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족이 되는 시간 Aug 28. 2022

딜리트 키 속으로 도망간 시

    

 1.

밤새 쓴 시가 도망갔어요. 얼굴만 가리고 반라의 모습으로, 딜리트 키 속으로 도망갔어요. 벗으라고 벗으라고 했는데도 반만 벗고 깜빡이는 새벽의 시간 속으로 도망갔어요. 어릴 때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요.


2.

우리 엄마도 옷을 벗지 않았어요. 목욕탕에서도 수건으로 앞가슴과 그곳만은 가리셨어요. 나도 그래야만 되는 줄 알고 따라 했는데, 지금 내 시들도 그래요. 쇠꼬챙이를 갖다 대도 벗지 않아요. 안 벗을 거야, 안 벗을 거야.


3.

첫날밤에도 안 벗었어요. 사랑은 벗는 거라고 하는데도 안 벗을 거야, 안 벗을 거야, 버둥댔어요. 그리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어요. 선생님은 시를 쓰려면 자기를 벗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안 벗고 이 시를 썼어요. 그러다가 안 벗을 거야 악을 쓰며 딜리트 키 속으로 도망갔어요.


4. 

모니터 속에는 별이 뜨고, 꽃잎 진 목련 가지가 뜨락에서 흔들리고 있네요.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철없이 벗고 뛰놀던 은빛 기억을 쪼아대네요. 시퍼렇게 멍든 여인, 산산이 부서진 살림살이, 안 벗을 거야, 안 벗을 거야……


5.

여자의 본능은 벗는 거라는데, 그래서 와이키키 해변의 여자들은 모두 비키니 수영복을 입는다는데, 시도 벗는 법을 가르치는 종교라는데, 안 벗을 거야, 안 벗을 거야……, 딜리트 키 속으로 도망간 반라의 시가 원망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 사유 & 이혼 사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