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콘클라베'를 보고
‘콘클라베’라는 영화를 봤다. 거룩한 교황 선출 과정을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로 만들었다는 평론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화에서 고위성직자인 추기경들은 세속의 정치인들처럼 음모와 야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간이 가지는 욕구 중에 마지막까지 떨치기 어려운 것이 ‘명예욕’이라 했던가. 가톨릭 교회의 최고의 수장이 될 수 있기에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는 교황의 갑작스러운 선종으로 시작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주인공인 로렌스 추기경은 콘클라베를 이끄는 단장이 되어 교황 선출을 위한 준비를 서두른다. 개최 장소인 시스티나 성당이 봉쇄되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준다. 세계 각지에서 추기경이 오고 그들은 진보와 보수, 지역별로 나뉘어 저마다의 논리로 자신들 쪽에서 교황이 나와야 한다며 물밑에서 파벌 싸움을 한다. 거짓과 음모로 얼룩진 세속의 선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영화 흐름 속에 가슴에 와닿는 장면이 있었다. 로렌스 추기경이 교황의 서거 후 미사 집전에서 한 강론이다.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입니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리스도조차 종국에서 확신을 두려워하지 하시지 않았던가요?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쳤죠. 우리 신앙이 살아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도 필요 없겠죠.”
이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아무리 영화라고 하지만 추기경의 입에서 확신을 죄라 여기고 의심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이 놀라웠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진 자로 생각했다. 하느님은 존재하고 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외아들인 예수를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삼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자로 생각했다.
3년 전 직장에서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겪었다. 인생의 최악의 순간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찾으려고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했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렸지만 이번에는 너무 큰 사건이어서 그런지 쉽지 않았다. 성경을 읽어도 와닿지 않았고 신부님의 강론이나 고해성사를 통한 상담도 지금의 내 상황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울 때 가톨릭 신앙을 통해 해결했던 나의 방식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것 같고 신에게 버린 받은 느낌이 들면서 점차 신을 부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신을 의심하는 유튜브를 보게 되었고 그동안 거부감 없이 따랐던 가톨릭 교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예수보다 바오로가 만든 종교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50년 신앙 속에서 만났던 신과의 체험은 잊어버렸다.
평소 명상을 하던 나는 점차 불교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불교 교리를 들으면서 잘은 모르지만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공(空)'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생겨나고 소멸하기에 붙잡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와닿았다. 나의 고통이 각자의 인연에 의해 상황 속에 서로 얽히고설켜 일어난 과보로 누구를 탓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불교의 교리가 나에게 더 맞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불쑥불쑥 떠오르는 과거의 생각과 감정으로 괴로웠는데 명상을 통해 평정심이 생겨났다. 마음을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과거의 후회, 미래의 불안으로 생각이 일어나 괴로워지는 것을 알았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빠지지 말고 알아차리면 저절로 사라졌다. 생각으로 괴로워지는 메커니즘을 알게 되자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성당에서 영성체를 하거나 기도를 하면 그 순간은 평안하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무엇보다 가톨릭 신앙은 예수나 마리아처럼 참고 인내하며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그래도 50년 가톨릭 신자였던 마음의 빚이 있었는지 지난해 5월 1일 혼자 수도원 피정을 갔었다. 지금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주님의 응답이나 마음의 평온을 얻고 싶었다. 기대와 달리 반나절 시간 동안 아무 응답도 평온도 없었다.
지난해 여름 나는 일주일간 명상센터에 가서 집중 수행을 했다. 둘째 날 저녁에 신은 인간이 만들었을 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후 점심을 먹고 불상이 놓인 법당에서 걷기 명상을 했다. 걷기 명상을 하고 잠시 호흡을 다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너는 왜 내가 없다고 하느냐? ”
"너의 결혼과 탈모 문제를 들어주지 않았느냐 “라는 말이 들려왔다. 깜짝 놀랐다. 법당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 결혼이 늦어지고 만남이 잘 되지 않아 심하게 방황을 했었다.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던 중, 우연히 만났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거의 정상처럼 보이지만 젊은 날 탈모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창 젊은 나이, 좋은 시절에 탈모로 스스로 괴로워 차가운 성당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던 나의 과거가 떠올랐다. 하느님은 내 기도를 다 들어주셨던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닌 당신의 때에.
나는 다시 성당에 다니고 있다. 그때의 하느님의 음성이 내면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믿는다. 이후 나는 더 이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내 삶의 체험 속에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로렌스 추기경이 나의 체험을 정리해서 말해주는 것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놀란 감정을 가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