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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율로 Jun 03. 2022

손바닥 열대

- 따뜻하고 소중한, 그러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나의 교실 이야기 1

나는 2006년 졸업과 동시에 임용시험을 합격하고 1년을 쉬었다. 신규 발령이 나지 않아 대기 발령 중이었기에 이 학교, 저 학교 기간제 교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다.


5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첫날, 나는 부산 금정구의 C 초등학교에서 출산휴가를 들어가신 선생님 대신 5학년 2반을 맡게 되었다. 고학년 담임은 처음이라(?) 긴장했었지만 곧 나는 아이들과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아이들은 24살의 어리디 어린 초짜 선생인 나를 잘 따랐고 나는 열정적으로 가르쳤으며 매일매일 신나는 수업을 하였다.


그렇다고 우리 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텅 빈 교실에서 다음날 수업 준비를 하다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지갑 속 돈 5만 원을 도둑맞았고, 우리 반 아이들도 그즈음부터 매일같이 지갑을 털렸다.


이상했다.

나의 돈을 도둑맞은 것은 그렇다 쳐도 우리 반은 늘 아이들로 북적이는데 어떻게 돈이 계속 사라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내게 와서 일러주었다.


 "선생님, 소은이(가명)가 4학년 때부터 돈을 많이 훔쳤어요."

 "소은이는 고아원에 살아서 돈이 없어서 돈을 훔쳐요."


동학년 선생님들도 소은이일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볼이 발갛고 눈이 사슴같이 예쁜 소은이는 키가 너무 작아 늘 앞자리에 앉았다.

생각해보니 소은이는 내가 소은이를 쳐다봐도, 발표를 시켜도 늘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을 보며 살짝 미소 짓기만 했고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보육원에 사는 게 뭔 죄라고, 내가 보지 못하고 겪지 않은 일로 아이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그런 소리 말라고, 보지 못했으면서 친구를 의심하면 안 된다고 엄히 주의를 주었다.


돈은 더 자주 없어졌다.

1교시 지나고 이천 원, 3교시 지나고 천 오백 원... 어떤 날은 오천 원, 만원씩 사라지기도 하였다. 의심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소은이에게 눈길이 갔다. 하지만 소은이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거나 쉬는 시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게 다였다.


어느 날, 소은이가 화장실에 다녀와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 있는데, 한 아이가 소리쳤다.


"선생님, 제 돈 1000원이 없어졌어요!"


소은이가 잠시 스쳐 지나간 그 순간이었다.


"소은아, 잠시만... 정말 미안한데, 네 잠바 주머니 좀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였지만, 잠바 안을 확인해야 했다. 생각해보니 소은이는 너무 자주 화장실을 다녀왔다.


잠바 주머니를 움켜쥐고 보여주지 않으려는 아이의 손가락 사이로 천 원짜리가 보였다. 소은이처럼 나도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고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부인하던 소은이가 나중에는 순순히 자신의 소행임을 인정했다. 소은이의 표정은 덤덤했다.


나는 너무나 화가 나 교실이 떠나갈 듯한 큰 소리로 소은이를 나무라고 화를 내었다. 소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의 화를, 훈계를, 애원을 듣고 있었다.


쉬는 시간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교실로 들어서는데 우리 반 지성이(가명)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없는 거지새끼가!"


그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지성이 자리에 성큼성큼 걸어가 지성이를 일으켜 세우고 손바닥을 내게 하였다.


"아무리 친구가 잘못했어도, 그런 말은... 그런 말은, 하면  되는 거야!"


이를 꽉 물고 지성이의 손바닥을 세차게 10대 때렸다.


눈에서 뜨거운 것이 자꾸 흘러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지성이 말처럼 엄마가 없어 보육원에 살고 마음이 텅 비어 자꾸만 친구들 지갑에 손을 대는 소은이가 안되어서 목놓아 울었다.


또한 지성이는 아직 어린데, 잘 모르고 그런 말을 했을 텐데 퉁퉁 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우는 지성이에게도 미안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날 지성이는 퉁퉁 부은 붉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드려 점심 급식을 먹지 않았다.


지성이는 학교 부회장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발표도 잘하였으며 늘 밝고 유쾌했다.

못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인 지성이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우리 반 모든 아이들이 지성이를 좋아했다. 나도 그런 지성이가 참 예뻤다. 그 일 이후 지성이는 며칠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나 곧 다시 마음을 열고 밝은 얼굴로 나를 대하였다.  




그 일이 일어나고 닷새쯤 지났을 때, 지성이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를 잠시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지성이 어머니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기 전까지 그 시간이 너무나 길고 두렵게 느껴졌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의 심정처럼 두렵고 떨렸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어머니께서 들어오셨다. 목례를 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선생님이시라고 하셨는데, 얼마나 화가 나면 일찍 조퇴하시고 나를 보러 오셨을까.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어머니는 밝은 얼굴로 지성이의 학교 생활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시고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셨다.


그리고는 금방 일어서시는가 싶더니, 돌아서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을 텐데 고생이 많다고, 정말 수고가 많다고 말씀하셨다. 아무 말 못 하고 귀까지 빨개진 나를 한참 안고 계시다가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차돌같이 반짝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의 손바닥을 열 대나 친 어리고 미숙한 후배 교사를 용서하고 응원하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용기와 따뜻함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다음 해 5월 스승의 날, 지성이는 5학년 2반이었던 다른 몇몇 친구들을 모아 나를 찾아왔고 아이들과 난 나의 원룸에서 치킨을 시켜 맛있게 먹으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이제 나는 지성이 어머니처럼 지성이 나이의 아들을 키우는 중년의 여성이고 교사이다.  나이가 드니 그때 지성이 어머니가 보이신 모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이제 지성이는 멋진 청년이 되었을 것이고, 지성이 어머니는 그때보다 더 아름답고 연륜과 지혜가 가득한 어머니로, 교사로 살고 계실 것이다.


다시 지성이와 어머니를 만난다면, 그때는 못했던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과, 미성숙하고 부족한 저를 이해해주시고 품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어머니와 같이 좋은 분들 덕분에 내가 나의 부족한 점들을 깨닫게 되고 조금씩 자라게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제가 초임 교사이던 2000년대 중반은 체벌이 허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2007년 첫 발령을 받던 당시 어리고 왜소한 저를 보신 한 학부모님께서는 지도편달 부탁드린다며 사랑의 매도 전해주고 가셨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함께 따뜻함을 나누려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혹시 제 글 속 훈육 상황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신 분이 계시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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