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내 자리로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다가 어떤 호명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 이름이다. 두리번 눈이 마주친다. “어디 다녀가요?” 낯익은 얼굴, 모르겠다. 카메라 렌즈처럼 그 사람을 바라보다 뒷사람에게 밀려 계속 가야했다. 누구지... 꽤 한참 뒤에야 번쩍 생각났다. 세상에, O선생님이잖아! 정체성 따위 조금도 필요 없었던 45일 맞구나. 그렇지만 너무했다, 이럴 수가! 죄송해서 어쩌지, 문자가 있잖아. 오오
‘정말 너무 반가우면 말이 안나오나 봐요ㅎ_ㅎ 이따가 뵈요~’
잘 했어, 꽤 약삭빠른걸.
그림 따라 표류하며 a를 잊었다
잡아채는 순간 흐려지는 메시지
맞추자마자 흩어지는 기호와 문자들 사이사이
엄마와 아버지를 충분히 만났고 싸웠다
늦은 대로 확실히 호명하여 살린 다음
다시 잘 이별할 수 있었다 용서가 시작되었다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하듯 부모란
떼어내야 하는 나의 머리임을 불현듯 깨닫는다
이름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것임을
겨우 알았으나 훤하게 안다
떼어내진 머리는 이미 벌써
상징이 되었음을 정말로 안다
오래 걸렸다
너무 헤맸다. 나는 늦둥이 지진아 바보. 아이들과 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던 오랜 세월, 왜 공부 못하는 꼴통들이 전혀 밉지 않았는지 잘 알겠다. 그렇게도 알아먹지 못할 수 있을까 갸웃. 이해하기 어렵도록 남다른 더딤과 엉뚱함이 놀라웠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 특별함이 사랑스럽고 예뻤다. 그 꼴통이 나였던 거다. 나는 나를 사랑했던 거야. 아이들을 가르침으로써 나를 가르쳤던 것임은 일찍이 깨달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함으로써 나를 예뻐했음은 지금 알게 된 겨, 살맛나는 깨달음!
a 때문에 실패하고 a 덕분에 성공했으니
나를 거름지게 소화시키는 중
모든 나를 용서한 셈, 발바닥이 따스하다
애도에 성공했다 하하 하하하하하
우유빛 벽이 걷히면서 외부가 들어온다
불완전한 세상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구멍투성이 세상으로 보이는 타자들은
도래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다
‘용서는 덤으로 주기’라고 크리스테바는 말하지만
나는 뭘 달라고 한 적도 받은 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받은 게 없는데 덤까지 주라니 어불성설 그러나
땅에서 숨 쉬는 자들은 이미 충분히 받은 거다
또한 알게 모르게 주었으니 또 줄 수 있는 거다
나아가 ‘죄와 벌의 성스러운 중단이 용서’라고 말할 때는
주기도문이 자동 떠오르니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구절은
내가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겁주기
무조건 용서하라는 우아한 협박 같았다
일방적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게 사랑이라는 말일 터, 증오와 복수
죄와 벌, 법과 위반의 악순환을 중지시키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말
사랑은 모든 폭력을 중지시키는 진정한 폭력이자
유일한 폭력이라는 말이 가능한 거다
법을 완성시키러 왔다는 예수의 말을 알아먹겠다
법의 결핍 사이로 정의가 흐르며 그것의 완성은 사랑
사랑 없이는 모든 게 뻥이라는 말
무시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는 없는 진리
그 사람 자체로 다 수용되고 마는
이상한 상태로의 변화, 존재론적 변화
그가 지녔다고 확신해 마지않았던 보물이
해골이었음을 알고도 가능한 사랑
진정한 윤리적 전환, 그저 한 때
나의 핵을 돌게 했던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밖에서 온 줄 알았던 그것이 내 안의 것이며
나의 일부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
그리하여 나의 시작인 동시에
끝 또는 완성에 힘차게 서명하는
웃음이... 가능할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