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위반 고지서가 날아왔다. 내비게이션 안내보다 빨리 반응하는 급한 성격 때문에 속도를 위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태료가 날아올 때마다 아내는 조심하지 그랬냐며 타박을 한다. 뒤이어 도대체 몇 번째냐며 과거의 이력을 끄집어낸다. 결국 ‘그 돈으로 맛있는 것 사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라며 기회비용과 경제적 손실을 상기시키고 마무리한다. 할 말이 없다. 아내는 교통위반 과태료를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빠가 혼나는 모습이 안쓰러웠나 보다. 쌍둥이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느 날 조용히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교통위반 고지서를 보여주었다. 우편함에 있어 엄마 몰래 가져다준 것이라고 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려고 한 배려였다. 아빠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 기특해 엄마에게 비밀이라고 하며 입막음의 용돈을 찔러주었다. 범칙금에 아들 용돈까지 덤으로 지출하다 보니 앞으로 조심해야지 다짐의 다짐을 했었다.
이번에도 쌍둥이 아들은 아내 몰래 과태료 고지서를 보여주었다. 한동안 별 탈 없이 운전하고 있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고지서를 뜯어 사진과 일자를 확인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때의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나 싶었다. 한 달 전 일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2차선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신호가 바뀌면서 순간적으로 3차선 맨 끝 차선으로 가면 쉽게 사무실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좌회전하면서 3차선으로 차선 변경을 시도하였다. 순간 뒤에서 경적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쌍라이트를 켜고 난리도 아니었다. 뒤차가 있는 줄 모르고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든 게 잘못이었다. 비상 깜빡이를 여러 번 껐다 켰다 하며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다. 그래도 뒤차 운전자는 분이 안 풀렸는지 내 앞을 지나 한참을 가서도 경적을 멈추지 않았다. 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름 미안한 맘을 표시했음에도 생난리를 치고 가니 불쾌한 감정까지 들었다.
고지서는 그날 있었던 일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감시카메라가 없었다. 틀림없이 뒤차의 블랙박스에서 찍힌 사진일 것으로 의심했다. 별점 없는 범칙금을 내기 위해서는 직접 지구대로 가서 확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범칙금을 내는 과정에서 신고 때문에 부과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의심은 사실로 드러났다. 벌금을 내면서 불쾌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함을 표시했음에도, 무슨 앙심을 품었는지 신고까지 해 이런 경제적, 시간적 손실을 일으키게 했는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나 역시 보복 신고를 해서, 당한 것을 갚아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언짢은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신고당한 이야기를 하며 기분 나쁜 감정을 담아 뒤차 주인을 욕했다. 험담을 하다 보면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무실 후배, 지인의 아내 등 하나 같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뭐 그런 것 가지고 신고를 해 골탕 먹이느냐에 대해 공감했다. 나뿐만 아니라 경험한 사람들 모두 보복 신고를 해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는 것도 비슷했다.
지난해 교통법규 위반 공익신고는 290만 7,254건으로 2020년 대비(212만 8,443건) 36.5% 증가했다고 한다. 올해 1분기 기준으로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 대수는 2,507만대라고 한다. 자동차 등록 대수를 기준으로 신고 건수를 계산하면 약 11% 이상 공익신고로 교통법규 위반자가 나오는 셈이다. 산술적으로 대략 자동차 10대당 1건이 신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블랙박스가 있어 신고절차와 증거 확보가 용이해 앞으로 신고는 더욱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북한의 5호 담당제도 아니고 이게 뭔지 모르겠다’라며 사무실 후배는 한탄했다. 운전을 하다 보면 다른 차의 갑작스러운 방해로 놀라는 때가 많다. 안전을 위협받아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경적을 울리거나 욕을 한 적은 있었지만, 신고를 통해 건전한 운전문화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귀찮기도 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따져보면 나도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준 적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지’라는 무의식적인 이해가 있어 그러지 않았나 싶다.
얼마 전 조카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들었던 이야기다. 중학교 2학년인 조카는 같은 반 친구들이 호기심으로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고 한다. 뒤에서 보고 있던 같은 학교 3학년 선배가 사진을 찍어 학교에 신고해 그 친구들은 선생님과 부모님으로부터 엄청 혼이 났다고 한다. 같이 밥을 먹던 대학생 조카들은 말이 되냐며 황당해했다. 어떻게 선배가 되어서 그럴 수 있는 냐는 것이었다.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잘못된 행동을 하는 후배를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옛날 같으면 그러지 말라고 앞에 나서서 뭐라 했었겠지만, 요즈음은 잘못하면 오히려 후배에게 곤욕을 치를 수 있는 시대다. 함부로 나서지 못한 선배는 뒤에서 신고라는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권위가 사라진 요즘 자신을 보호하면서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신고했던 선배의 행동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탈권위적인 사회에서 점잖은 말로 누구를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이 어려운 시대다. 삼강오륜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했던 모습은 ‘꼰대’라는 말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선배나 어른의 훈계는 무시되고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험한 꼴을 겪는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조용히 뒤에서 신고하여 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능사가 되어버렸다. 동료 직원은 아들을 혼내다 아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었던 적이 있다며 허탈했었다.
사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권위가 사라져 소통은 자유롭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하는 마음도 같이 사라져 가고 있다. 치열한 경쟁과 각박한 인심은 상대에 대해 ‘그럴 수 있지’라는 이해와 배려마저 설 자리를 잃어가게 하고 있다. 자신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참지 못하고 표출하는 사회적 변화에 의해 신고는 더욱 만연될 것이다. 신고를 통해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안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신고한 뒤차 주인, 후배를 신고한 선배, 아버지를 신고한 아들. 법으로 강제되어 해결되었는지 모르지만 불쾌함과 씁쓸함이 남는다. 논어의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믿지 않으면 설 수 없다, 존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신고와 신뢰가 같이 설 수 있을까?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