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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백년 Nov 10. 2023

아빠와 아들이 지나는 상실의 시간

영화 <약속>

아빠와 아들이 지나는 상실의 시간

영화 <약속>



운이 좋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건진 몰라도,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거의 겪지 못했다. 초등학생 시절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보내 드린 후, 여태껏 부모님은 물론 가까운 친척들조차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경험한 상실은 사실상 상실이라고 볼 수도 없을 수준이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장례식장에서 아주 잠깐 슬프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다시는 그분들을 못 본다는 사실이 이상할 뿐이었다.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 보려고 노력했지만, 몇 달에 한 번씩 만나던 분들이 떠났다는 사실은 결국 나를 울리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엄마나 아빠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 고개를 푹 숙였고 침울한 표정을 했다.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감정을 나누던 부모님이었다면 내 마음도 달랐을까?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는 날 보며, 스스로 제정신이 아닌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후로 가까운 이들은 다행히 세상에 머물렀고, 나는 죽음은커녕 장례식장조차 낯선 사람이 됐다. 여전히 장례식장 앞에 서면 실수라도 할까 봐 가슴이 콩닥거리고, 장례식장 예절을 몇 번은 검색해 보기도 하며, 가까운 이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가늠조차 못 하는 그런 사람.



출처 : 다음 영화



나와는 다르게, 영화 <약속>의 시우는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엄마를 잃었다. 영화는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주 어린 시우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제주도의 울창한 숲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에서, 어느새 엄마는 사라지고 아빠와 단둘이 남는 시우. 엄마는 어린 시우를 남겨두고 떠났다. 작은 나무만큼도 자라지 못한 아들을 두고. 광활한 숲을 떠다니는 꽃씨같이 조그마한 아이를 두고. 



출처 : 다음 영화



수많은 밤, 시우는 아빠 품에서 운다. “엄마가 없어서 좋은 게 하나도 없어”라며. 너무도 일찍 죽음의 상실을 겪은 시우는 영화 내내 자주 운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마냥 운다. 울고 있는 시우의 모습에서, 먼 미래의 내가 보였다. 언젠가 나도 꼭 저렇게 울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가 없어서 좋은 건 하나도 없다고. 마치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듯 그렇게.


그리고 얼마 전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에 눈물 흘리던 엄마가 생각났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엄마는 여전히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를 할 때면 운다. 짜증을 많이 내서 한이 된다, 라든지 지금 너네가 큰 걸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라든지. 아직 살아가며 부모님이 세상이 없던 적이 없기에, 부모가 없이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게다가 부모가 없이 수십 년을 살아낸 그 마음을, 버텨낸 세월을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영영 모르고 싶다. 부모 가슴에 대못 박는 말 같지만, 그 시간이 어찌나 두려운지 한날한시에 같이 가거나 내가 먼저 가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출처 : 다음 영화



내가 이따위 철없는 생각이나 할 때, 시우는 시를 썼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단어들을 모아 시를 지어가며, 시우는 점점 자랐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라는 엄마와의 약속이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되어, 작은 줄로만 알았던 시우의 세계는 그 어느 나무보다 높고 곧게 뻗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본,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겪어내는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상실을 외면하거나 이겨내려 하지 않는 모습. 시우의 시처럼, 길은 끝이 있지만 희망은 끝이 없기에, 영원한 희망을 품고 시를 쓰는 일. 그렇게 엄마의 죽음을 천천히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 시우는 어느새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출처 : 다음 영화



오히려 신경 쓰이는 쪽은 민병훈 감독이었다. 잘 참았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다가, 마지막 순간 아내의 나무 앞에서 흐느껴 울던 민병훈 감독의 모습에 무너지고 말았다. 영화는 시우가 상실의 슬픔을 잘 지나가는 모습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옆엔 단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인 민병훈 감독이 있었다. 매번 따뜻하고 거대한 품으로 아들을 감싸 안는 민병훈 감독의 모습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그도 누군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내내 그의 원샷이 매우 많았다. 사람을 집어삼킬 듯 밀려드는 파도 앞에서, 물이 계속해서 차오르는 제주 바다에서, 사람 키의 몇 배는 돼 보이는 울창한 숲속에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인 눈 사이에서. 민병훈 감독은 카메라 앞에 계속해서 등장했고,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했다. 누군가를, 어딘가를 바라보듯. 생각하듯. 그게 어쩌면 그가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을까.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자기 모습을 보는 일이,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그에겐 슬픔을 지나는, 시우와는 또 다른 방식이었을까. 영화 내내 까맣게 잊었다가 마지막에 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도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라는 사실이 머리를 때렸다. 우는 시우를 품에 안았듯이, 그도 혼자 우는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럼, 누가 그를 안아줄 수 있었을까.



출처 : 다음 영화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무너져 내렸던 마음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시우에겐 시가 상실의 슬픔을 지나가는 방법이었듯이, 민병훈 감독에겐 이 영화 자체가 그러한 방식이었겠구나. 그는 영화를 찍고 시우의 시를 읽고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며, 이미 그 자체로 그 시간을 지나가고 있던 것이었겠구나, 안도했다.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홀가분해졌다.


쉽게 꺼내 볼 작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소중한 사람이 떠나고 이 작품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찾아올 상실의 시간을 떠올리면 벌써 저릿하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잘 지나가기 위해.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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