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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레샘 Nov 18. 2024

태어난 김에 시골살이

도시와 헤어질 결심

한 번쯤 우리 모두 꿈꿔 본 적 있지 않을까?


아침을 여는 새소리와 청명한 하늘,

푸르른 산과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탁 트인 자연을 배경 삼아 따뜻한 모닝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리는 삶.

빠른 속도 대신 느리지만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삶.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지만 그 꿈을 실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도시생활을 내려놓고 완전히 다른 삶으로 바꾼다는 건 많은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일터,

더욱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각오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과연 그 꿈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


나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사만 11번째, 그래도 시골에서는 못살아.

"또 짐 싸야 한다고? 이사 온 지 아직 2년도 안 됐는데."


 결혼 12년 차에  무려 11번째 이사를 지난주에 마친 나는 군인가족이다.

느 지역으로  이사 가야 하는지  달 전에 알려만 줘도 참으로 감사한 일. 거기다 도시로 이동하게 된다면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된다.

비싼 도시의 주거비를 감당하지 않고도 관사에서 살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10년간은 운이 좋게도 서울, 남양주, 대전, 세종 등 꽤나 살아봄직한 도시들을 훑으며 남편에게는  '아스팔트 군인'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의 주인공, 강원도 인제.

전방 중에 최전방, 군인의 도시이자 허벌나게 추워 오줌도 언다는 최북단 오지게 먼 오지이다.

매년 한 번씩 이삿짐을 싸며 따라다니던 군인 부인은 인제 발령 소식 앞에서 조용히 부산을 떠올렸다.

'그래.  따라다닐 만큼 다녔지.  이젠 따뜻한 내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자'


남편은 없지만 남편만 없다.

친정도 있고, 친구도 있고, 학원도 있고, 스타벅스에 버거킹도 있는 부산으로 가자.

그렇게 우리는 남북 이산가족이 되헤어질 결심을 했고 그땐 그게 최선이라 여겼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부산에서 아빠 없이 살아가는 1년은 의외로 ‘행복’했다.

아빠는 없지만 친정과 시댁, 외가 친척까지 모두 한 동네에 모여 살아서 집성촌이나 다름없는 환경이었다.

아빠가 주는 사랑보다 양적으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고, 나 또한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커리어와  육아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아빠는 한두 달에 한 번씩 휴가를 받아 내려오곤 했지만, 하루 반나절 함께하고는 다시 떠나야 했다.

그때는 그런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왠지 모를 애틋함으로 연애하던 감정이 다시 샘솟는다 할까?

3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를 우리는 월말부부로 하고 있으니 12대 덕까지 쌓은 셈 아닌가?


전생에 덕을 쌓았을진 몰라도 현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코로나시대가 정리되고 나니 경제 위기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그동안 영끌족으로 부동산 투자를 하며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수입이 세계 경제 위기와 고금리, 부동산 폭락으로 인해 이자 부담과 역전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커리어를 위한 일이 아닌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해야 했고, 반복되는 아빠 엄마의 부재는 아이들을 여기저기 맡기며 눈칫밥을 먹게 만들었다.

남편은 있지만 모든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싱글맘과 다름없는 이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갔고,

'뭐 하러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거지?' 하는 허탈감과 공허함은 계속 커져만 갔다.


군인이란 직업이 멋져 존경심과 애국심으로 한 결혼이었는데, 지금은 가정은 지켜주지 못하면서 나라만 지키고 있는 남편 그저 밉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 자꾸만 떠올랐다.

전역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함께 살던지,

우리가 아빠가 있는 인제로 올라가던지,

아니면 기서 새아빠를 찾아보던지...  

전역은 연금을 받은 수 있는 년수를  채우지 못했으니 그동안 고생한 게 아까워 패스 하고,

이혼을 하고 새아빠를 찾아보자니 애 둘 딸린 마흔 아줌마를 미치게 사랑하도록 만들 재주는 없었다.


결국, 다시 짐을 싸기로 결심했다.

아직 유치원생인 두 딸아이도 시간이 갈수록 아빠의  빈자리를 더욱 깊이 느끼는 듯했다.

 나 또한 도시생활의 팍팍함과 냉혹한 현실에 너무나 지쳐있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잡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렇게 아이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 아빠가 있는 강원도 인제서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꿈꾸던 시골살이는 새소리도, 신선한 공기도, 탁 트인 자연도 아니었다.


그저, 숨을 고를 도피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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