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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인지 된장인지 나는 먹어봐야 알겠다

by 뉴욕 산재변호사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원숭이 실험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집단 순응 현상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강력한 사례로 회자된다. 실험의 설정은 단순하다. 우리 안의 원숭이들이 바나나를 얻으려 사다리를 오를 때마다 집단 전체가 차가운 물벼락을 맞는다. 물을 싫어하는 원숭이들은 곧 사다리 오르기를 고통과 연결 짓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원숭이가 집단에 합류해 사다리를 오르려 시도할 때, 이미 학습된 원숭이들은 그를 격렬하게 끌어내린다. 더 이상 물이 뿌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 집단 내 모든 원숭이가 교체된 후에도, 아무도 직접 물벼락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사다리 오르기는 여전히 집단의 금기로 남는다.


이 가상의 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다. 우리는 왜 그 이유를 묻지 않은 채 집단의 규칙을 따르는가? 그리고 그 규칙은 누구의 선택을 억압하고 있는가?


선의 길이는 명백한데: 솔로몬 애시의 순응 실험

원숭이 실험이 가상의 알레고리라면, 솔로몬 애시(Solomon Asch)의 1950년대 실험은 집단 순응의 힘을 실제로 증명한 고전적 연구다. 애시는 참가자들에게 단순한 선 길이 판단 과제를 제시했다. 한 장의 카드에 있는 기준선과 같은 길이의 선을 다른 카드의 세 개 선(A, B, C) 중에서 고르는 것이었다. 답은 명백했다.


그러나 실험실의 8명 중 7명은 실험자와 짜고 의도적으로 틀린 답을 말하도록 지시받은 조력자들이었다. 진짜 피험자는 단 한 명, 자신만이 실제 참가자라고 믿고 있었다. 12번의 결정적 시행에서 조력자들이 명백히 틀린 답을 말할 때, 피험자는 마지막에 답해야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약 36.8%의 피험자가 명백히 틀린 집단의 답에 동조했다. 75%는 적어도 한 번은 순응했고, 5%는 매번 순응했다. 오직 24%만이 한 번도 순응하지 않았다. 애시는 이 결과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말했다. "우리 사회의 순응 경향은 너무나 강해서, 합리적이고 선의를 가진 젊은이들조차 기꺼이 흰 것을 검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후 인터뷰에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순응한 참가자 중 다수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몇 번의 시행 후, 그들은 자극을 잘못 해석하고 있으며 다수가 옳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 자신의 눈보다 집단의 판단을 더 신뢰한 것이다.


기원의 망각: 합리성이 관습으로 굳어지는 순간

원숭이 실험과 애시 실험이 보여주는 핵심은 '기원의 망각'이다. 최초의 규칙—"사다리를 오르면 물벼락을 맞는다"—은 생존 본능에 기반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애시 실험의 초기 피험자들도 실제로 집단이 틀린 답을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이유가 사라진 후에도, 혹은 집단의 답이 명백히 틀렸음에도, 행동 양식만이 관습으로 화석화된다.


"원래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이 한 문장은 집단 순응의 가장 흔하고도 강력한 논리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규칙이 현재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질문 없이, 집단의 관성만으로 규칙은 존속한다. 인간 사회의 수많은 전통과 규범, 조직 문화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된다. 새로운 원숭이가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게 막는 행위는, 혁신적 아이디어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집단이 스스로 억누르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집단의 검열: 개인의 자율성은 어디로 가는가

"나의 선택을 집단이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현대인의 실존적 딜레마를 관통한다. 사다리를 오르는 원숭이를 끌어내리는 행위는 단순한 규칙 준수를 넘어선다. 그것은 '집단이 용인하는 행동 범위'를 벗어나는 개체를 처벌하고 통제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물리적 물벼락 대신, 우리 사회에는 비판과 조롱이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와 같은 냉소적 언어가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압력은 개인이 직접 경험을 통해 진실을 확인하고 합리적 판단을 내릴 기회를 박탈한다. 대신 검증되지 않은 집단의 '지혜'나 '금기'를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강요한다.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집단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새로운 시도를 통해 '차가운 물이 더 이상 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실패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면서도, 실험 그 자체를 환영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비판적 주체로서의 개인: 순응을 넘어서

집단 순응의 맹목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은 비판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규칙에 대한 무조건적 반항이 아니다. 모든 관습과 전통의 기원과 현재적 효용성을 되묻는 지적 용기다.

그렇게 오르지 말라는 사다리에 기어이 오르려는 원숭이를 향해 찬물을 끼얹는 대신 따스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포용력. 이것이 집단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발전을 모색하는 건강한 사회의 필수 요소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물이 뿌려지던 때의 원숭이인가, 아니면 왜 물이 뿌려지는지조차 모른 채 사다리만 막고 있는 원숭이인가? 이 성찰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진보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결론: 사다리를 오를 용기

바나나와 원숭이 실험은 사회가 개인의 성찰 없이 관습을 고수할 때 얼마나 쉽게 맹목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알레고리다. 모든 인간은 사다리를 오르려는 충동, 즉 혁신과 발견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집단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충동을 억압할 것인가, 아니면 그 기원을 탐색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실험을 허용할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사다리를 오를 용기를 가진 개인이 있고, 그 시도를 지지하는 집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물이 이미 멈춘' 현실을 발견하고 진정한 바나나에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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