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빚이 불행이 될 때와 행복한 작은 손해

고액 채무 생활의 진정한 고통과 불가피하고 행복한 소비

 채무 생활 전에 나의 일이 될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어렴풋이 어설픈 역지사지를 해봤을 때도, 채무 생활이 결국 내 삶이 되고 말았을 때도 들었던 생각은 같았다. 빚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지와 얼마큼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빚을 갚라 삶에 제한이 생겨버리는 것 때문이라고.


 일차적으로는 빚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들, 사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채무 액수와 정도에 비례해 채무생활이 길어질 때에 발생하고 찾아오는 일들 속에서 나 자신이 굉장히 무력하고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말로 큰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그것을 그럴 것이라고 생각만 하고 마는 것과 피부로까지 와닿아 절절하게 느끼는 감각의 차이였을 뿐, 예상은 실제 맞아떨어졌다.


 단순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찰이 있었다는 우쭐함을 느끼기보다는, 사실 커오는 내내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그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채무로 인한 문제가 존재했기에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게 조금 덜 직접적이자, 내가 당장 갚아야 할 의무가 없었던 부분이었을 뿐...


 하지만 채무자라고 해서 다 같은 채무자는 아니다. 같은 생각과 앎을 가졌다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나처럼 내 능력과 역량이상의 고액 채무자가 아닌 사람들의 경우, 막연히 빚이 있다는 가정을 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대개는 생활의 다른 것들을 모두 포기해서라도 일단 빚을 갚는 데에만 집중한다고 하는 편인 것 같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빚이 있다고 해도 그 액수가 몇 백 정도, 꼭 직장생활이 아니라 최저시급의 아르바이트 수준 달에 이백 만원 의 일정한 수입만 있어도 자기 생활할 거 다하고도 몇 달에서 1년 정도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양의 채무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불편하고 위기감은 들어도 고통 수준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는 꼭 직접 묻고 듣지 않아도 이성적인 사고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 역시도 사실 빚이 많지 않았을 때에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빚의 액수가 내 월급이나 수입과 같은 단위를 넘어서게 되었을 때, 즉 몇 백의 돈을 버는데 몇 백의 빚이 아니라 천 단위의 빚이 될 때부터 마인드 자체가 달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느낄 수 있는 압박감과 불안감의 크기가 커지는 것은 물론, 걸리는 제한많아지고 그로 인해 생활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까지 함께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극이 반복적으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지속이 되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서조차 포기하는 것들늘어나게 된다. 심지어 돈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적은 것들까지도 지레 포기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채무생활로 인해 불편함의 수준이 아닌 불행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채무 상태에 대해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실이 채무 자체와 채무생활 왜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지를 시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저, 이러하니까 그러할 것이다라는 대강의 인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으로 겪은 이 불행에 대한 생생한 심정과 감상, 생각 따위는 이러했다.


 같은 고액채무자라고 할지라도 가치관이 다른만큼 무엇이 고통이 되는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더 이상 내가 다룰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아진 빚으로 달마다 청구되는 금액을 겨우 맞추며 한 달마다 고비를 넘는 생활이 몇 년간 계속되는 동안에 정말로 힘들었던 것은 금전적인 부분의 생활이 아니라 마음과 인간 사이의 일들이었다.


사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당장 필요한 것조차 미루어서 겨우 늦게 사고, 남들이 쉽게 즐기는 것들을 갖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것 따위야 견딜만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나의 처지로 놓쳐야만 했던 놓치고 싶지 않던 사람들, 잘해주고 싶어도 작은 선물 하나 할 수 없던 나의 초라함과 열악함, 안정적인 사람들이 행복하게 추억을 쌓아가는 시간 동안에  그 기회에 닿을 수조차 없이 바라보며 부러워만 했 나의 소외감 같은 것들이 에게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조차 앗아갔다.


 원하고 바라는 것들에 닿을 수조차 없고 상실의 아픔 더해지는 나는 행복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삶조차 살 수 없을 거라는 그 절망감이 정말 그 무엇보다도 두렵고, 서럽고, 힘겨웠다.


 이 고통들이 모여 어느새 내게 말을 거는 존재가 되었는데, 비참한 삶을 지속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조소하고 차라리 그냥 죽을 것을 종용했다.

 채무 생황 속에서 내가 겪었던 가장 큰 위기였고 빚보다 힘든 수렁이었다.


그렇게 많은 상처와 위기를 가까스로 넘어서며 나는 타인 바라볼 때 한 가지의 새로운 시선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지금 마주친 이 사람과 또 언제 헤어질지 모르니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불안과 슬픔이 섞인 시선이었다. 그리고 이 시선은 여태까지와 다른 태도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언제 또 못 보게 될지 모르니까, 머물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나의 상황으로 너무 주저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은 잘해주자라고. 빚 8천만 원이나 8천2만 원이나 그게 그거 아니겠냐고, 그러면 그런 소액의 돈 정도는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된 것 같다.


 그런 다짐을 비로소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던 때는 채무생활을 꽤 오래 한 시점이자 최근에 가까운 생삭직 생활을 시작할 즈음이었다.

 

 대출금과 연속적으로 끊어지지 않게 내야 하는 돈 때문에 견뎠던 지옥 같았던 전 직장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따뜻한 분위기의 사람들에게 정말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다짐을 실천시킬 수 있는 힘이 것 같았다.


 물론 연장 근무가 많았던 때여서 해당 달의 수입이 꽤 많았기에 없는 와중에 생겨난 약간의 여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을 생각하면 안 쓰는 게 제일 좋긴 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돈을 썼다. 자잘하긴 해도, 힘들고 피곤한 직장동료에게 약간의 짐은 덜어줄 수 있을 음료, 피로회복제, 커피와 간식 등을 상대방 상태나 기분을 살핀 뒤에 그에 맞춰 아끼지 않고 썼다.

 비록 갚아야 할 돈의 총량을 늘리는 행위였지만 기쁘고 힘든 상황을 견디게 해주는 활력을 가져다주어 행복하게 해 주었기에 내게는 전혀 아깝지도 손해도 아니었다.


이전에 죽음의 위기가 왔을 때 던져진 무심한 다른 생각이 삶을 포기할 생각을 잠시 멈추어 주었다면,

 어려운 와중에도 기꺼이 상대를 위해 소비하고 그를 통해 물건에 마음을 담아 나누는 행위는 삶을 좀 더 견디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강하게 이끌고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어주었다.


여전히 과거와 같은 불행 속이었으나, 나의 어려움으로 사람들과 지속되지 못하고 그 아픔으로 스스로도 단절되기를 선택하며 꾸역꾸역 제한적인 삶에

밀어 넣으며 고통받았을 때보다 훨씬 기쁘게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비록 현재의 상황에서 도피성으로, 빚 따위는 없는 평범한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한 행동에 불과하고 이해적으로어리석은 손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힘든 삶에서도 좌절하지 않게 강한 희망과 기쁨을 한 번씩 불어넣어 주었기에 정서적인 행복에 훨씬 큰 가치를 두고, 힘들어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정을 나누며 살아가길 꿈꾸는 나에게 있어 불가피하고 행복한 소비였다.


작가의 이전글 그래도 삶은 계속되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