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홍철호, 박석호, 기자회
저는,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 1호기자’를 자부하는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이 자초한 치욕이라고 봅니다. 평소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대통령실 고위 인사가 출입 기자가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을 ‘무례하다’라고 깔아뭉개는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겠습니까?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 비서관의 ‘무례 발언’은, 윤 정권의 고압적이고 저급한 언론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언론인에 대한 모욕이자 겁박입니다. 윤 정권이 한국 언론에 새겨 놓은 ‘주홍 글씨’입니다. 기자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 이 글씨를 지우지 못한다면 한국 언론은 영원히 ‘권력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윤 정권의 고압적인 언론관 보여준 홍철호 정무수석 발언
먼저, 홍 수석의 무례 발언이 나온 경과를 살펴봅시다. 윤 대통령이 10월 7일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임기 절반에 맞춘 회견이라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여론의 관심은 온통 ‘명태균의 폭로’와 ‘김건희 추문’에 대한 윤 대통령의 반응에 쏠려 있었습니다.
회견 전날, 대통령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끝장 회견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자회견 시간 대부분이 추상적 사과와 변명, 자랑, 부인 사랑만 늘어놓는 윤 대통령 주연의 ‘모노드라마’로 흘러갔습니다. 120여 분 동안의 회견 중 26명의 기자가 질문자로 나섰지만, 핵심을 추궁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려댔습니다.
그중 오직 한 사람, <부산일보>의 박석호 기자가 모든 사람의 잠을 깨우는 질문을 하고 나섰습니다. ‘59분 장황설 대통령’에게 두루뭉술하고 포괄적으로 사과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사과했는지를 날카롭게 따져 물었습니다. 당황한 윤 대통령이 횡설수설하며 답변하는 모습을 지켜본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의 질문이 없었다면 이날 기자회견은 맹탕이 됐을 텐데, 그나마 그가 대통령실 출입 기자 전체의 체면을 살려줬다는 평가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박석호 기자의 송곳 질문이 대통령실엔 ‘시정’ 대상
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아부와 무조건적인 충성을 생명으로 삼고 출입 기자를 ‘대통령실 홍보 요원’ 정도로 아는 대통령실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던 모양입니다. 홍 수석은 19일 국회 운영위 답변에서 “그 부산일보 기잔데요. 그 기자가 대통령에 대한 무례라 생각한다. 대통령이 사과했는데 마치 어린아이한테 부모가 하듯이 뭘 잘못했는데 하는 태도는 시정해야 한다”라고 꾸짖듯 말했습니다. ‘무례’와 ‘시정’이란 단어로 대표되는 이런 인식은 답변 장소와 홍 수석의 위치를 고려할 때 대통령실의 집약된 의견, 더 나아가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문제 발언을 내뱉고도 그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모욕의 대상이 됐던 대통령실 기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대통령실의 위세와 기자의 자존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항의하는 척만 하고 끝났다는 게 저의 감상입니다.
대통령실을 담당하는 기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구성돼 있습니다. 가장 핵심에 대통령실 행사를 돌아가며 조를 짜 취재하는 중앙기자실 풀 기자단이 있습니다. 40여 개 사가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다음에 지역 언론사 기자들로 이뤄진 지역기자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기자단에 소속하지 못하고 담당만 하는 수많은 언론사의 기자로 구성된 등록기자단이 있습니다. 박 기자가 속해 있는 곳은 지역기자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응도 가장 빨랐습니다. 20일 지역기자단이 입장문을 낸 것을 시작으로, 21일 등록기자단 중 41개 사와 중앙기자단이 잇달아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실 기자단 중 중앙기자단이 가장 미온적 대응
겉만 보면, 기자들이 대통령실의 모욕에 모처럼 결연하게 집단 항의에 나선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낸 입장문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면 항의와 책임 추궁, 사과 요구가 아니라 유감 표명이 최대 공약수였습니다. 세 기자단이 낸 문서의 제목이 모두 ‘입장문’이라고 돼 있는 데서 그들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기자단에서 가장 핵심 세력인 중앙기자단의 입장문이 가장 늦게 나왔을 뿐 아니라 강도도 가장 약했습니다. 그만큼 중앙 언론사와 대통령실의 유착이 심하다는 걸 내비쳐주는 것이 아닐까요.
중앙기자단은 4개의 항의 가장 짧은 입장문을 내면서, 세 번째 항을 “홍 수석은 해당 기자와 출입 기자에 사과했다”라는 문장으로 채웠습니다. 그러나 홍 수석은 해당 기자와 출입 기자에게 직접 사과한 바 없습니다. 기자단 카톡방에 대변인실 이름으로 사과를 담은 글을 올려놨을 뿐입니다. 박 기자도 ‘직접 사과받은 적이 없다’라고 확인했습니다. 중앙기자단은 4항에서, 홍 수석이 사과했는데도 입장문을 내는 것은 향후 유사 상황의 재발 방지, 대통령실의 건강한 언론관 함양 촉구, 기자의 사회적 의무 및 역할 고취 차원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발언의 심각성에 비추어 세 가지 이유라는 것도 가당치 않지만, ‘사과했기 때문에 굳이 입장문을 내지 않아도 되지만’이라는 투의 전제를 단 것에 경악했습니다. 실컷 두들겨 맞고도 내가 봐준다는 식의 ‘정신 승리법’적인 언론관의 발로라고 할 만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번 무례 발언을 대하는 대통령실 기자단의 인식 수준이 대통령실 밖 기자들과도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자사회를 불신하는 일반 시민의 눈높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요. 한마디로, ‘1호 기자들의 인식’은 언론계에서 윤 정권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비판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당연한 질문이 무례하다니 왕정 시대의 정무수석인가”라고 질타한 것과 비교만 해봐도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기자들이 ‘권력의 노예’에서 벗어나려면
“저널리스트의 사명은 공직자를 격분시키는 데 있다.” 오래전에 언론학자인 김우룡 교수가 쓴 <뉴스와 콩글리시>라는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치면서 메모해 놓은 문장입니다. 홍 수석이 언론계 전체를 대상으로 이렇게 무례한 ‘무례 발언’을 맘 놓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직자를 격분시키기는커녕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질문과 행위에 익숙해진 기자들, 특히 대통령실에 출입하는 ‘1호 기자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큽니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해도, 같은 동료 기자가 비판 기사를 썼다고 대통령 전용기에 태우지 않아도, 시민사회 수석이 회칼 테러를 들먹이며 간접적으로 기자를 협박해도, 대통령실이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대도 정색하며 따져 묻지도 따끔하게 항의하지도 않고 그저 그들이 말하는 대로 받아쓰는 데만 급급한 1호 기자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기자단 카톡방 알림에 사과를 올려놓고 사과를 했다고 하고, 기자들이 그것을 진짜 사과로 받아들이는 일이 천연덕스럽게 벌어지는 게 아닙니까?
저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실 기자단이 언론의 책무를 부정한 ‘반 언론·반 민주주의자’인 홍 수석의 사과와 사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번에도 얼렁뚱땅 넘어가면, 대한민국 기자들이 ‘권력의 노예’, ‘기레기’라는 오명을 벗어나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