이 없어지고 근육질 할머니가 될 정도로 매일 같이 수영하는 사람치고는 다소 의외스러운 결과였다. 게다가 엄마는 건강 음식 마니아가 아닌가. 나의 상식선에서 건강한 식재료를 섭취하고 매일 운동하는 사람은 당뇨와 가장 거리가 멀어야 할 것 같은데 엄마와 당뇨라니. 문제는 엄마가 탄수화물 중독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었다. 식사와 식사 사이 끊이지 않는 군것질, 매일 먹는 빵, 과자, 떡.. 이때다 싶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엄마! 당뇨는 탄수화물을 줄여야 돼. 엄마 빵을 너무 많이 먹어~ 군것질도 너무 많이 하더라~” 반박할 여지가 없는 잔소리다. 엄마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내 잔소리를 탐탁지 않은 듯 들으며 나를 보지도 않고 볼멘소리로 대답한다. “많이 줄인 거야~”고집 피우는 아이 같다. 엄마가 고집을 피우는 건 별로지만 아이 같을 땐 귀엽게 봐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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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어릴 때부터 식모와 같이 살았다. 인건비가 저렴하던 시대라 가능했던 일이다. 엄마와 이모가 이모라 불렀던 식모는 집에서 함께 먹고 자며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집안일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더 중요한 일(=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쓸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집안일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여기서 의외로 할머니가 음식의 맛을 잘 내며 입맛이 까다롭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 뿐만 아니라 가족 그 누구도 집안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을 전담하는 식모가 있었으니까. 그런 할머니를 보고 자란 엄마는, 엄마가 해준 밥에 대한 충족되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살림 중에서도 식생활에 있어 할머니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만다.
소풍 때마다 엄마가 싸주었던 김밥은 엄마의 요리와 엄마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음식이었다. 엄마가 싸준 김밥은 언제나 너무 컸다. 한입에 들어가지 않고 조금만 힘을 주면 옆구리가 터지곤 해 먹기가 불편했다. 친환경 시금치 한가득, 무항생제 달걀 한가득, 무농약 당근도 꽉꽉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각각의 재료에 간이 되어 있어 조금 짰다. 재료 중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 김밥. 균형이 조금 맞지 않다고 해야 할까. 담백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확실히 전체적인 조화보다는 재료 각각에 신경을 쓴 타입의 김밥이었다. 시금치 대신 오이가 들어간, 한입에 쏙 들어가는, 햄맛이 많이 나는 친구의 김밥을 맛보며 또 다른 세계에 대해 어렴풋이 상상해볼 뿐이었다.
몸속에 과도한 영양소가 흐르는 상태로 나는 매일 밤 꿈을 꾸었다. 꿈은 언제나 스펙타클했다. 꿈에서 나는 도망친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끝도 없는 싸움을 한다. 나를 쫓는 이가 누군지, 무엇 때문에 나를 쫓는지, 나는 왜 도망쳐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도망치는 행위가 나에게 남은 유일한 이유이고 행위인 것처럼 쫓긴다. 의문도, 의심도 사라지고 불안만 남은 세계. 밤하늘을 혼자 나는 꿈도 많이 꾸었는데 그때조차도 나는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중이다. 노란색 불빛이 비치는 창문들을 바라보며 황량한 도시의 밤하늘을 날았다.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뱀파이어처럼 건물 위를 날다 오금이 저리도록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지친 몸을 쉬었다.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옥탑방의 창을 멀리서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배회하기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새 잠에서 깨었다. 어떤 꿈에서 엄마는 나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