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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의 일기장 Jan 11. 2022

엄마의 미역국

엄마에게도 생일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1년에 단 하루 있는 생일.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부른다.

매 년 새해가 되면 새해 캘린더에서 가장 먼저 달력을 넘겨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 날도 생일.

그렇게 늘 365일이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 오는 생일날 엄마가 끓여주던 미역국은 그냥 맛있는 국이었다. 생일을 알리는 신고식 같은 밥상의 터줏대감이었다.

친구를 초대해 주고 기꺼이 평소에는 잘 누리지 못했던 것을 선물로 받으며 그 하루만큼은 꽤나 주인공처럼 만사를 누리고 지냈던 것 같다. 누구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도 않았고, 혹여라도 잘못 한 일이 있으면 생일자라는 이유로 마냥 용서가 되었던 매직같은 하루였다. 그렇게 달콤했던 기억이 절절한 나의 생일이 어느 때 부터인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늘 밥상에 올라오던 미역국도 사라졌다. 평소에도 자주 미역국을 끓여먹는 터라 그다지 미역국이 그리웠던 것은 아니지만 뭔지 모르는 공허함이 새해가 되면 내 주위를 감쌌다.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도 내 생일이 새해의 첫 달인 1월이었기 때문이었나보다.


새해를 맞이해서 여기 저기 안부인사를 드리고 집안 어른들을 챙기고 하다보면 보름 정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깜빡 정신줄을 놓고 나면 1월의 중간 언저리에 있는 내 생일을 훌떡 넘어가 버린 뒤 알아차려버리기도 한다. 충분한 축하와 함께 조공을 바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전에 종방연을 해야하는 내 생일. 어릴적 학교에 다닐 때에는 난 내 생일이 너무 싫었다. 이유는 단 하나, 생일이 방학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같으면 핸드폰을 누구나 소장하고 있어서 연락도 쉽고, 만나지 못하면 기프티콘을 팡팡 쏴주기도 하고, SNS에 귀욤 이모티콘들을 달아 적극적으로 축하메세지를 띄워주기도 하는데 내가 어린 그 시절에는 방학에 친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던 터라 생일파티는 꿈도 못꿨던 일이었다.


4월생 언니와 10월생 오빠가 난 늘 부러웠다. 복도 많지 어떻게 개학하고 부지런히 3월 한 달 친구를 사귄 뒤 4월에 생일을 맞을 수 있으며, 여름방학을 마치고 계절이 아름다워질 무렵 밖에 나가 놀기도 좋은 가을날 생일을 맞이한 오빠가 난 오지게 부러웠다. 난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왕국에다가 방학이라 친구들과 연락도 제대로 닿지 않고 신정과 구정 명절 사이에 꼬옥 낀 내생일 무렵엔 부모님들의 피곤이 어김없이 최고치에 올라 있는 상태였고, 뿐만아니라 방학이라고 시골 친척집에 머무르는 친구들은 왜이리 또 많은지... 놀이터에 놀고 있는 애들도 없었던 그 찬 겨울이 난 너무 야박하게 느껴졌다. 묻고 싶었다. 날 꼭 1월에 낳아야 했었냐고... 나의 답답한 마음을 식혀 줄 수 있는건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싱 천사 외할머니가 겨울이면 노랑 스테인레스 곰솥통에 한가득 만들어 놓은 식혜 뿐이었다. 베란다에 내 놓으면 살얼음이 얼어서 국자로 톡하니 깨서 얼음섞인 식혜를 휘휘 저어 밥알을 많이 건지려고 꽤나 노력했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한 톨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혀를 날름거리는건 내 주특기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 감주 맛을 볼 수가 없으니 가슴 한 켠이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시 먹먹해 진다.


대학을 들어가고 용돈 대신 장학금을 타서 내 마음대로 유용할 수 있었을 때부터 그래도 생일날 친구던 남친이던 함께하며, 피자도 먹고 파스타도 먹고 클럽에 가서 샴페인도 터트리고 했던 것 같다. 소위말하는 내돈내산 생일파티인 것이다. 받아 먹는 생일이 여전히 되지 못했고, 내가 제대로 쏘는 그런 생일파티인 것이다. 흠... 언제쯤 챙김 받는 생일이 오는 것일까. 있기는 하는 걸까? 의문이 깊어지기도 했다. 얼추 생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질 무렵 프랑스로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유학을 하던 우리 삼남매가 학위를 마치고 한 명씩 귀국하기 시작했고, 우리 가족이 완전체가 되었을 때 부터였던 것 같다. 그 때부터 누구를 초대하는 생일파티는 아니였지만 독수리 오형제가 단합하듯 우리 다섯식구는 생일날 만큼은 열일 제치고 함께 하기 시작했고, 생일자는 충분히 주인공으로써 과분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생일을 옹골지게 혼자 받아먹는게 쉽지가 않았다. 왜냐면 내 생일과 아빠의 생일이 불과 한 주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아 늘 한 데 뭉쳐서 2인용 생일파티를 한번에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생일상의 메뉴부터 시작해서 모든 중심에 아빠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불보듯 뻔한 상황 아닌가. 게다가 아빠는 가끔 내 생일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망각하시기도 했다. 입김이 쎈 아빠는 케이크에 꽂히 초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꺼버리기 일쑤였고, 아빠를 위한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고 내 생일 축하 노래가 반복되기도 전에 박수치며 촛불을 집어 삼키기도 헀다. 매번 이런 상황이 웃겼지만 웃는게 웃는게 아닐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정도되면 나는 생일파티와는 좀 거리가 먼 약간은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30대 끝자락에 내 생애 동반자를 만났고, 만나지 채 5개월만에 뭐가 그리 좋았는지 아니면 급했는지 눈바람 날리고 추웠던 2008년 12월에 결혼을 했고, 결혼 일주일만에 크리스마스를 함께했고, 눈깜박할 사이에 내 생일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드디어 내 생일파티를 해 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2009년의 내 생일은 내 인생 역사에 길이 길이 기록되어질 날이 되었다. 출근 한 남편이 보낸 꽃바구니가 도착했고, 퇴근길에 한 손에 들려 있는 케이크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었고, 근사한 한 끼의 외식과 선물은 기본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물런 신혼이라 좀 더 심하게 축하를 받았던 것 같다. 아무튼 익숙하지 않는 융숭한 접대에 몸둘바를 몰랐지만 생일파티라는 신세계를 맛본 것 같았다. 아! 이런게 생일자의 여유이고 행복이구나~ 싶은게 느껴지는 순간 지난 내 인생에 놓쳤던 수많은 나의 생일이 억울하기도 했다. 생일날 자정이 지나기 전까지 모두 내 맘대로 이루어지는 지니의 램프를 한 손에 쥔 느낌에 꽤나 행복했던 것 같다.


결혼한 지 12년이 지난 지금. 나의 생일은 다시 친정아빠의 생신과 묶이면 희석되어버렸다. 어느새 연년생 남매를 키우고 있는 엄마가 되어 있었고, 남편의 생일 일주일 뒤에 딸을 낳은 탓에 나와 똑같이 일주인 차이 부녀지간을 내가 만들고 만 것이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항상 아빠에게 생일을 뺏기는 딸이었는데 나의 딸아이는 어김없이 아빠의 생일을 도둑질하고 있는게 아닌가. 남편과 딸아이이 생일은 항상 묶음 행사였고, 여지없이 가족들은 손녀딸이자 조카인 내 딸아이의 생일에 더 많이 흥분하고 축하하고 기뻐해 주고 있었다. 심지어 맛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핑크핑크한 그리고 어마어마한 캐릭터들이 난무하는 케이크가 항상 중심에 있었고, 남편의 나이는 멈춘 채 초는 한 개 였다가 두 개 였다 야박하기 그지없게 늘어갔다. 촛불이라도 후 불려고하면 행여라도 아이를 울릴까봐 딸아이가 열번 스무번 불어서 혼자 다 끌 때까지 부는 시늉만 하고 있어야 했던 남편의 입모양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얼추 인생의 절반을 꾸역꾸역 지내 온 지금 난 또 코 앞에 내 생일을 두고 있다. 문득 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간다. '난 왜그리도 내 생일의 지나침에 목매여 있었을까?, 왜 엄마가 친구들을 초대해 주지 않았던 사실을 기억해 주지 못함에 여태 서운했을까?, 그리고 왜 엄마 생일파티를 하지 않았던 것은 기억하고 있지 못했을까?'. 내 생일을 생각하며 사는 동안 잊고 있었는데 엄마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먹었던 기억이 나지 않고 있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도 생일이 있었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 한 켠을 둔기로 크게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내가 엄마가 되고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데 반백년이 걸렸다는 사실에 넘 마음이 아팠다. 만약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내내 모르고 지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고, 내가 지금 내 아이들이 엄마라는 것이 찐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유독 우리엄마는 미역국을 좋아하시는데 엄마의 생일미역국은 늘 없었고, 그 미안한 마음에 난 엄마의 생일 미역국을 보상이라도 하듯 시도 때도 없이 미역국을 끓여 가져다 드린다. 아마도 엄마는 내가 왜 이렇게 자주 미역국을 끓여 드리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놓쳐버린 엄마의 생일미역국을 다 채워드리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난 오늘도 울엄마를 위해 미역이 푹 퍼지도록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도록 진한 미역국을 끓인다. 울엄마에게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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