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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정 Nov 21. 2022

세월에 묶인 아버지의 걸음

 아버지의 걸음에는 세월이 스며있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추석 때 뵙지 못한 사이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더 안 좋아지셨다. 괜히 집에 오시라고 했나 후회가 되었다. 퇴근 시간 무렵 기차역 주변의 주차는 쉽지 않았다. 부모님의 도착시간을 제때에 맞추지 못해 허겁지겁 역사(驛舍)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위층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에스컬레이터로 천천히 걸어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고 어색했다. 10년 전 협착증 수술과 4년 전 무릎 인공관절 수술로 걸음걸이가 힘들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오른손은 지팡이를 짚고 왼손은 어머니의 팔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은 힘겨워 보였다. 짧은 보폭으로도 중심을 잡는 것이 어려워 끼우뚱 거리는 걸음은 불안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 운동회 때 다리를 묶고 걷는 것이 불편한 것처럼, 세월에 묶인 아버지의 걸음은 불편함을 넘어 고통스럽게까지 보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아버지는 아들의 마중에 반가워할 겨를이 없었다. 뒤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의 진로를 아버지의 더딘 걸음이 방해하고 있었다. 뒷사람은 앞으로 나가지 못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빨리 옆쪽으로 비키라고 말했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는 이내 역정을 내셨다. 역사 통로 한편에서 잠시 숨을 돌린 아버지는 그제야 내 안부를 물으셨다.  


 석 달 전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서울에 있는 부모님을 모시고 싶었다. 새 아파트로 이사한 것을 자랑하고 싶었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스러움을 맛있는 음식 대접으로 만회하고 싶었다.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는 여건이 여의치 않아 자주 내려오시지 못했다. 아내와 나의 직장생활, 쌍둥이 육아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서울 왕래가 부담스러웠다. 먼데 뭘 하러 힘들게 오려고 하냐며 한사코 말리시는 부모님의 말씀에, 슬그머니 마음을 내려놓고 집에서 쉬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전화로 안부 인사를 대신하고 미안해했지만 그것도 뜸해지면서 얄팍해진 양심만 남았다.


 오시기로 날을 잡았지만, 며칠 전  ‘아버지가 못 가실 수도 있다’ 하며 차표 끊는 것을 기다려 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연세와 건강을 생각할 때 아들 집에 놀러 오실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혹시나 염려가 되었지만 아버지는 당일 내려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목소리가 건강하게 들려 마음이 놓였지만, 어머니의 말씀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마음이 착잡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다. 13살에 이북에서 넘어오셨다. 누님과 같이 먼저 내려가 있으면 바로 고향집을 정리하고 내려오신다는 부모님과는 삼팔선이 갈리면서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살기 어려웠던 그 험난한 시절, 부모 없이 자란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어머니를 통해 젊은 시절, 아버지가 한강에 3번이나 가셨다는 말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었다.


 아버지의 생존법칙은 근검절약이었다. 아버지의 근검절약은 고생이 쌓인 사리와 같다. 50년 넘게 사신 어머니는 ‘불 한번 제대로 켜지 못하게 한다!’고 지금도 볼멘소리를 하신다. 가끔 서울 집에 가면 세면대에 물을 버리지 않고 그 물을 계속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절 다들 어렵게 살았기에 아끼며 절약하는 것이 당연했었지만 지금도 그렇게 사시는 것을 보면 답답해 보였고 안타까웠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회사에서 ‘짠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생활하셨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는 회사에서 당신이 신었던 슬리퍼를 보여주신 적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슬리퍼에 수많은 못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리 뜯어지고 저리 뜯어진 자리에 못을 박아 계속 사용하고 계셨던 것이다. 못으로 둘러싸인 저 슬리퍼를 신고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슬리퍼가 얼마나 된다고 버릴 만도 한데 구두를 수선하는 것처럼 고쳐 신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놀릴 만도 했다. 내 것이 없으면 서럽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신 아버지는 주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그 좋아하는 술도 1차만 하고 남들 2차, 3차 할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 오셨다고 한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견디어냈던 당신의 근검절약은 견고한 성이 되었고 그 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산을 좋아하셨다. 주말이면 가까운 서울 근교의 산에서 멀리 지방의 산까지 회사 사람들과 여러 산을 다니셨다. 90년대 초반, 회사에서 중국에 가게 되어 백두산에 오르셨다. 눈 덮인 천지호를 배경으로 찍은 등반 사진은 큰 액자로 표구하여 거실에 걸어두어 자랑삼으셨다. 퇴직 후에도 산을 자주 오르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들도 관악산을 자주 가게 되었다. 그때의 계속된 등산이 아버지의 무릎 연골을 닳게 하여 수술까지 하게 될 줄 몰랐다.


 무릎 연골이 닳아질 만큼 아버지는 많이 돌아다니셨다. 두 다리로 부모님과 헤어져 38선을 넘었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다 걸어서 한강까지 가셨다. 삶의 막다른 경험과 고난함은 아버지의 걸음에 뒤따라 다녔다. 먹고살만한 여유가 생겼을 때도 아버지의 다리는 쉬지 않으셨다. 부지런히 전국 각지의 산을 돌며 건강을 지켰고 바른생활로 자신을 지켰다. 우리 가족도 지켰다. 아버지의 걸음에는 삶의 애환이 함께 있었다.


 아들의 집에 오신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 예쁜 아파트 단지 내 정원과 근처 멋지게 조성된 산책로를 말씀드렸지만 힘들다고 하시며 움직이지 않으셨다. 옷에서 수 십 가지 약을 꺼내 드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약을 드시고도 괜찮은 것인지, 어떤 병 때문에 드시는지 알 수 없었다. 물어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시는 아버지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떨어져 지내며 근황을 자주 접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와 약에 대해 묻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 자랑 겸 음식 대접으로 못했던 효도를 하겠다는 얕은 생각은 아버지의 불편한 거동을 보고 후회가 되었다. 괜히 오시라고 하셔서 건강이 더 악화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계획했던 근교 야외 일정을 모두 접었다. 아들 집에서 푹 쉬다 가셔서 기력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시는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집 잘 샀고 음식 맛있게 먹고 간다고. 이어서 어머니도 있는 동안 편하게 잘해주어서 고맙다고 하셨다.


 별로 해드린 것이 없었기에 잘해주었다는 말이 와닿지 않았지만 단지 아들과 같이 있어 좋다고 하신 것 같다. 부모님이 원하신 것은 뭘 해드리려고 하는 것보다 자주 찾아뵙는 것임을 느끼게 해 준 사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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