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멜리에최 Jan 05. 2024

남자 없는 여자들

할미

오늘 여행에 못 갈 것 같아,      

눈을 뜨자마자 오빠가 말했다. 직장에 급한 일이 생긴 거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주말에 강원도에서 짧은 휴가를 보낼 예정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월요일에 연차까지 써둔 터였다.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이미 써버린 연차가 아까웠고, 나의 소박한 방랑벽이 이미 자동차에 앉아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를 혼자 태우고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운전을 할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강원도집 근방은 인적이 드물어 아이와 단둘이 머물기에는 조금 무서운 감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계획된 일정을 강행하려면 동행인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엄마였다. 지난 제주도 여행에서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싸운 뒤 다시는 엄마와 여행하지 말아야지, 다짐한 후였지만 지난 기억보다는 떠나고 싶은 욕망이 더 셌다. 엄마는 몸이 아프다고 거절하다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이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같이 가기로 했다.

      

오케이, 그렇다면 지난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엄마와 나 사이에 쿠션이 있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서로의 말과 행동에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신경을 분산시켜 줄 또 다른 사람. 이모에게 지체없이 전화를 걸었다. 이모는 특유의 호들갑을 떨며 ‘나 거기에 죽기 전에 다시 가보고 싶었잖아~’고 말했다.     


이모가 죽기 전에 다시 가보고 싶다던 강원도집은 아빠가 분양받은 펜션단지에 속해 있는 작은 집이다. 엄마와 아빠가 별거하기 전 가족여행으로 몇 차례 방문했던 기억이 있고 이모네 가족과 함께 갔던 적도 있었다. 몇 년 전 아빠는 강원도집의 열쇠와 관리를 내게 맡겼다. 우리의 손길이 닿을수록 공간에 온기가 스며드는 과정을 겪으며 작은 집은 비로소 우리의 강원도집이 되었다.      


전화를 돌린 후 약 1시간이 지나 엄마와 이모는 우리집에 도착했고, 그렇게 엄마와 이모, 나와 아이가 함께 하는 급작스러운 2박 3일간의 강원도 여행이 시작되었다.      

    


*     


고개를 꺾고 올려다봐야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곧게 뻗은 나무들. 짙은 나무 그늘과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의 조각들. 수분을 머금은 흙과 이끼와 나무껍질이 한데 뒤섞인 숲의 냄새, 곳곳에서 흐르는 물소리...     

강원도집에 가기 전에 들른 여름의 숲에는 아이를 유혹하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출몰하는 다람쥐들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와 무엇인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나무구멍, 그리고 곳곳에 흐르는 작은 시냇물에 정신을 빼앗긴 꼬맹이는 자주 발걸음을 멈추고 옆길로 샜다.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엄마와 이모는 저 멀리 멀어져 갔다.      


사실 엄마와 이모를 여행파트너로 섭외할 때 혼자 상상했던 그림이 있었다. 간혹 여자친구나 동생, 즉 나와 나이대가 비슷하거나 어린 여자들이 집에 놀러올 때 아이는 나를 자주 본체 만체했다. 아이를 너무 맡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다가가면 ‘엄마는 저리 가 있어’ 라고 단호하게 지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저리 가라는 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엄마 껌딱지로 유명한데 엄마보다는 이모들이 좋을 때가 있나 보다.(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가 할미들과도 그런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한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잠시나마 혼자 여행 온 기분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슬쩍 하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상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혼자만의 상상에 젖어 있던 나에게 현실을 알려주듯 아이는 평소보다 더 원숭이처럼 내게 매달렸다. 아이 입장에서는 할머니들이 이모들만큼 신이 나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아이와 함께 옆길로 새면서 뒤처졌고 엄마와 이모는 여름의 초록 속으로 훌훌 걸어 들어갔다.     


자신의 갈 길을 가느라 함께 걷는 누군가가 뒤처져 있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는 그 모습은 내가 어린 시절 겪은 외가집 어른들의 특징이었다. 꼭 주변을 살피지 못하도록 눈 옆을 가린 경주마 같다고 할까. 작고 마른 몸을 가진 엄마와 타원형 실루엣의 이모. 뒷머리는 높이도 모양도 달랐지만 똑같이 희끗해져 있었다. 엄마와 이모는 따로 걷다가 나란해지고 또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둘 사이에는 60여 년의 세월이 놓여 있다.    

 

두 사람은 거의 한평생을 가까이 지냈다. 여기서 ‘가까이’는 물리적 거리를 말한다. 엄마집과 이모집은 인공위성처럼 할머니집 주변을 맴돌았고, 심지어 모두가 할머니집에서 같이 살았던 시기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외가 식구들의 자장 안에 놓였다. 그래봤자 엄마와 이모가 서로에게 유일한 자매였기 때문에 대가족이라 부르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엄마, 아빠, 동생 외에 확장된 가족의 경험인 셈이었다.     



*


나와 다르게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외가집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원가정의 도움을 받으려고 친정 근처에 집을 구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어떻게 나온 집인데!) 사실 나는 결혼도 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물론 그 때는 아이를 한 명 키우는 데에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이기도 했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엄마의 인생은 엄마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1대부터 3대가 모여 살았던 옛날에야 집안의 아이들을 모두가 같이 돌보는 일이 자연스러웠다지만 핵가족 체제로 전환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는 일은 돌봄의 의무만을 툭 떼어 내어 앞세대의 여성에게 지게 만드는 느낌이랄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인생을 육아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알린 뒤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은 “어떻게 키우려고 하니?”였다. 근심을 담아 추궁하듯 물은 질문에 나는 당황하여 변명하듯 어물쩍거리고 말았다. 나와 파트너가 멀쩡히 있는데 무슨 소리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자신의 육아 경험에서 나온 질문이었던 것 같다. 외할머니에게서 벗어나려고 결혼했다는 엄마에게 외할머니 근처에 계속 살았던 이유를 물었더니 나를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답이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려면 본인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뉘앙스가 “나는 동의한 적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하니?” 처럼 느껴졌으므로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나의 마음은 더욱 더 굳어졌다.      


그리하여 아이가 태어나 정신이 없을 때에도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를 타인의 도움 없이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대한민국에서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단 부모가 맞벌이라면 정말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아니, 독한 마음만 있어도 되는 일이 아니고 무쇠와 같은 체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독한 마음과 무쇠 같은 체력이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예고 없이 아이가 아파서 어린이집에 갈 수 없는데 휴가를 낼 수 없는 상황에는 당장 누구의 도움이라도 필요했다. 왜 아이를 낳은 집들이 친정부모집 근처로 이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엄마는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일주일에 한번, 몇 시간이라도 아이를 봐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워낙 잠도 부족하고 나의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던 때라 감사히 도움을 받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아이를 보는 동안 방에 들어가 밀린 잠을 자고 잠시 카페에 나가 책을 읽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은 무난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엄마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는 결혼을 반대했었다.(결혼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연애를 반대했었다. 모든) 결혼을 할 거면 자신과 인연을 끊으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집을 떠났고 우리는 오랜 시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인연을 무기로 나의 감정과 선택을 통제하려는 엄마의 생각이 분노스러웠다. 엄마는 내가 학생일 때도 화가 나면 종종 집을 나가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나는 그 때마다 돈만 벌면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벼르며 그 시간만을 기다려왔다. 때가 온 것이었다. 


엄마와 물리적 거리를 두고, 나에게 자신감과 힘을 주는 관계들을 만나면서 엄마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지고 엄마와 나의 관계를 조금 떨어져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임신 중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룬 관계대상 심리학 서적을 읽고는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와 같은 충격을 받았고 눈이 번쩍 뜨인 기분을 받았다.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준다는 의미에서 페미니즘과 대상관계 이론은 비슷했다. 잊고 있었던 장면들이 떠오르며 분노는 점점 커졌다.      


아이의 탄생을 계기로 엄마와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문제였다. 괜히 엄마가 쇼파에 앉아 tv를 보는 뒷모습만 봐도 마땅치 않고 예민해졌다. 우리가 같이 있는 공간에는 공기가 팽팽해졌다. 긴장된 공기를 아이도 느낄 지경이었다. 아직 엄마와 같은 공간에 있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다시 오랜 시간 연락을 하지 않고 살았다.      


늘 먼저 연락하는 건 엄마였다. 그 때마다 엄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 같은 말투를 구사하며 태연하게 굴었다. 그 때마다 나는 문제를 짚고 넘어갈 자신이 없어 엄마와 똑같이 행동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닮아 있었다. 이런 관계의 패턴은 몇 차례 반복되었다. 당연히 그 때마다 도움의 손길도 끊겼다.  몇 번의 반복 끝에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건 최선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안정함보다 차선 혹은 차악이 변동없이 유지되는 안정을 택하려는 이성의 판단이었다. 엄마와 심리적으로, 언어적으로 크게 다투고 나면 집을 떠나며 구축해온 나의 평화에 금이 갔고, 때로는 아이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으므로 안정을 사수해야 했다.     


이후로 나는 말 그대로 아이를 끼고 살았다. 업무시간이 규칙적이지 않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남편의 몫까지 책임졌다. 주중에는 아이의 등원부터 하원 후까지, 주말에는 하루 종일 아이와 부대끼며 3년을 살았다. 그 사이 아이는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고 엄마를 상대로 타이르는 듯한 말투를 구사할 줄 아는 어린이로 성장했다. 아이가 엄마 껌딱지가 되어 버린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가 되도록 많은 어른들과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나 역시 그렇게 자라왔고, 그것이 나의 유년 시절을 풍족하게 만들어줬다고 믿기에 그러하다. 또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내가 아이에게 모든 걸 줄 수 없으며 때로는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이가 다양한 어른들과 관계를 맺으며 나의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상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엄마와 나의 역사와는 별개로 아이가 나의 엄마인 외할머니와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와 나의 관계가 단절되면, 아이와 할머니의 관계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나는 늘 그게 속상했다.      


발단은 육아시간이라는 명목으로 하루에 2시간씩 단축근무를 할 수 있는 2년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간 육아시간 덕택에 그나마 몸과 마음이 축나지 않은 상태로 직장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으로 다니고 있는 회사에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제 곧 끝이 난다니 눈앞에 캄캄해지고 가슴이 조여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괴로워 기간이 끝나가는 것도 애써 모른 채 해왔지만 이제는 직시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 시간이 되어 버렸다. 주변에서도 이제 어떡하냐, 걱정을 나누어 주었지만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를 혼자 키웠다는 자부심 한 켠에 독박육아에 대한 억울함과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자리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엄마와 남편이 다 함께 이동하고 있는 차 안에서 나의 불만이 걷잡을 수 없는 용암처럼 분출했다.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모두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지켜 본 엄마는 쟤가 육아하느라 지쳐서 그런가보다, 라며 일주일에 한번씩 아이를 돌봐줄테니 운동을 하든 책을 보든 원하는 걸 하라고 했다. 그 말은 먹먹한 심해 속 공기주머니 같았다. 나는 그 말을 꽉 잡고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일주일에 한번씩 내가 아닌 외할머니와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나는 3년 만에 다시 요가를 시작했다. 아이는 여전히 나와 있고 싶어하지만 조금씩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어린이집 근처의 도넛가게나 어린이집에서부터 집까지 오는 길에 대한 그들만의 기억이 만들어질 것이고 아이는 생각보다 오래오래 그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강원도 여행의 둘째 날, 바람 부는 강릉의 바닷가에서 아이는 엄마의 등에 엎힌 채 엄마의 판초를 뒤집어 쓰고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찬 바람을 많이 쐰 탓인지 그날 밤 아이는 열이 났다. 배가 아프다고 잠에서 깬 아이의 배를 엄마는 한참 동안 쓸어 주었다. 나는 하지 못할 정도의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생각해보면 아플 때는 엄마의 사랑이 느껴졌던 것 같다. 아플 때마다 엄마는 배를 문질러 주고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은 하얀 죽을 쑤어줬다. 감정을 살피고 돌보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은 엄마였지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할미들과 함께 했던 여행이 즐거웠던지 아이는 다음에도 할미들과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작가의 이전글 작가님(aka. 전 직장동료)과 아이와 함께 한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