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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Dec 18. 2024

<시사 칼럼> 윤석열 탄핵 이후 '3대 과제'

명태균은 윤석열을 ‘권총을 들고 있는 다섯 살짜리 꼬마’, ‘장님 무사’에 비유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가라고 해도 윤석열의 위험성을 이보다 적확하게 짚어내는 표현을 찾아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대한민국과 세계 시민들은 12월 3일 밤부터 열하루 동안 권총 든 다섯 살 꼬마가 벌이는 끔찍한 광란극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지켜봤습니다. 12월 14일 저녁,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함으로써 한 미치광이의 칼춤을 일단 멈춰 세웠습니다. 시민의 포위와 응원 속에서 국회가 그로부터 흉기를 빼앗는 데 겨우 성공했습니다.

     

그때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전국의 광장은 순식간에 안도와 성취의 함성으로 뒤덮였습니다. 경쾌한 케이 팝의 선율에 맞춰 휘황찬란한 응원봉이 물결쳤습니다. 광장의 주역은 어느덧 10대와 20대의 발랄한 남녀 청춘들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60대 중반인 저도 국회의사당 앞 길거리에서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습니다. 운동가요와 디지털 촛불 정도밖에 모르는 저에겐 매우 충격적이고 경이로운 장면이었습니다.   

   

노인과 젊은이의 ‘노학 연대’ 이룬 탄핵 광장     


일본의 대표적인 전후 지식인 중 한 사람인 가토 슈이치(1919~2008년)는, 일본의 사회운동이 내리막을 걷던 1970년대에 ‘노학 공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노학 공투라고 하면, 보통 노동자와 학생의 공동투쟁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노학 공투는 노인과 학생의 공투입니다. 밥벌이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노인과 학생이 힘을 합쳐, 꺼져가는 일본의 사회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아이디어입니다. 그의 꿈은 일본에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윤석열의 12.3 내란 사태에 저항한 한국의 광장은 가토 슈이치의 꿈을 이룬 무대였습니다. 독재와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노인네들과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에 살길 바라는 젊은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습니다. 서로 타박하던 노인네들과 젊은이들이 “너희들이 나와줘서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어르신들의 희생과 노력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격려했습니다. 저는 윤석열 내란 사태가 한국 사회에 준 가장 큰 선물이 있다면, 바로 세대 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네들은 젊은이들이 자신만 아는 개념 없는 개인주의자가 아님을 알았고, 젊은이들은 노인네들이 민주화 이력만 내세우는 욕심쟁이 기득권세력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12.3 내란 사태는 한국 사회에 ‘의외의 선물’도 가져다줬지만,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숱한 과제도 남겼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과제가 많지만 긴급하고 중요한 것 세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검찰과 사법 개혁입니다.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킨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가장 마지막에 부딪히는 곳이 20대 대선 결과에 대한 윤석열의 수용 태도입니다. 그는 불과 0.73% 차이로 승리했으면서 마치 ‘100% 승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대선의 경쟁자였던 이재명 대표를 감옥으로 보내는 데만 혈안이었습니다. 그가 비상계엄령 발동의 이유로 열거한 민주당의 ‘탄핵 남발’, ‘입법 농단’, ‘예산 농단’은 모두 어불성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들은 계엄 발동의 이유가 아니라 야당 적대 정책의 산물입니다. 더욱이 야당은 헌법의 틀, 법률의 틀 안에서 행동했지만, 윤석열은 헌법을 어기며 야당과 국회를 군홧발로 짓밟으려고 했습니다.     


검찰과 법원, ‘시민 통제’ 강화해야     


검찰과 법원은 내란까지 자행한 윤석열을 철저하게 뒷받침해 친위대였다고 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검찰은 윤석열 일당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이재명·조국 등 윤석열의 적에게는 한없이 가혹했습니다. 기소권과 불기소권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며 윤석열을 떠받쳐 줬습니다. 법원도 ‘윤석열 검찰’이 자의적으로 기소한 것을 그대로 추인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바이든-날리면’의 <문화방송> 1심 유죄 판결과 대장동 50억 클럽의 곽상도 전 의원 무죄 판결은 지울 수 없는 법원의 대표적인 부역 행위입니다.    

 

국회의 탄핵으로 윤석열의 힘이 빠지자, 검찰이 돌연 승냥이처럼 표변해 그를 사냥하러 나섰습니다. 법원도 내란 사태가 터질 땐 잠잠하더니 판사 체포 명단이 나오자, 성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국민은 속지 않습니다.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시류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걸 그냥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을 겁니다. 이참에 검찰과 법원을 ‘시민의 통제’ 아래 두는 방향으로 꼭 뜯어고쳐야 합니다.     


둘째는 언론 개혁입니다. 대선 때 언론이 후보 검증을 철저하게 했다면 과연 윤석열이 대통령이 됐을지 심히 의문입니다. 윤석열의 등장과 함께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송하는 보도를 생산했던 조·중·동 등 친윤 언론은 탄핵 사태를 계기로 안면을 싹 바꾸고 있습니다. ‘나도 비판했다’라는 면책 알리바이 만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해온 편파, 왜곡 보도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성도 없이 말입니다.     


부역 언론엔 철퇴, 독립언론엔 박수를    

  

그들은 검찰에서 윤석열이 저질렀거나 저질렀을 가능성이 큰 고발 사주 사건, 한명숙 전 총리 모해위증 교사 의혹 사건, 김학의 출국금지 사건 등에 관해 철저하게 눈을 감고 윤석열의 편을 드는 보도를 해왔습니다. 대통령실에서 ‘날리면-바이든’ 사태와 관련해 <문화방송> 기자의 전용기 탑승을 배제해도,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언론의 질문을 ‘무례하다’라고 비판해도 항의다운 항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실에서 김건희를 미화하는 홍보용 사진을 제공해도 문제를 삼기는커녕 넙죽넙죽 받아쓰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윤석열이 내란 사태를 일으키면서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와 <문화방송> 등에만 군대와 경찰을 보낸 건, 다른 언론사는 이미 다 우리 편으로 만들어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정보통신 환경이 급변하면서 언론사의 규모가 모든 걸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작은 언론사라도 소금과 목탁의 역할에 충실하면 신뢰를 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진작 이런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이번 내란 사태로 그 경향은 더욱 빨라지고 거세질 겁니다. 객관·중립이라는 허명에 빠져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은 철퇴를 맞고, 시민의 관점에서 투명하게 진실에 접근하는 언론은 박수받을 겁니다. 언론이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면 시민의 손으로 반드시 이뤄내야 합니다.     


‘1997년 체제’ 극복에 온 힘을 기울여야    

 

윤석열의 내란을 진압한 무기는, 1987년 민주화의 바람을 업고 개정된 6공화국 헌법입니다. 그때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철폐 등 국회의 불가침성을 강화해 놓지 않았더라면 군대와 경찰이 국회를 손쉽게 유린했을 것이고, 지금 한국은 윤석열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을 터입니다. 이런 면에서 정치 민주화의 성과물인 1987년 헌법이 대한민국을 야만에서 구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현실은 1987년 체제에 고마움을 표시할 여유가 없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경쟁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 공공과 복지의 축소를 불러온 1997년 금융위기의 폐해가 너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1997년 체제의 그늘입니다.     


윤석열 탄핵 이후 한국 사회가 가장 공을 들일 분야는 뭐니 뭐니 해도 1997년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 민주화를 제도화한 1987년 체제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1997년 체제에서 탈출하는 사회·경제 민주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번 탄핵 광장에서 싹이 튼 노학 연대, 세대 통합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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