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타이틀이 필요한 때
직전에 마케팅 대행사에서 근무했다. 병의원을 전문으로 하는 대행사였는데, 대형병원부터 개인 의원급까지 다양한 규모의 병원 홍보를 대행했다. 병원 마케팅의 가장 기본요소는 ‘의사‘다. 특히나 의원급 병원에서는 의사 개인에 대한 홍보가 주를 이뤘다. 거의 의사 개인의 홍보팀이다시피 할 정도로, 의사 개인의 실력과 경력 등을 강조했다. 여기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출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원은 병원명부터 본인의 출신을 내거는 경우가 많으며, 환자들은 의사의 출신 대학에서 벌써 신뢰를 반쯤 가지고 방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연세OO의원’ ‘고려OO의원‘ 등 다양한 타이틀이 있었지만, 그중 최고는 역시나 ‘서울OO의원’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인 서울대학교라는 타이틀답게 ‘서울’이 붙은 병원은 대부분 잘됐다. 적어도 우리가 맡은 병원 중에선 그랬다. ‘서울’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진료 개시를 하기도 전에 기본적인 신뢰를 쌓은 셈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믿음을 가지고 방문했다. 진료를 잘 보면 ‘역시 서울대‘라는 후기가 따라왔다.
소수의 명품 매장 직원들이 마치 자신이 명품이라도 된 것처럼 고객을 무시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인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잠시 잠깐 그런 기분에 취했었다. 운 좋게 서울대학교 출신 의사들을 꽤 만날 수 있었고, 의사들과 신뢰를 쌓고 일하다 보니 마치 내가 서울대학교라도 된 것처럼 착각했었다. 서울대가 아닌 연대나 고대 특히 그보다 낮은 지방대학교 출신 의사의 병원을 맡게 되면 알게 모르게 이미 경쟁력이 약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시작했다. 서울대가 아니라서 타이틀이 너무 약하다고 투정 부렸고 (물론 의사들에게 직접 말한 건 아니었다) 병원 환자가 줄거나 상황이 좋지 않으면 ‘그러게 서울대에 갔어야지’라며 직장 동료들끼리 장난스럽게 말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의대 근처에도 못 가본 주제에, 워낙 뛰어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잠깐 머리가 돌았던 게 아닐까. 그곳에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던 거고.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결국 어떠한 타이틀이 있어야 기본은 먹고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신뢰면에서도 현실적인 매출에서도.
처음 글을 쓸 때는 글이 모든 걸 증명할 거라고 믿었었다. 글은 글로써 보여주면 될 일.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묵묵하게 쓰는 일밖에 없을 거라고. 그래서 열심히 써나갔다. 돌아보면 대단한 원고도 아니지만 쓸 당시에는 큰 꿈에 부풀었었다. 오 생각보다 내 글 괜찮은데?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계속해서 썼다.
뒤늦게 출간기획서를 쓸 때쯤이 되어서야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다. 출간기획서를 쓰기 위해 출판된 책 중 주제나 결이 비슷할 것 같은 여러 책을 찾아보던 중 깨달았다.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타이틀이었다. 심리에 관한 책이라면 작가가 적어도 심리학에 발을 담갔거나, 심리상담사 자격증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승무원이 쓴 여행 이야기,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쓴 카페 이야기, 특수청소부가 쓴 죽은 사람들의 집에 관한 이야기 뭐 이런 식이었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유명인의 추천이 있거나, 적어도 ‘SNS에서 OO만 명 이상이 감동한 글’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내가 봐도 궁금하게 만들어지는 홍보문구였다. 전문직에 종사한 사람들이 쓴 이야기니까 더 전문적이겠지 또는 얼마나 잘 썼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읽었을까 와 같은 호기심이 일었다.
병원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업계에서 현실적인 숫자와 돈 이야기만 매일 같이 나누다가, 글을 쓰는 세상으로 오면 그러한 현실적인 숫자와 돈 이야기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글도 누군가 읽어야 생명력을 가지고, 책도 팔려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책이 팔리려면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저자의 이력이나 특징,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등등 나를 홍보하는 일이 필요하단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엔 타이틀 문제였다. 나를 수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들었을 때 혹할 만한 타이틀이 나에게 있을까. 출간기획서를 쓰려고 앉아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나를 수식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30년 넘게 꾸준히 무엇이든 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세월이 모두 백지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억울했다. 억울해도 별 수 없었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타이틀은 내게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나 투덜대던 ‘진료를 잘 보고 실력도 좋지만, 막상 내세울 타이틀이 없는 의사들‘ 딱 그런 상황이었다(‘실력도 좋지만’은 자화자찬 같지만 나라도 나를 사랑해야…). 억울해도 너무 억울해서 동네방네 억울함을 표출하고 싶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억울함을 친구들끼리 표출한 적이 있었다.
“아니 신입이라고 안 뽑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으라는 거야?”
신입이라고 안 뽑고 서울대 안 나왔다고 진료 안 보고 이렇다 할 타이틀 없다고 책도 못 내고… 이러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러워서 어떻게 사나… 이렇게 어리광도 부리고 싶었지만, 이미 어린 나이도 아니고 나도 현실적인 문제쯤은 안다. 쌩신입을 가르치는 일은 무척 어려워서 특히나 소규모의 중소기업이라면 신입을 가르칠만한 인력의 문제에 부딪혀 당연히 경력 신입을 우대할 수밖에 없고, 물론 서울대가 아니라도 의사가 실력이 있다면 가겠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내 몸인데 검증된 서울대 출신을 찾고 싶은 게 결국 소비자의 마음이며, 공짜로 읽는 것도 아니고 돈 주고 사는 책이며 시간을 들여 읽는 글인데 당연히 사람을 혹하게 할 타이틀이 있는 작가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이렇다 할 특별한 이력 없이 무던한 삶을 살아온 나를 탓해야 할까. 그건 너무 서러운 결론이니 지금부터라도 나를 내세울 이력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흔히 ‘자기 PR 시대‘라고들 한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홍보담당자가 되어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요즘 시대에, 나도 나를 내세울 문구 하나쯤은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