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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꼼 Nov 19. 2024

01. 사람에 대한 생각이 먼저다

교회는 사람이다.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나 교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말 또는 교회를 ‘개혁’ 해야 한다는 말에는 ‘사람’을 세우고, 변화시키는 이야기와 닿아있다.  주님이라는 kurios(퀴리오스)에서 파생된 church라는 단어는 주님께 속한 ‘사람’ 또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ecclesia(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도 밖으로 불러낸 ‘사람’ 또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사용되었던 qahal(카할)이나 edah(에다)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 ‘회막에 붙어있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기억하자 교회는 ‘나’, ‘너’, ‘우리’다. 곧 ‘사람’과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니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교회를 새롭게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이 말의 의미가 ‘사람’ 또는 ‘공동체’를 새롭게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다른 의미로 한다면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를 말하고, 교회를 바꾸겠다고 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나의 이해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타인과 그것에 대한 나의 굳어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교회의 변화와 새로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교회가 예배당으로 불리는 건물이 아님을 알고 있다. 건물은 건물일 뿐이다. 건물의 유무가 교회의 유무일 수 없다. 건물을 소유한다고 무조건 나쁜 교회가 아니며 소유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교회도 아니다. 건물의 소유에 따라 교회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애초에 교회는 ‘사람’이다.


성선설과 성악설

맹자(B.C.372~B.C.289)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B.C.298~B.C.238)의 성악설(性惡說)에 대해 한 번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주제다. 맹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하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사람에 대한 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발전하는가 살펴보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주장한 맹자는 사람은 천성이 선함을 추구하기에 나라를 ‘덕치주의’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 그런 국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순자는 사람은 애초에 악하므로 악한 일상을 살지 못하도록 규범과 법칙을 중요시하는 ‘법치주의’로 나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 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새롭게 하고 안정적이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내놓은 결과물이다. ‘덕치’와 ‘법치’에 대한 기초는 그들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서 시작했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시스템과 구조를 만들고 이를 이끌어 갈 리더십을 이야기하며, 나아가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만든다. 


맹자와 순자의 주장에서 어느 것이 더 좋고, 효과적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을 만든다는 점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교회도 다르지 않다. 교회도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람의 이해 없이 공동체와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의 이해에 대하여 게으르다. 사람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공동체와 교회의 해석과 이해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좁은 경험과 지식을 신뢰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너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연결된 우리는 무엇일까. 목사는 성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성도는 어떻게 목사를 바라보고 있을까.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교회는 무엇일까. 현장은 생각만큼 선하거나 지혜롭지 않다.


목사가 이해하는 성도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 리더십의 관련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한 분이 평신도[1] 리더십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 중요성을 말했다. 목사와 몇 사람이 주도하는 교회는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도중 패널 중 다른 목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평신도 리더십에 대하여 회의적이라는 말과 함께 말을 이었다.


“저는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평신도들을 보면 문제 많아요. 교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평신도들의 무관심이 팽배해요. 목사가 엉망진창의 자리로 갈 때까지 평신도는 도대체 뭐 했나요? 평신도는 교회를 몰라요. 그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어야 한다? 그러다 교회가 무질서 해지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그의 우려가 무엇인지 공감하면서도 나는 그의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특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 이미 평신도에 대한 선입견은 더욱 그러하다. 성도는 문제가 많고, 무관심하며, 교회가 엉망이 될 때 방관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면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성도를 이렇게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성도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목사를 비롯한 리더십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성도를 관리, 통제할 수 있는 대책을 찾는다. 성도는 불안정한 학습자이며, 가르치는 목사의 이야기를 잘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사의 가르침을 거스르거나 관리와 통제 바깥으로 나가려 하면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려 한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프로그램 안에 가두려고 한다.


사람에 대한 이해, 성도에 대한 이해가 교회 시스템을 만든다. 

성도를 무관심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 결과로 만든 관리와 통제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교회는 믿음의 터 위에 세운 교회일 수 없다. 믿음의 터 위에 다시 세우는 교회라면 사람과 성도에 대한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이해를 바꾸어야 한다. 평신도는 교회를 생각하고, 배우려는 열정이 있으며, 더 좋은 교회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삼위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해야 한다.


성도가 이해하는 목사

경기도의 한 교회에 집사가 있었다. 언제나 영국의 ‘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 액튼’ 경의 말을 항상 하고 다녔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한다.’ 그는 항상 목사의 절대권력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시로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일정을 확인하고, 오늘은 어느 가정 심방을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목사가 연간 목회계획을 만들 때에는 교회를 잘 아는 자신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목회계획을 운영위원회에 보고하고, 운영위원에게 허락을 받아야 만 했다. 혹시라도 목사가 먼저 의견을 제시하는 일에 대해서는 목사가 자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다고 펄쩍 뛰었다. 집사는 매년 12월이면 성도들에게 설문지를 돌렸고, 목사의 설교, 심방, 언행, 기도생활 등을 체크하도록 하여 이를 종합해 목사에게 메일을 보냈다.


“올해 목사님 설교는 너무 추상적이었습니다. 내년에 조금 더 실천적인 이야기를 해 주세요. 요즘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시나요? 성도들은 목사님이 기도생활보다 다른 일에 더 바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 외부 강의도 자주 했다. 강의 주제는 ‘자신이 어떻게 목사 권력을 해체했는가’였다.

“목사는 성도의 견제와 감시가 필요합니다. 이 일을 잘해야 교회가 건강해지고 목사가 함부로 못합니다.”


그는 목사를 ‘견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교회는 목사를 견제와 감시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규정을 만들었다. 


운영위원은 아니었지만 운영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선실세였다. 교회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교회의 이상과 꿈을 교회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말했다. “나는 이 교회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이 교회의 마지막 셔터를 내릴 것이다.” 본 회퍼의 말처럼 그는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나 교회를 망가뜨리는 자였다. 물론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목사를 견제와 감사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그는 자신의 꿈과 기대를 따라 목사도 그리고 공동체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목사와 공동체에 투사한 결과는 참담했다. 정죄가 난무하고 절망이 가득한 교회로 변질되었다. 결국, 집사를 추종하는 이들과 그 권력을 나눠가지고 싶은 또 다른 성도만 남았다.


목사를 권력가이자 무가치한 존재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목사가 그의 권력으로 다양한 윤리, 도덕적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목사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권한을 제거하고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앞선 이야기의 결과가 ‘관리’와 ‘통제’의 시스템을 가진 교회라면 이번 이야기는 ‘견제’와 ‘감시’의 시스템을 가진 교회가 되고 만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 '우리'의 이해

‘우리’ 혹은 ‘공동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확신에 찬 언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로 딱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것만이 ‘옳다’하는 것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안적 교회와 공동체를 이끄시는 분과의 대화에서 그분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다. 물론 그가 주도하는 공동체는 매우 모범적으로 보였고, 실제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 우정과 공유경제의 공동체는 외부에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게 보였다. 

한 참여자가 그에게 질문을 했다. “다른 교회나 공동체도 지금 하시는 방식대로 꼭 따라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방식의 공동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말했다. “공동체라면 반드시 이렇게 새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식이라면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요?” 그의 말에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을 느꼈다.


물론 오래도록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 경험자가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신뢰가 가면서도 단순한 원인과 결과로 설명한 ‘우리’ 대하여 회의감도 들었다. 

‘우리’라는 것을 단호한 언어로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우리’를 이루는 것이 생각만큼이나 쉬울까. 

사람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변수를 모두 고려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나’라는 사람도 나 자신이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고, 갈등 가운데 선택이 바뀌기도 한다. 그렇기에 ‘너’를 모두 이해한다고 하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다. 하다 못해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라도 너의 감정을 모두 알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더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엄격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너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 나는 완벽성에 가깝고 너는 불완전에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려 한다. 알고 보면 49에서 51 사이를 오가면서도 51은 49에게 너는 흰색이 아니냐고 묻고 49는 51에게 너는 검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오류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서로 연결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에베소서를 통해 바울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교회라고 말한다 [2]. 에베소교회는 ‘소외’와 ‘배제’의 교회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경계에 뚜렷한 선을 그었다. 유대인들은 선을 넘는 이방인에 대하여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복음은 유대인의 것으로 생각했다. 인종, 계급, 계층의 장벽을 세웠고 장벽 너머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가졌다. 장벽 밖의 사람은 그리스도도 없고, 국가도 없으며, 친구도, 소망도, 하나님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바울은 말한다. “한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이제는 가까워졌다 [3]” 감정적 가까움이 아닌 공간적 가까움이다. 우리는 한 공간에 함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원수 된 것을 하나 되게 하시고, 막힌 담을 허시고, 서로 연결하시고, 성령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함께 지어져 가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교회다.

글을 마치면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 대한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는 당신에게 누구일지 궁금하다. 믿음의 터 위에 교회를 다시 세워보자는 마음이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고 우리가 만들어 갈 교회는 또 무엇일지 궁금하다.


마주 보고 있는 서로의 생각은 무엇일까?




[1] 개인적으로는 평신도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위계적 구분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곳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 또한 예시를 위해 사용하나 개인적으로는 ‘예인교회’의 사례에서 보여주는 ‘일반성도’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이 구분에 대해서 맘에 드는 단어를 선택하기 어렵다는 점을 독자들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2] 에베소서 2:21~22 

[3] 에베소서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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