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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의 일기장 Jan 11. 2022

언니와 나

너무 달라서 애틋한 자매 이야기

난 언니와 호적으로는 3살 차이가 나지만 실제로는 연년생이다. 그 때는 왜 그렇게 호적정리가 엉망이었는지 뭐가 뭔지 암튼 개띠인 언니는 닭띠가 되어 있고 돼지띠인 나는 쥐띠가 되어 있었다. 우리 삼남매는 모두 신촌 이대입구에서 외조부모님들을 모시고 살았었기 때문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기능올림픽에서 당당하게 수상을 한 아빠는 엄청 손재주가 뛰어난 양장 재단사셨고, 엄마는 총명하기가 하늘만큼 치솟고 있는 똑순이셨다. 아빠는 이대입구 골목 작은 가게를  세얻어 맞춤옷 전문점 ’서의상실‘을 오픈해 생계를 이어가시기 시작하셨고, 엄마는 아빠가 벌어들이는 돈을 차곡차곡 모으다 못해 불려가고 있었다. 이화여자 대학교 총장님부터 시작해서 아빠의 실력이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이대생들로부터 아빠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 저리가라였고, 잠 잘 시간도 마땅치 않을 만큼 바빴던 아빠는 링거투혼을 하며 옷을 만드셨고, 카드를 사용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모든 거래금을 현찰로 받으셨던 엄마는 무거운 눈커플을 겨우 버티며 돈을 세고 또 세다가 잠이 드셨다는 얘기를 살짝 보태서 백만번 들었던 것 같다.


이대입구에서 명성이 어느 정도 올랐을 때 내가 두 살이 되던 해였다. 강남의 노른자 땅에 온통 배 밭인데 아파트가 우뚝 솟았던 곳이 있다는 소문이 엄마를 자극했고, 그 곳이 지금의 서울 압구정동과 반포였다. 강남과 서초의 중심! 엄마의 촉은 반포로 향했고, 번 돈으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 우리는 반포 아파트에 당당히 입성하면서 상가 하나까지 분양을 받았다. 아빠는 더 이상 남의 가게에 세입자가 아니었고, 장관, 교수, 의사, 법조인들이 몰려 살고 있기로 유명한 반포에 당당히 양장점을 오픈하셨다. 예상대로 아빠의 숍은 불티나게 장사가 잘됐고, 옷 값을 올리면 올릴수록 더 불티나게 팔렸다. 예나 지금이나 있는 사람들은 비싼거에 소비를 할 때 더 희열을 느끼나보다. 암튼 우리집은 그 덕분에 반포에서 입지를 단단히 굳혀 가고 있었고, 엄마 아빠는 여전히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셨다. 급기야 우리집에는 붙박이 가사도우미가 상주하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빠는 이제 제법 커서 노란 배낭을 매고 유치원에서 생애 첫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 걸음마 긴신히 떼고 세상물정 모르고 날 뛰고 까르륵 거릴 때였고, 언니는 뒤뚱뒤뚱 걸으며 제법 말 짓을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엄마 아빠는 일을 하면서 우리 셋을 모두 돌보는게 너무 힘이 드셨는지 과감한 결정을 하셔야 했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가운데 아이였던 언니가 다시 신촌 할머니 할아버지 계시는 집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헤어짐이 한 해 두 해 지나고 여덟 살이 되던 해에 8학군 반포초에 입학하기 위해 다시 합치는데까지는 6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고야 말았다. 주중에는 신촌에서 있다가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울고 주말에 반포집에 오면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울었던 언니를 나는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자꾸 언니가 있다 없다 했던 생각만 희미하게 있다. 오빠는 나보다 조금 컸으니 나보다는 그 때의 상황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겠지? 엄마는 주말에 언니가 오면 최선을 다하려 했고 신촌으로 가고 싶다고 울면 엄마도 가슴으로 같이 울었다고 하셨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언니랑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가 되었고, 엄마는 퀸사이즈 침대 한 개와 책상 두 개를 나란히 창가 쪽으로 배치해 주셨다. 그 때는 밤에 잘 때 무섭지 않아서 언니랑 방을 쓰는것이 무조건 좋았던 것 같다. 벽에 붙여 놓은 침대에 안쪽은 나의 고정 자리였고, 언니는 내가 자다 깨서 화장실을 갈라치면 문지기로 나에게 매번 깨움을 당해야 했다. 하루에도 수백번 '언니!'를 불러 뭔가 도움을 요청했었던 것 같다. 귀찮았겠지만 들어주지 않으면 엄마한테 내가 달려갈 것을 알기에 꾸역꾸역 내 말을 다 들어줬던 언니는 피해자이자 남들에게는 천사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미간을 찡그리고 투덜대거나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내 부탁을 억지로 수행해 주었던 언니가 난 왜 천사로 불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동생에게 천사 같은 언니였나보다.


여기서부터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우리 자매의 이야기이다.

난 긴 생머리에 치마를 즐겨 입었고 언니는 숏커트 머리에 바지만 줄곧 입었다. 딸 둘이라 쌍둥이처럼 옷을 입혀보고도 싶으셨겠지만 우리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난 고무줄을 하거나 석필(땅에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던 도구)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하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고, 언니는 남사친들과 헬멧을 쓰고 야구를 하며 노는 것을 즐겼다. 친구들과 섞여 있으면 숏커트를 하고 있는 언니가 동네 오빠들과 잘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덕분에 우리집에 간식을 먹으러 놀러 오던 언니의 친구들은 온통 남사친들 뿐이었다. 언니는 시금치를 너무 좋아해서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시금치나물을 반찬으로 무치고 있으면 솔솔 참기름 냄새를 못참고 엄지와 검지로 덥석 집어 먹곤했지만 나는 밥상을 나갈 때까지 뽀빠이 아저씨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시금치 반찬에는 젓가락 끝도 대지 않았다. 아마도 언니는 뽀빠이였고 난 올리브였나보다. 국을 유난히 좋아하던 언니는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국물을 찔끔거리며 건더기만 살짝 건져 먹는 정도에 그쳤다.


그 뿐인가. 나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7080 포크가요를 좋아했고 라디오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언니는 팝송마니아였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시끄러운 헤비메탈에서부터 락앤롤과 밴드 퀸(QUEEN)의 광팬이었다. 지금도 언니가 책상 위에 올라 앉아서 헤드뱅잉을 하면서 Guns N’ Roses의 ”Knockin’ On Heaven’s Door“를 크게 틀어 놓고 나한테 들어보라고 종용하던 때가 생생이 기억이 난다. 언니의 추임새와 몸짓이 난 좀 요상해 보였고, 어디 아픈건 아닌지 걱정이 살짝 되기도 했다. 언니 양 손에는 마치 전자기타가 들려 있는 것처럼 선을 튕기는 모양새를 하다가 갑자기 드러머로 변신해서 허공에다가 허우적대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곡이 끝나고 나면 땀을 비오듯 흘렸고, 부엌으로 가서 내장고 문을 열고 훼미리주스(오렌지, 포도 두 종류가 있었고 좀 산다고 하는 집에서는 유리병에 담긴 이 브랜드 주스를 정기적으로 배달 시켜 먹곤했다. 참고로 이 유리병은 주부들의 최애 부엌 용품으로 등극했고, 보리차를 끓여도 식혜를 만들어도 이 병에 담아 보관하는 것이 하나의 부의 상징처럼 보이기까지 했다)를 꽉 차게 한 잔 따라서 벌컥거리고 마시던 언니의 갈증 해소의 장면은 보면 볼수록 생소했고 이질감이 느껴졌다.


오빠랑 나는 대충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뭐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언니와 나를 보면서 엄마는 늘 불안해 하셨던 것 같다. 혹시라도 엄마 떨어져 살아서 다른 성향의 아이로 자란건 아닌지 괜한 죄책감과 걱정이 항상 엄마의 가슴 한 켠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 같다. 혼자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탓인지 협동이 필요할 때에도 언니는 자기 주장이 은근히 강해서 협의점을 찾지 못하기 부지기수였고, 그럴 때면 오빠와 나의 공격을 받아야했다. 오빠와 내가 가지고 있는 객관성에 입각한 판단들은 언니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개인주의 말살로 여겨지고 있었다. ‘내가 먹기 싫으면 안 먹고,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야?’라고 늘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오빠랑 나는 ‘가끔은 먹기 싫은 것도 먹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는 거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었다.

언니는 나랑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영원히 맞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뭔지 모를 비슷함이 느껴졌고, 미국에서 있었을 때에는 숱하게 쌍둥이 아니냐는 억측을 듣기도 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린 억울해 하며 아니다를 주장해야 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똑같이 생겼었나보다. 아무튼 동의는 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같은게 하나도 없던 나와 언니는 언제가부터 같은 것을 보고 예쁘다 했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 했고, 커피를 미치게 좋아하는 것도 닮아 있었고, 필기도구에 꽂혀 있는 것도 비슷했다. 가족이나 지인들 얘기를 하며 함께 공감하고 있었고, 같이 화내고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하고 있었다. 해마다 서로의 옷장을 뒤바꿔 지루해 진 옷을 한 해씩 바꿔 입기까지 했다. 사이즈도 얼추 비슷해서 서로의 집을 방문하면 옷장부터 검열하며 맘에 드는 옷을 눈치껏 챙기기도 했다. 한 해만 지나면 내 옷장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알기에 기꺼이 우리는 서로에게 옷장을 내어 주었다.


"뭐지? 닮아가고 있는 이 느낌은?"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달랐던 언니와 내가 너무도 닮아가고 있음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것 같다. 이제는 어느덧 갱년기를 함께 겪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아직까지는 얼굴이 갑자기 닳아 오르거나 식은땀에 민망해 지는 일은 없었지만 감정이 살짝씩 널뛰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나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육아와 교육에 대충의 열과 성의를 다하며 최선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있는 삶을 누리고 있는 경단녀로 언니는 아직까진 싱글의 삶을 유지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으면서 부지런히 사회활동을 누리도 있다. 지금의 언니와 나의 다름은 생각과 가치관 따위가 아닌 삶의 터전 자체의 다름이다. 가끔은 가족이 있는 가끔은 혼자만의 쿨한 삶을 서로 살짝 부러워(?) 하기도 하지만 냉큼 자신의 자리를 최고로 생각하는 것도 살짝쿵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 자매.

그런데 묘하게 닮아 있는 우리 자매.

뗄레야 뗄 수 없는 공존의 존재.

그래서 더 애틋한 자매가 되었다.


난 아직도 언니가 너무 필요하고 언니에게도 내가 필요한 존재인 것이 정말 다행이다.

있어서 고맙다. 그래서 든든하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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