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관계자분께- 이지 라이팅Easy Writing
영국 범죄드라마 <콜래트럴 이펙트Collateral>를 최근에 다시 보았다. 볼 게 마땅하지 않다 싶을 때는 영국 드라마를 다시 본다. 37°C에 가까운 인간적 측면들을 잘 담아낸 작품이 많아서다. 인간에 대해 달리, 더 깊고 새로운 삶의 층위들을 사유할 수 있는 틈을 내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 드라마 4화에서 산드린 대위가 책상 위에 올리는 봉투 겉면에 쓴 글자가 눈에 띄었다. ‘To whom it may concern’. 어어, 저거 저거... 자막이 떴다. ‘관계자분께’. 이런! 이게 읽히다니, 처음 볼 때는 전혀 몰랐는데! 신기하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본 영화. <로만 J 이스라엘, 에스콰이어Roman J. Israel, ESQ.> 2017. 던젤 워싱턴과 콜린 파렐 주연. 전혀 서로 모를 것만 같은 두 배우의 조합이 신선하고 궁금해서 보는 중에 귀로 쏙 들어온 통문장 하나. “To whom it may concern.” 이것 봐라? 톡! 터지는 웃음. 신기하다... 아기 입에서 엄마,라는 소리가 나오려면, 완전히 제것으로 만들기까지는 몇 번을 들어야 할까, 삼백 번?
이 일화가 내게 유난히 인상적인 까닭은, ‘말을 알아야 귀에 들린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든 ‘사건’이기 때문. 뜻을 모르는 상태로 그냥 듣기만 해서는 소용 없다는 것. 단어든 관용어구든, 의미를 가진 덩어리 하나의 뜻과 소리를 알아야만 들리고 이해하게 되는 거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 ‘이지 라이팅Easy Writing’에서 이 통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공식 같은 이 표현이 신기하긴 했으나 아득히 멀게 느껴졌으므로 내 놀라움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무수한 드라마를 보면서도 자막 읽느라 바빠서 눈알이 빠질 뻔했던 이유를 마침내 알게 된 거다.
영어만이 아니라 생의 전반에서 지진아였던 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들을 두루 구경하고 간접적으로 살아보고 싶어서 보기 시작한 세상의 모든 드라마들이었다. 갖은 인생, 갖가지 인물을 만나며 그 맛과 멋을 온전히 즐겼던 긴~ 시간. 뻑뻑하고 건조한 눈, 시력급감. 아이고, 자막 좀 덜 읽을 수 없을까. 그러다 문득, 3년을 넘게 줄곧 봤는데 어쩌면 이리도 들리는 게 없을 수 있나! 갑자기 영어가 들리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너무 안 들렸다!! 물론 만만한 걸로 더러 줍기야 했겠지.^^
^^ ‘이지 라이팅’은 쓰기다. 쓰려면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하니 쓰기, 말하기, 듣기가 같이 간다, 읽기까지. 영작이 쉬울 리 없으니 틀리고 지우고 고치며 바쁘다. 한편 어려울 것도 없는 영어 레고 놀이. 환상의 짝꿍 마유와 세리나, 명실상부한 공동진행자. 미소를 부르는 장난기, 명랑한 위트, 생동감 속에서 갖가지 내용의 구문을 활용, 입말과 글말 문장들을 만들고 실감나게 말해 본다. 이런 말을 이렇게 하는구나, 금방 잊어도 다시 만나며 이미 내 안에 쌓이고 있음을 안다. 다른 강좌를 듣거나 영화를 보다가 어느 날 툭툭 발견되는 말들. 마유와의 진행 중에 세리나가 속속 던지는 짧은 일상 영어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즐거움. 진행자들의 노력과 강의의 발전이 느껴지는 강좌다. 마유의 우리말이 더 자연스럽고 정확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자주 고개를 들긴 하지만.
여러 강좌를 듣다 보면 같은 단어·어구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 그게 공부의 묘미다. 조금씩 다른 맥락 가운데 비슷하지만 다른 설명들이 모여 제대로 된 이해에 이르게 된다. 여러 교사가 힘을 합하여 한 단어나 구절에 대한 뜻과 사용법을 완성시켜 주는 셈이다. 두세 강좌에서 같은 날 같은 구동사를 다룬 날이 몇 번 계속되던 때, 나는 교재를 쓸 때 강사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줄 알았더랬다. 그것이 모닝스페셜Morning Special까지 이어 등장할 때는... 랄랄라~
내게 날아와 안기는 동시에 어느새 나를 버리고 떠나간 무수한 말들,은 다시 천천히 내게로 돌아온다. 회귀할 때마다 나와의 관계는 달라지며 이미 달라져 있음을 발견해 간다. 드라마와 영화, 이제 조금씩 눈은 덜 바쁘고 귀는 예민해지는 중. 가만히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