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만휴정에 다녀왔다. 남편과 밥을 먹다가 갑자기 가게 되었다. 내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해야 할 일, 읽고 싶은 책, 친구들이 추천한 영화 등등에 대한 메모이다. 그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3대 정원이라는 메모가 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다소 의외의 메모이다. 그 메모 끝에 안동 만휴정이라고 적혀있는데 이건 또 뭔가 싶다. 아름다운 3대 정원은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원, 영양 서석지를 말하는데, 만휴정이 뜬금없이 왜 끼어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흘깃흘깃 보면서 머리와 가슴에 새겨 놓은 곳이다. 오늘 드디어 갔다.
“나무들이 새까맣게 그을렸네. 직접 보니 더 끔찍하다.”
아무 생각 없이 방문했다가 놀라고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지난봄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의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산불피해 복구 활동으로 그동안 출입을 통제하다가 9월 25일부터 다시 개방을 했다고 한다. 만휴정으로 올라가는 산길 곳곳에 밑동이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많이 보였다. 만휴정을 둘러싼 나무들도 새카맣다. 하마터면 다 타버릴 뻔했다. 주민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만휴정 본채는 피해가 없다니 참 다행이다. 내 눈으로 산불의 흔적을 보니 뉴스에서 볼 때보다 더 무섭다. 만휴정을 불길에서 지키려고 애쓴 주민들이 새삼 대단하다 싶다. 주민들이 애쓰는 모습을 기사를 통해 보고 가까이 있던 포스트잇에 급히 메모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3대 정원과 만휴정이 함께 적혀있던 뜬금없는 메모의 정체를 알았다.
그럼에도 만휴정은 아름다웠다. 부용원과 서석지는 가보지 않아서 얼마나 멋진 정원인지 보지 못했으니 모르겠고 소쇄원의 아름다움은 익히 알고 있었다. 만휴정도 소쇄원 못지않게 아름답더라. 계곡 건너편에서 보아도, 다리를 건너가면서 보아도, 만휴정 마당에서 보아도, 폭포 쪽 너럭바위에서 내려 보아도 아름다웠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유진과 애신이 다리 위에서 마주 서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이 유난히도 애틋했던 건, 아마도 만휴정이 만들어낸 풍경 덕분이었을 것이다. 숲과 폭포, 계곡과 정자가 어우러진 이곳은 요란스럽지 않다. 그저 고요하다. 정자로 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만휴정의 멋에 외나무다리의 지분이 상당할 것이다. 정자에도 올라갈 수 있는데 신발을 벗고 5분 이내로 머물라는 당부가 있다. 정자 마루에 앉아 흐르는 계곡물을 듣고 있으니 눈과 귀와 마음이 시원하고 평온해진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산불이 없었다면 푸른 산에 둘러싸인 정자는 얼마나 멋질까? “
만휴정의 옛 사진을 보니 속상하다. 조금 있으면 우리들 산에 단풍이 한창 들 텐데, 올해는 단풍으로 물든 만휴정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그을린 나무들 사이로는 조금씩 새순이 돋고 있었다. 계곡물은 여전히 맑게 흘렀고, 만휴정은 묵묵히 그 물소리를 품고 있었다. 언젠가 타버린 숲도 제자리로 돌아오리라.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숲길을 내려왔다. 불길을 견딘 만휴정을 보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