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전쟁>, 김정섭, 태평양전쟁, 우크라 전쟁, 대만 전쟁
전쟁만큼 국제정치의 냉엄하고 참혹한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사건은 없다. 전쟁이야말로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라는 격언을 가장 잘 실감 나게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전쟁에는 도덕도 피도 눈물도 없다. 오직 전쟁을 벌이는 국가들의 살벌한 국익만 난무한다. 이 와중에 전쟁에 연루된 약소국들과 죄 없는 민간인의 희생이 덤으로 따라온다.
<세 개의 전쟁-강대국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프시케의숲, 김정섭 지음, 2024년 4월)는 강대국의 이전투구가 날것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이라는 창을 통해,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정치의 희생물이 되기 쉬운 한국이 어떡하면 전쟁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을까를 탐색한 책이다.
이 책을 쓴 김정섭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전쟁과 평화'의 이론과 실제에 두루 정통한 국방 관료 출신의 국제정치학 박사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석사,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방부와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국방·안보 정책을 담당했다. 저자의 이런 배경 때문인지 책 내용이 순수한 학자가 쓴 것보다 현장감이 풍부하다. 또 일반적인 관료 출신이 쓴 것보다 이론적이다.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3개의 전쟁은, 과거(20세기 중반)에 이미 일어난 태평양전쟁,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미래 일어날지도 모르는 대만 전쟁이다. 저자는 모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이면서 지정학 충돌의 성격이 있는 전쟁을 골랐다고 밝혔다. 더욱이 세 전쟁 모두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이 주역이다. 저자는 "전쟁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 국제정치의 본질을 생각해 보고자 했기 때문"에 이들 전쟁을 택했다면서 "세 전쟁을 통해 강대국 정치의 민낯을 이해한다면 대한민국 외교·안보를 생각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라고 집필 의도 밝혔다.
상호 직접적으로 연관성이 없으며, 갈등의 주체도 다르고, 충돌의 무대도 다른 3개의 전쟁에서 저자가 끌어내려는 것은, '강대국 사이의 세력권 충돌'이 이들 전쟁의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즉, 강대국들이 자신의 이익선을 다시 긋기 위해 폭력을 동원해 싸웠고 싸우고 싸우려는 것이 이들 세 전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3개의 전쟁을 도덕이나 규범의 잣대보다는 주로 힘과 세력균형 관점에서 다룬다. 태평양전쟁은 미국보다 12배나 경제력이 뒤지는 일본의 치명적인 선택과 미국의 대응을 중심으로 분석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냉전 이후 유라시아 지정학을 둘러싼 미-러 대결에 초점을 맞췄다. 대만 전쟁도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미-중 대결이라는 관점에 집중했다.
저자가 도덕이나 규범이 아니라 힘과 세력균형에 집중해 이들 전쟁을 분석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다음의 문장을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강대국 정치의 적나라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런 냉엄한 현실에 둔감한 한국의 외교에 자극을 주려는 위악적인 뜻이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한국 외교에는 지정학적 사고의 전통이 미약하다. 지정학 공간을 둘러싼 투쟁을 벌일 만큼 강대국이 아니었고, 복수의 국가들을 자신의 국익에 맞게 배열하고 관리해 나가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강대국은 항상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지정학적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중략> 강대국의 세력권이 부딪히는 중간국인 한국이 지정학적 사고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큰 문제다. 적어도 강대국이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지, 유사시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강대국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세상을 보는 것, 그래서 우리도 한번 제국의 시선으로 국제정치를 이해해 보자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다."(12~13쪽)
본문은 1부 태평양전쟁, 2부 우크라이나 전쟁, 3부 대만 전쟁으로 돼 있다. 각 부는 먼저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흐름을 다룬 뒤, 국제정치학적인 분석을 하는 식으로 서술돼 있다. 그리고 전망 내지 예측, 혹은 해법을 제시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백미는 세 개의 전쟁을 통해 한국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를 정리한 결론 부분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강대국은 패권의 논리, 제국주의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본다. 또 강대국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이것은 상황에 따라 파트너를 활용하여 주적을 견제하고, 그 과정에서 냉혹할 정도로 주고받기식 거래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강대국은 특정 사건에 개별 대응하기보다는 전체의 국면을 보며 바둑알을 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친구나 적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국제정치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거나, 전쟁과 폭력을 규범적 일탈로 해석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강대국 정치의 냉혹한 무대에서 한국이 국가의 안전보장을 담보하고 번영의 길로 나아가려면 올바른 지정학적 방향과 균형감각을 갖고 미-중 전략 경쟁의 시대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의 세계를 미-중 신냉전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중-러, 글로벌 사우스가 3분해 지정학적으로 경쟁하고 대결하는 시대, 국제사회의 대전환기 상황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지나친 진영외교를 자제하고, 국익에 중심을 둔 유연 외교를 할 것을 주문한다. 특히, 미-중 사이에 대만 전쟁이 벌어질 경우 전면적으로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동아시아 세력균형 변화에 대비해 역내 국가들과 긴밀하게 연대하되, 결국엔 중국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 인식에 기반한 '연성 균형'을 한국이 취할 적절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무거운 내용이지만 국제사회의 세력이 재편되고 있는 대전환기에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유익한 책이다. 더욱이 트럼프 2기 미국 정권에서는, 강대국 사이에 밀고 당기기 싸움이 어느 때보다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기에 바짝 정신을 차리고 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