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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 땅에서 피어난 꽃 Jul 19. 2024

3년 근속, 실업급여생활, 생산직까지.

빚이 이끈 나의 생활들

 빚을 지게 된 원인에 대해선 다른 사람이 걸려 있기 때문에 시원하게 말할 수도, 말할 생각도 없지만, 적어도 그 과정 중에서 내 이야기만큼은 어느 정도 솔직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씩 실질적인 위기나 위기감이 올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자동으로 여태까지의 나의 삶의 형태가 그려지며 회상이 자동이 이루어지고 만다.


 답답했던 기분과 막막함 속에 마음이 떨리는 위기감이 든 오늘도 그랬다. 선택 자체는 후회하지 않지만 그 과정 중에 이랬다면 지금의 상황보단 나아졌을까?라는 생각 속에서 나의 상황을 또 한 번 돌아보게 되면서 원인 다음의 이야기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순서적으로도 알맞기도 한 것 같다.


 빚이 존재하게 된 지는 벌써 몇 해가 되었다. 그 빚 때문에 지옥 같았고 매일 고통스러웠던 전 직장에서 거의 4년 가까이 버텼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는 나날 속에서 언제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매일같이 생각했다.

 지금만큼 많지 않았음에도 달마다 청구되는 금액은 퇴사를 하고 다음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생길 수 있는 공백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이었다. 즉 연속적으로 단 한 달도 공백 없이 일을 해야만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였는데, 관두더라도 바로 일자리가 구해져서 일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게 여의치 못해서 몇 년간 근속을 하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고통스러워하며 견디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던 중 이런저런 말이 많던 회사가 이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면서 인원수를 줄여야 했고  자진 퇴사자를 모집했다. 생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회사 입장만 생각하며 나갈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조건을 걸었다. 경영상 이유의 권고사직 처리를 통해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잠시 숨통이 트이는 빛과 희망 같은 기회였다. 사실 이미 3년이 넘어가던 차라 그만큼의 퇴직금은 관두더라도 나올 것이었지만, 다음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망설여지고 고민스러웠다. 그러던 중에 급여만큼은 아니지만 적지는 않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기회는 내 상황에 꼭 맞는 동아줄이었다.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남을 사람과 실업급여를 받고 나갈 사람을 조사한 후 남은 사람들의 새로운 부서가 다시 정해지는 한 편, 나와 같이 나갈 사람들도 목록화되어 정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퇴직처리가 완료되었다.


퇴직금도 생각보다는 빨리 들어온 데다가 실업급여와 관련해서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바로 고용센터엔 가지 않고 잠시 프리랜서로서의 간단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사실 몇 년 동안 일에 치여 거의 하지 못했던 자기 계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도 했다. 커리어가 되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 것 외에는 큰 메리트가 없었는데, 그 돈마저 하나도 남지 않고 전부 빚을 갚아 나가는데 들어갔으니까.


 앞으로 다른 더 나은 직장을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내면과 정신이 피폐해진 게 가장 컸다. 내가 일을 했던 곳은 오로지 빠른 일처리가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거기에서 발생하는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행동들이 팽배했고,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눈감고 쉬쉬하며 결과만 중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관리자들부터가 어느 정도 직급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양아치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비인간적인 사람들 역시 많았다. 그 모든 것을 빚과 그것을 위한 돈 때문에 견디면서 단단히 속병이 났고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조금 쉬면서도, 집에서 공부나 책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재택 알바를 조금 이어가다가 빠져나가는 돈들로 인해 슬슬 실업급여를 신청해야겠다는 압박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센터를 방문하기 전에 알아보니 그전에 내가 하고 있던 알바부터 관둬야 했으므로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말을 하고 센터에 방문해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그 후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며 실업급여를 받는 생활을 했다.


실업급여의 가장 큰 목적은 구직을 도모하는 것도 나는 그 제도의 의도를 악용하지 않고 잘 따랐다. 몇 달 정도는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육과 활동들을 하면서도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급여에 관한 부분이었으므로 배울 수 있고 경력이 될 수 있는 직장을 원했지만 급여가 높지도 않고 내 상태로는 지원을 해도 뽑히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애초에 재쳐두었다. 그러던 중 생산직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전의 직장은 평균 180만 원에서 많아야 200만 원이 조금 넘는 급여였고 그 때문에 돈이 늘 부족하고 아슬아슬했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공고 속 월급은 무려 360만 원. 물론 시급제이고 이전의 직장과 같이 시급제였기 때문에 연장수당이나 주야간 교대등으로 높게 받는 것이었겠지만 이제 이백 여만원의 돈으로는 감당이 안 되고 생활도 해야 했으며 더 많은 돈이 빚을 청산하는 시간이라도 줄여줄 것이었으므로 생소하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산직에 지원을 했다.


 업종의 특성상 늘 인력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생산직의 구직 결과는 좋았다. 얼마 안 있어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간단한 교육을 들은 후에  입사일이 확정되었다. 그렇게 생산직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낯설고 어려운 적응 기간을 거쳐서 받게 된 첫 월급은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달의 첫 달이 아니라 중간에 입사를 하였음에도 230만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전 직장보다 확실히 더 많은 금액이었지만 문제가 발생하였다. 나가게 될 돈을 계산해 보니 실업급여를 받긴 했지만 부족한 돈을 퇴직금을 일부 메꾸면서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앞으로 한 두 달 내에 내야 할 돈이 부족한 것이었다.

 슬슬 불안해지던 실업급여 생활을 끝내고 새 직장을 구해 입사를 하게 되어서 마음이 편해진 것과 달리 끝나지 현실적인 문제가 곧 들이닥치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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