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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에최 Jan 16. 2024

남자 없는 여자들

엄마와 나

흔히 모녀관계를 애증관계라고 하지만 나에게 엄마는 사랑이나 증오의 대상이 아니다. 이 문장을 쓰고 나서도 이 문장이 정확한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엄마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냉담하게) 단언할 수 있나? 이렇게 믿고 싶은 게 아닐까? 이렇게 말함으로써 오는 후과는 없는가?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지 않나? 그러면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다른 무엇도 아닌 나에 관한 한 문장을 쓰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생각과 의심이 드는 것은 모녀가 가지는 특수한 관계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사랑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까닭은 내가 꽤 오래전부터, 적어도 중학교 시절부터는 엄마와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두고 살았기 때문이다.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아마 대화의 부재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렸을 때에도 엄마와 대화한 기억은 별로 없다. (없다고 썼다고 별로 없다라고 고친다) 그것이 엄마가 직장과 가정을 오가느라 지쳐서인지, 뒤늦은 둘째 육아에 엄마가 정신이 없어서인지 말수가 별로 없는 엄마와 나의 성격 탓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일상이나 감정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지 않는 아이였고, 엄마는 나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엄마가 개입되지 않은 나만의 세계는 점점 커지고 그 공간을 친구과 책, 조금 더 커서는 음악, 영화, 허무가 차지했다. 엄마는 내가 “친구에게 집착”하는 아이였다고 한 적이 있는데, 엄마와 나눌 법한 정서적 유대나 위로를 아마도 친구 관계에서 찾았던 모양이다. 나를 관찰하거나 해석하는 데에 의지가 없었거나 실패한 엄마는 나의 세계에서 점점 작아져 갔다.      


디아스포라 학자인 서경식은 그의 책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 한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외국의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누군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중략)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끈들을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 ‘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내가 종종 하곤 했던 생각과 비유가 정확히 같았기 때문에 문장을 읽으며 무척 놀랐고, 또 반가웠다. 국가의 경계에 놓였던 전력도, 혼란도 없는데 왜 재일조선인으로서 서경식이 가졌던 허무의 감각을 느꼈던 걸까. 어쩌면 디아스포라의 허무주의는 심리적 고아의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며 대화의 부재는 나의 의도가 되기도 했다. 어쩌다 응원을 바라며 조심스럽게, 고심하며, 그러나 무심한 듯 꺼낸 나의 말에 엄마는 예외 없이 격한 불안으로 대응하곤 했다. 내가 늦은 밤 범죄의 대상이 될까봐, 내가 누군가의 말에 현혹될까봐, 내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까봐 혹은 내가 결혼하지 못할까봐.. 불안의 얼굴은 시기마다 달랐지만 언제나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격한 모습으로 엄마와 함께 있었다. 불안에 휩싸인 엄마는 토네이도 같이 주위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불안 속으로 빨아들이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자연스레 엄마에게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이 났다. 엄마의 불안을 덜기 위해 구구절절 변명처럼 설명하는 일이 별 효과가 없었기에 점점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김경인은 자신은 저서 『엄마가 늘 여기 있을게』에서 이렇게 적었다.     


 잘 견디는 감정, 못 견디는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부모에게는 필요합니다. 이런 감정을 빨리 조절하고 악순환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들과 이 악순환을 계속 돌리면 아이들은 엄마가 아주 형편없어 보이고 무시할 만한 대상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 상처 때문에 막 휘몰아치는 부모를 보면 어른이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아이처럼 보입니다. (중략) 그런 악순환을 계속 반복하면 부모는 진짜 우스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서로 민망해져서 어느 시점부터는 서로 상대하지 않고 소통을 차단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면에서는 엄마를 엄마나 어른으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어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자기통제력을 엄마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특정한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엄마와의 물리적인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서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불안에는 마지노선이 없어 나의 경계를 마구잡이로 침범했다. 나는 나대로 타협 없이 나의 패턴을 고수하며 우리는 강하게 충돌했다. 고성과 막말과 냉전으로 덧칠된 이십대의 가정생활이었다.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의 괴리가 너무 컸던 시기였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엄마와 물리적 거리를 두었다. 엄마를 만나지 않아도, 엄마와 연락하지 않아도 삶은 문제없이 흘러갔다. 아니, 미친 듯이 홀가분하고 자유로웠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새벽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집에 돌아갈 때마다 가슴 졸일 필요가 없었다.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긴장과 막말과 고성도 없어졌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엄마와 나의 주된 표면적 갈등은 귀가시간과 연애관계였는데, 그 두 가지에 있어서 엄마를 의식하지 않게 되니 그제서야 나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엄마와의 관계를 원만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적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으로 체득했다.     


거리를 두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복잡한 미로 안에 있을 때에는 미로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새의 시선으로 대상에서 멀리 벗어났을 때에 미로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곧 양가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엄마는 불안이 높은 사람이고, 본인이 그 불안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 불안을 지속적으로 투사했다. 그 과정에서 분노가 섞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엄마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선을 아무리 높이 해도 미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대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명명되지 못했던 그간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마에 대한 분노의 스위치는 아주 사소한 일로도 쉽게 켜졌다. 엄마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가 신경에 거슬렸다. 엄마는 말하던 대로 하고, 하던 대로 행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분명히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엄마는 자신이 나에게 최선을 다했고, 그렇기에 나에게는 전혀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다고 했다. 그건 분명 진실이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나를 먹이고 교육시켰다. 체력의 밑바닥을 보면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세탁을 하고 다시 출근하고. 그 노력을 조금 덜어 체력이나 마음의 여유를 아꼈다면 우리의 관계가 조금 달랐을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나에게는 미안할 것이 전혀 없다는 그런 말을 들으면 바위를 두드리다가 맥없이 깨지는 달걀이 된 기분이 된다. 어떻게 해도 안 될 것 같다는 좌절감. 이해시키지 못할 것 같은 무력감. 그렇다고 엄마를 이해시키기 위해 내가 기억하는 사건 하나 하나 다 끄집어내어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분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못 들으면 그건 또 다른 상처가 될 것이 자명했으므로. 몇 번의 시도 끝에 엄마에게 지난 상처들을 얘기하고 사과를 듣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나의 역사, 나아가 엄마가 살아온 시대를 더 깊게 이해해보려고 한다.     


사실 엄마와의 관계가 텅 비어 있다거나 원만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쉽게 꺼내지 못한다. 특히 엄마와 딸은 친하다는 사회적 통념 속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우리 사회는 ‘딸 가진 엄마는 비행기 안에서 죽는데 아들 가진 엄마는 길에서 죽는다’는 식의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고 딸은 아들과 다르다며 돌봄이나 감정노동자로서 딸에게 거는 기대를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모든 딸이 그렇지는 않다는 말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엄마를 미워하거나 엄마에 대한 크나큰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딸은 큰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엄마와의 관계는 한 사람의 성향과 추후 인생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삶의 궤적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엄마의 영향력을 상대화시키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 엄마와의 관계는 모녀관계, 나아가 가족이란 제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며 이런 문제에 대해 더 넓고 세심한 시야를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엄마와의 관계는 어느 한편으로는 큰 문제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게다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엄마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로 고민 중이라는 사실을 알면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한다.     


주변의 여자친구들, 특히 첫째인 친구들에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놀랍게도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곤 했다. 저마다 가진 이야기는 각양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교육에 있어서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받았지만 정작 부모로부터 감정이 수용되거나 감정이 돌보아진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들려준 이야기 덕분에 엄마와의 관계에서 겪는 문제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을 반영하듯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대 말부터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책들이 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와 유사한 흐름이 조금 더 빨리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딸과 엄마는 친밀한 사이처럼 이야기되는 걸까? 사회가 여성에게 딸이라는 역할을 통해 그간 여성의 달라진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봄과 감정노동의 담지자로도 남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엄마와 딸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가 말해지기 시작했다는 건, 모녀관계에 있어서도 시대와 세대에 따른 변천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19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여자로서, 나는 누군가의 딸이면서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양육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성인이 된 이래 그 어느 때보다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결국 대한민국의 엄마와 딸은 육아, 돌봄의 영역에서 다시 만날 운명인 걸까.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장을 써야 할 때라고 느낀다. 작용과 반작용, 켜켜 묵은 감정으로부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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