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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그림들

그때 그때 달라요

by 송알송알
지금껏 본 그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 무엇인가요?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 안부를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참 재미있는 모임이다. 모임 전에 각자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과제를 하나씩 낸다. 만나기 전에 과제를 하고 만나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동안 책, 드라마, 영화, 운동, 요리, 정치, 환경, 과학, 노래, 글쓰기 등등 다양한 과제가 있었다. 덕분에 두 달 동안 식물 관찰도 해보았고, 생전 하지 않던 운동도 했고 ( 숙제가 끝나자마자 운동과 멀어진 것은 비밀임.) 내 취향과 접점이 전혀 없는 책을 읽었다. 12월 모임을 앞두고, 역시나 다양한 과제가 고지되었다. ”지금껏 본 그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오는 과제도 그중 하나다.


그림에 문외한이고, 지금껏 본 그림을 세기 위해 두 손과 두 발이면 충분할 것 같아 어렵지 않은 과제라고 생각했었다. 웬걸, 과제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생애 최초 가보았던 전시회가 뭐였더라? 중학교 미술 과제로 전시회를 갔었던 것 같은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시회가 처음이라 신기해서 우왕좌왕했던 것만 선명하다. <세한도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읽고 다시금 와닿았던 “세한도”가 떠올랐다. 그림 속에 소나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잣나무가 있대서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 맞다. 난 사과와 중절모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를 많이 좋아했었다. 재미있는 그림 속에 담긴 의미가 깊어 좋아했었다. 물론 의미를 100%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또 뭐가 있더라. 보스턴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들을 난생처음 맨 눈으로 보았는데 생각보다 크기가 작아 놀랬다. ”에개개, 뭐가 이렇게 쪼그마해? “ 무슨 그림이었는지는 역시나 기억에 없다.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 보다 “포스트맨 조셉 롤랭” 그림이 더 마음에 들었다. 프린트를 구입해서 벽에 걸어 놓았더랬는데, 지금은 온 데 간데없다. 아까워라.

<런던미술관 산책>에서 본 존 키츠의 초상화

전원경 님의 <런던미술관산책>에서 발견한 시인 존 키츠의 초상화도 기억난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은 채 책에 몰입한 키츠의 모습에 마음이 일렁거려 일기 몇 줄을 끄적거렸다. 나에게는 마음이 어지럽거나 피곤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아플 때 손으로 이마를 짚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일렁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전원경 님의 말에 의하면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잘 그린 그림만이 마음을 흔드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그림 중에 장욱진 선생님의 <가족도>도 있다. 둘째 녀석이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한 방에서 잤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런가? 좁은 집안에 오손도손 다정하게 모여있는 가족들의 모습에 미소가 배어 나온다. 게다가 이 정도 그림은 나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정겹다. 안 된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이러다가 좋아하는 그림을 세는데 두 손과 두 발로는 모자랄 것 같은 마음이 살그머니 들락 말락 한다. 어머나, 내가 말이야 그림을 좀 아는 사람이었던가. 하하하.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흠… 역시나.


아니다. 천경자 화가의 “청춘의 문”이 있다. 10년 전쯤 < 명화를 만나다 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 소식을 듣고 이중섭 작가의 “황소”를 보러 갔다가 천경자 작가의 “청춘의 문”에 빠졌다. 화려한 색감의 그림은 좋아하지 않는데 이 그림은 왠지 모르게 좋더라. 머리와 몸이 분리된 듯한 여인의 모습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 자신처럼 보여 슬펐다. 제목마저 나를 슬프게 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내 청춘의 문이 아직 닫히지 않길 바랐던 것 같다. 청춘의 문이 단지 물리적 나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청춘만 꿈이 있고 아름답더냐. 중년도 노년도 나름의 꿈이 있고 어울리는 일이 있고 충분히 아름답다. 나이를 이기려고 억지 쓰는 것이 도리어 추하다. 청춘의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조심스레 열고 있다.

“황소”보러 갔다가 “청춘의 문”에 빠짐을 기록한 2014년 일기


그림을 잘 모른다. 어떤 작품이 잘 그린 그림인지 알아보는 눈을 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끔 마음에 훅 들어오는 그림을 가끔 만난다. 이만하면 됐다.


친구가 낸 과제를 제출할 시간이다. 최근에 우연히 쏜애플의 “시퍼런 봄”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도입부의 기타 연주와 노랫말이 참 좋다. 청춘을 한글로 풀어 시퍼런 봄이란다. 시퍼런 노래를 감상한 김에, 이번에는 내 인생 최고의 그림으로 천경자 화가의 “청춘의 문”으로 하겠다. 다음에는 다르다. 그야말로 그때그때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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