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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의 일기장 Jan 11. 2022

시작이다

나는 누구인가?...또 여기는 어디인가?....

시작이다...     

첫 시작을 알리는 소리는 뚜... 뚜.... 뚜.... 긴장음 같은 고요함이다.

얼마만에 내 공간에서 타다타닥 키보드를 누르고 있는지 기억도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하필 이때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곡이 조성모의 ‘아시나요’...

‘아시나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

내 맘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첫 구절이다...


매일 음식을 해대느라 뜨거운 화구와 씨름을 하던 내가 차디찬 금속 성질의 컴을 켜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다. 흠짓 놀랐다. 팔목에 닿는 차가운 느낌은 마치 얼음장 같은 얼얼함이었다.

내가 작년 가을 25년 만에 다시 붓을 들었을 때 나의 아이들이 “엄마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어요?”라고 하며 고개짓을 하던 때처럼 지금은 “엄마 글 쓰는 사람이었어요?”라며 갸우뚱해 한다. 그동안 우리 아이들에게는 엄마는 밥짓는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니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나를 비방하거나 쉽게 여겨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동안 내가 내 자신을 위해 더 빨리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 먼저 됐다.


13년 전 결혼을 하기 전 나는 꽤나 적극적으로 내 삶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박사님, 교수님, 편집장님, 디자이너님, 작가님, 에디터님, 기자님, 선생님, 디렉터님 등 수많은 수식어를 내 이름 앞에 달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매보다 더 닮은 얼굴을 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여느 사람들보다 조금 늦은 결혼 탓에 서둘러 임신과 출산에 집중하다보니 쉴틈없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는 엄마, 아내, 며느리, 딸이라는 타이틀로 나를 부르는 서두를 바꾸어 가며 또 다른 나의 삶을 살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삶의 형태를 바꾼다는 것이. 하지만 난 나름 꽤나 그런 나의 삶의 변화를 즐겼던 것 같다.

눈에 넣으면 아프겠지만 눈에 담으면 한없이 예쁘고 귀하기만 한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 보는 하루하루가 풍성했고, 3남매의 막내로 매일 애취급 당하며 살던 내가 주도적인 한 가정의 안주인되면서 뭔가 감투를 제대로 쓰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동갑내기 내 반쪽은 가족지향주의 사람이고, 나의 이 삶의 변화를 주도한 제1 주도자이기도 하다. 그 책임을 십분 공감하며 최대한 나의 변화에서 겪고 있는 공황장애를 같이 겪어주면서 줄여주려고 꽤나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줄 알았다. 내가 꽤나 즐기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진심 즐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이 조금 자기 앞가림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 삶의 아주 티끌만한 여유로움이 찾아 왔을 때인 것 같다. 하루에 한 주시간 남짓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양가 부모님을 기웃거리며 챙기다 어느 날 나만의 시간이 조금씩 주어지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그 낯설음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며 방황했던 기억이 있다. 몸이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낮잠이라도 청해 늘어지고 싶었지만 그 시간이 너무 귀해서 차마 꺼지고 있는 눈커풀을 그대로 내려 놓을 수 없어 쓴 커피를 머그잔 가득 내려 마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생각없이 조금 눈이라도 붙일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뭔가 궁핍했던 나의 상황이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낯설음에 방황했고 그 주어짐이 조금씩 익숙해져 갈 무렵 내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던 작은 울림이 있었다. "너는 누구니? 너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라는 물음이 계속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였지?".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세요? 뭐하는 사람이예요?"라고 내 면전에서 질문을 던진다면 난 뭐라고 답을 해야하지?라고 생각하니 내 머릿 속은 삽시간에 블랙아웃된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꽤나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말해 왔던 나였는데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빈깡통이 된 느낌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고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건 아주 잠깐이었고, 나의 이런 감정은 쉴틈없이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아무 대답도 떠오르지 않는 이 상황에 당황한건 물론 대답할 수도 없는 심정이 내겐 정말 최악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나를 말할 수도 지금의 나를 말할 수도 없는 온통 나를 부정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을 때 순간 좌절이라는 검은 단어밖에는 대신할 수 없는 우울함이 나를 꽁꽁 묶어버렸다.


나답지 않은 나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았던건 분명했지만 난 늘 나 다웠던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단 한번도 내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았었고, 잃어버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할 수만 있다면 붙들고 버티고 싶었던 것이다. 양 쪽 무릎에 연년생 두 아이의 머리를 누이고 분유병 꼭지를 물렸던 순간에도 두 시간에 한번씩 쪽잠을 깨서 반쯤 풀린 눈으로 손등으로 우유 온도를 맞추는 정성으로 아이를 품에 안았던 순간에도 나보다 뒤에서 달려오던 후배가 내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난 나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었나보다. 난 단한번도 내 모습을 그리워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것이다.


숨통에 숨줄이 간신히 붙어있어 호흡이 깔딱거리고 있을 때 "아~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하지? 숨이 잘 안쉬어지는데 어떻하지? 나 심장이 고장났나봐". 끊임없이 나 자신을 불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하는 생각은 끝이 없었고, 이유를 모르니 인터넷 검색창에 내가 느끼고 있는 증상들을 묻고 또 묻고, 물을 수록 무서운 답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나 소리 없이 혼자 죽겠구나 싶어 떨며 찾은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을 마주하며 최선을 다해 나의 불편한 상태를 설명하려고 부던이 노력했고, 그 모습에 의사선생님은 너무나도 차분하고 태연하게 "역류성식도염이 의심되니 약처방 해 드리겠습니다. 3일 뒤에 한번 더 내원해 주세요"라는 상상 밖의 대답을 토해 내셨다. "살았다~"라는 안도감 보다는 "뭐야~ 나 죽을 것 같았는데" 한국인의 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다는 역류성식도염이 나를 그렇게 불안하게 했던 이유였다니 허무하기도하고 어이가 없어 팔다리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하루 정도 처방 받은 약을 먹고 있으려니 가슴에 느껴졌던 통증도 사라졌고, 잠도 좀 편안하게 잘 잔것 같고, 식도에서 기분나쁘게  느껴졌던 지릿함도 사라졌다. "아... 나 그냥 역류성식도염이었네..." 큰 병이 아니었던 것에 대한 감사보다도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하고 불편했는지가 궁금해 지기 시작한 시점이 되었다.


나는 나의 이 불안함과 불편함을 누군가에게 털어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고, 아무 일도 없이 잘 살고 있노라 알고 있는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는 동네 지인들에게 갑자기 "나 괜찮지 않은 것 같아"라고 내 뱉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뜬금포를 날리며 나 좀 바라봐 줘라는 관종 소리를 듣게될까봐 염려가 됐던 것 같다. 그럼 어쩌지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두 아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안방으로 들어 온 내 반쪽이 내게 말을 건넸다. "여보 뭐 가지고 싶은거 없어? 결혼기념일도 다가오는데 내가 하나 선물해 줄게"라고 묻는다. 나는 갑작스런 물음에 "선물?"이란 되물음의 두 글자를 남긴채 잠시 생각에 빠져 들었다. 이 사람한테 내가 어떤 선물을 받고 싶어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계속 던졌다. 난 그 때 선물보다 내 얘기를 하고 싶으니 들어달라고 했고, 기꺼이 나의 요구는 속이 좋지 않은 나 때문에 와인은 아니었지만 물 한 잔과 함께 우리 두사람을 마주 앉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두서없이 그리고 엄청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아마도 나 못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 준 그 사람에게도 분명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서가 아닌 그 자신의 삶에 대한 그리움도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작고 동그란 노란 테이블에 놓여진 두 개의 물잔은 우리의 얘기들을 토해낼 수 있게 그리도 차분하게 기다려 주고 있었고, 난 내 속내를 하나씩 둘씩 차분하게 털어 놓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제대로 즐기지 못하며 최선만을 다해 살았왔다가 과부화가 걸려 요즘 사람들 말처럼 번아웃이 된 것 같다고 고해성사를 해 버렸다. 담담하게 내가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듣는 중간에는 내 한 쪽 손을 잡아주고 뒤통수를 한번 쓰다듬어만 주며 손바닥의 손기를 전하는 정도였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내 얘기를 모두 다 듣고 나서 내민 첫마디는 "미안해"였다. 나의 이 심경이 모두 그사람의 탓이라 미안해 했던 것이 아니라 내 얘기를 이제야 토해내게 해서 이제야 들어줘서 미안하다는 얘기였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말한 나보다 더 어둡고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러다가는 오히려 내가 또 다시 미안해져서 내 마음의 힘듦이 미안함으로 희석될까봐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미안함이 아니다. 이건 나를 이해해줌에 대한 고마움이다라고 생각했다. 고마움이었다. 그래 그건 고마움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고, 분명했던 것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 공유했던 이 시간을 통해 최소한 외로움에서는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시그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진작에 토해낼걸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이 제일 빠른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참이나 다행이었다. 그는 천천히 체하지 않게 나의 모습을 찾아가자고 제안해 주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학생을 가르치고 세상 밖에서 나를 보여주고 살았던 나의 모습을 되찾아 가자고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없었지만 뭔지모를 희망의 설레임 같은 간지러움이 느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은 기분이 좋았지고 있었다. "그래. 천천히라도 다시 시작하자.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다시 내 모습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고, 어쩌면 더 나은 나의 모습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라는 두근거림으로 우리 두사람은 다음번 대화를 기대하며 서로를 꼭 안아 주었다.


지금부터 나는 다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여기는 어디인가?...

이것이 나의 시작을 알리는 첫번째 생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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