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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꼼 Nov 18. 2024

변화 | 01
버려야 할 것들, 지켜야 할 것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십 년’은 ‘십간(十干)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십간’이란 ‘하나의 굽이를 넘어선 수’ 또는 ‘하나의 매듭이 끝나는 수’로 생각합니다. ‘하나의 단계를 거치다’, ‘한 굽이를 넘어섰다’고 하여 이제 하나의 단락을 끝마쳤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십 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십년지기[1], ‘십년감수[2]’,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등 하나의 사건과 단락이 끝나는 시점에 ‘십 년’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중국에서는 ‘십년하동 십년하서(十年下東 十年下西)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황하 강의 상류에서 황토가 강물에 흘러 들어오면 강바닥에 흙이 쌓이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강줄기가 변하게 됩니다. 이런 시간의 흐름은 십 년 전에는 강 동쪽에 있던 마을이 십 년이 지난 후에는 강 서쪽에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동양인의 정서 안에는 십 년이라는 시간이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산이 변하고 마을의 위치를 바꾸어 버리는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것을 매듭짓고, 다음 시간을 준비하도록 요구합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성숙함을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성숙해야 할 것들과 매듭지어야 할 것들을 잘 마무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말이야 할 것들을 구별해 내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이제는 십 년이 아니라 1년이라는 시간에도 문화와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변화에 적응하는 유연성과 함께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는 용기가 더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과거의 시간, 그 시대 속에서 거룩한 교회와 참된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고자 용기 있는 변화를 시작했다면 이제 지금의 시대 속에서 용기 있는 변화와 성숙을 기대해 봅니다. 


버려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을 다시 고민하며 

한층 성숙한 교회를 꿈꾸어 봅니다. 



느슨한 연대의 강한 힘’

 

국내 최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NS:Social Network Service)’ ‘카카오’ 회사의  2016년 1분기 실적 자료[3]를 살펴보면 2016년 1분기까지 ‘카카오톡’ 국내 사용자가 41,174,000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2016년 9월 대한민국의 총인구수가 51,664,244 명이니 10명 중 8명은 카카오톡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 유아와 노인을 제외한다면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사용한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페이스북의 경우에는 이미 하루 이용자가 10억 명을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4].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7명 중에 1명은 페이스북을 매일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웹 1.0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속도는 느렸고, 개인 컴퓨터의 저장공간도 넉넉지 않았으며, 네트워크의 다양성이나 폭도 협소했습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인터넷 환경이 빠르게 개선되었습니다.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웹[5]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사용자들이 단순히 접속하여 서핑하는 소극적 단계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개방성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웹 2.0 시대를 열었습니다. 정보의 개방을 통해 인터넷 사용자들 간의 정보 공유와 참여를 이끌어 내고, 이를 통해 정보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문화[6]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개방성’에 대한 가치는 단지 인터넷 환경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성화 한 폐쇄적 모임이나 가치들이 소외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만이 가진 기술은 곧 소외됨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자신의 기술과 생각을 공유함으로써 오히려 그 기술과 생각이 진보하는 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것을 ‘생태계형 웹’이라고 부릅니다. 


즉 나의 정보는 다른 사람들의 정보와 연결되지 못하면 생존하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다양한 연결을 통해 자신의 정보와 기술이 강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개방성은 개인이나 단체를 연결하는 ‘사회연결망’의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능동적인 참여와 공유를 위한 느슨한 관계망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제는 웹 3.0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넘쳐나는 대용량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해 내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웹 3.0의 흐름은 ‘빅 데이터’를 ‘개인화’하고, 각 ‘상황’에 알맞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상황인식의 기술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능형 웹이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미리 제공해 주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경제와 생활의 밀접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서비스가 확장되면서 이 시대는 우리를 웹상의 가상의 공간에 발을 묶어두고 있습니다. 이런 개방과 공유의 시대 속에서 우리의 강한 연대의 방식과 연합의 수용성을 저해하는 높은 수준의 가입절차에 대하여 회의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였습니다. 


‘마크 그래노베터(Mark Granovetter)’교수는 ‘느슨한 연대의 강한 힘(The strength of weak ties [7])’을 발표하면서 느슨한 연대를 통해서도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행정적 거리감이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거리감이 우리 안에 커다란 문제임을 밝히면서 ‘편’ 나누기 식으로는 변화와 성숙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관계적 통증을 가진 교회


한국 사회의 압축적 성장이 가진 ‘관계적 통증[8]’을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대적이고 이차적인 인간관계를 가진 분들과 전근대적이고 일차적인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분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탈근대적이고 삼차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한 젊은 층까지 더해져 동시대에 동일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9]. 이런 복잡한 관계적 결합은 공감의 능력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소통의 내용이 피상적이 되며, 관계가 소홀해지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로 관계적 통증을 최소화하면서도 변화와 성숙을 일으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힘들겠지만 용기 있는 변화와 성숙의 걸음이 시급히 요청됩니다. 


특별히 종적인 세대의 다름과 횡적인 세대의 동일시에 대한 지점을 깊이 탐구하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적 통증을 해결해야 합니다. 


위험한 기억’ - 변화를 머뭇거리게 한다.

 

이런 무거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많은 분들이 변화와 성숙을 이루어내지 못하여 정체된 오늘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의식이란 문제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입니다. 덜덜거리는 자동차를 이리저리 보고는 문제를 발견하여 고치는 차량정비사의 능력과 비슷합니다.  이런 정비사의 마음으로 건작연의 성숙과 성장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 이전에 ‘허위의식’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허위의식이란 잘못된 현재 상태를 아무런 문제없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상태에 문제가 없으니 ‘문제의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는 덜덜거리는데 그래도 굴러가니까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여 계속 타고 다니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설명하여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허위의식’은 매우 논리적이기도 하고,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이 드러날 때에 받게 될 부끄러움에 대하여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강하게 우리를 소극적이고, 방어적이게 만들어 변화와 성숙을 저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허위의식’은 무엇일까요? 


교회개혁과 갱신을 부르짖었던 이들에게도 한국교회의 건강성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일을 해왔으며, 우리는 여전히 ‘건강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과거 ‘무한 성장주의’에서 허덕이던 한국교회에 대하여 일갈하던 분들,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교회에서 우리를 닮고자 찾아오고, 각종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의미 있는 날을 보냈던 사람들. 

비틀어진 한국교회에 건강한 교회의 모범을 보여 주려 애썼고, 모두가 대형화를 넘어 ‘초’ 대형화를 꿈꾸던 때에 목사와 성도들 모두가 조금은 불편하지만 함께 건강한 공동체를 꿈꾸며 ‘작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지내왔던 그 시절의 향수에 스스로를 갇혀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개혁의 열정과 꿈은 과거가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와는 문화도, 사회도, 교계도, 교회도, 성도도 변하고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많이 변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많은 이들이 ‘위험한 기억’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스스로에게 괜찮다 이야기하며, 아직 우리 안에 남겨진 무언가가 있다고 자부하고 주변의 누군가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꿈꾸는 지도 모릅니다. 


이런 기억은 위험합니다. 변화하는 일상 속에서 건강한 교회에 대한 동시대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여전히 예전의 생각에 천착하고 있는 우리를 반성해야 합니다. 단순한 작음이 곧 건강함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든든하다고 생각하여 자신 있게 내보여 주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거침없이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의 방법이 여전히 옳은지 살펴야 합니다. 문제의식은 허위의식을 버릴 때에야 비로소 떠오르게 됩니다. 현실을 왜곡하게 만드는 그 위험한 기억들을 과감히 제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


“그러니까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지 않겠어? 내 말에 그는 잠깐 생각하다 대답한다. , 그런데 뭘 지키고 뭘 버려야 하는 거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관념적으로는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모호해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 모든 게 뒤죽박죽 된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버려야 할 것이 있어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고,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 버려야 할 것을 알게 되는 건지도, 파스타에서 조개를 건져 알맹이는 먹고 껍질은 버린다. 알맹이로만 채워진 인생 같은 것 어디에도 없잖아? 하고 그를 위로하며, 사실은 나를 위로한다 [10].” 

[황경신의 생각이 나서’ 중에서]  


위험한 기억을 제거하여 허위의식에서 벗어나고 문제의식 가운데에서 지난날을 성찰하고 다음 날을 설렘으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을 잘 분류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업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사를 할 때면 아내는 일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것은 버릴 것이라고 내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나는 아내의 손에서 분류되는 옷가지들과 물건들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입니다. 이것은 이래서 버리면 안 되고, 이 옷은 다음에 꼭 입을 것이라고 아내를 설득합니다. 아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고, 그 물건을 사용한 일이 없다며 버려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거래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버릴 테니 이것은 남겨줘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본격적인 밀당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 또한 남겨야 할지 구분해 내는 것이 머리로는 될지 몰라도 마음과 의지는 잘 따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옷이든 물건이든 지난 나의 시간 속에 ‘추억’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잘 사용하지는 않았어도 그 물건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추억은 그것에 대한 ‘미련’의 마음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그 기억을 상실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는 다시 챙겨 넣게 되는 것이죠. 웬만큼 단호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 구별할 때 우리는 과거를 추억합니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과정들 속에서 가졌던 우리의 열정들 웃음들을 기억해 냅니다.  이제 이것을 버려야 하는지 남겨 둬야 하는지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추억이 남았고, 이것을 바꾸면 우리의 아름다운 기억들도 날아가 버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내일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도 없으니 우리의 불안은 깊어집니다. 황경신의 글처럼 버려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연결의 고리를 끊고 구분해 내는 과정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움직였던 관성으로 내일까지 살아가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버려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을 구분하려는 [고민]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1] 오래전부터 친히 사귀어 잘 아는 사람, 네이버 국어사전

[2] 수명이 십 년이나 줄 정도로 위험한 고비를 겪음, 네이버 국어사전

[3] http://www.kakaocorp.com/upload_resources/ir/siljeok/siljeok_20160512080407.pdf

[4] http://www.huffingtonpost.kr/2015/08/28/story_n_8052122.html

[5] 웹(Web)?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의 줄임말로, 첫 글자를 따서 WWW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6] 유혜림, 송인국 , “웹 서비스 형대 변화에 따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진화” 2010,09

[7] Mark Granovetter, Sociological Theory, Volume 1 (1983), 201-233. "The strength of weak ties: A network theory revisited”

[8] ‘관계적 통증’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압축성장과 세대 간의 격차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노년층과 장년층 그리고 젊은 층의 사고와 가치관이 아주 뚜렷하기에 나타나는 소통과 공감의 불일치가 가져다주는 통증을 말합니다.

[9] 유석춘. 장미혜. 배영, 202,“사회자본과 신뢰:한국, 일본, 덴마크, 스웨덴의 비교연구”,「한국의 시 민사회, 연고집단, 사회자본」, 자유기업원, pp217

[10] 황경신, “생각이 나서”, 27, 소담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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